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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이지학에 머문 사람들에게

카잔 2014. 8. 17. 20:36

 

어느 여대생이 “남자는 군대에 가야 해”라고 말했다. 그녀는 군대를 다녀온 남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를 두고 둘의 인생과 사회적 비용 등을 감안하여 비교하여 말한 걸까? 아닐 것이다. 다음과 같은 상상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복학생 선배의 군대 개똥철학을 들었다. 그리고는 잊었다. 다른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왔다. 문득 선배에게 들은 군대론이 떠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복학생에게 들은 입대 당위론을 펼친다.

 

젊은 날의 대화라면 괜찮지만 인문학을 이렇게 공부하는 건 아쉽다. 구이지학(口耳之學)을 이룰 뿐이다. 구이지학이란 “귀로 들은 것을 그대로 남에게 이야기하는, 조금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 학문”을 뜻한다. 생각하지 않으니 깊어질리 없다. 생각하지 않았으니, 실천과도 멀어진다. 구이지학의 특징은 피상적인 앎과 정체된 삶이다. 구이지학은 사유를 놓친 결과다. 귀로 들은 것을 입으로 전달하기에 바빠 생각하지 않는다.

 

가볍게 공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개념이라 종종 사람들에게 구이지학을 설명했다. 대개는 공감하지만, 난처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절망하는 이들을 만난 것이다. 나는 실존적, 현상학적 접근을 중요하게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구이지학으로 책을 읽는 것이 현실이라면, 구이지학을 공부의 1단계로 보자는 말이다. 구이지학은 읽기의 좋은 출발점이라고, 뒤집어 생각하자.

 

모든 가치는 장단을 지닌다. 나쁜 뉘앙스를 풍기는 구이지학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나 처음부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생각을 ‘갖는’ 것으로 시작한다. 구이지학의 유익은 아직 생각하기에 서툰 이들에게 지성으로 가는 디딤돌이 되어준다는 점이다. 시시한 구이지학에서 유익한 구이지학으로 옮겨가면 된다. 그러면서 점점 구이지학을 넘어서게 되지 않을까? 구이지학에서 도약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1) 깊이 있는 것을 전하기. '깊이'를 강조한 게 아니라, 이해하는데 꽤나 '노력'이 드는 콘텐츠로 대화하자는 말이다. 지혜를 전하면 서로에게 유익이다. 전달이 효과적으로 이뤄진다면 구이지학 자체가 위대한 지성과 일반인 사이에서 좋은 매개체가 된다.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신자유주의, 사적 유물론 등 지적 담론 하나를 연구하거나 인문 고전을 독파하는 것도 좋다. 하나의 사상을 이해하면 다른 사상을 이해하기가 쉬워지고 이해하는 과정 자체가 사고력의 향상을 돕기 때문이다..

 

2) 실천하고 전하기. 귀로 들어 입으로 말하는 사이에 실천을 삽입하는 것이다. 손과 발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기 것으로 소화되는 것들이 많다. 소크라테스는 물론이고 당대를 살았던 철학자들은 철학을 이론과 개념 학문으로 여기기 이전에 좋은 삶을 돕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배운 것을 삶에서 하나 둘 실천할 때마다 깊이 있는 이해에 다다른다. 앎과 삶의 조화는 덤이다.

 

3) 여러 개의 구이지학을 갖기. 한 주제에 대해 여러 사람의 생각을 갖는 것이다. 앵무새는 한 두 마디만 모방하지만, 인간은 10권의 책을 모방할 수 있다. 구이지학 하나로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가진’ 것이지만, 여러 개의 구이지학이 쌓이면 사고를 훈련할 수 있다. 비교하며 가다듬어 벼리어 내고, 어느 쪽이 옳은지 생각하다 보면 사고력도 강화되고 자기 생각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온갖 독서법의 정점은 얼마나 생각을 잘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구이지학은 책읽기를 통한 사유 훈련의 첫걸음이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지적 게으름과 자기 생각인 양 행세하는 자기기만은 구이지학의 일면일 뿐, (피상적이고 경박하긴 하나) 얼마간의 지식은 다음 단계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구이지학을 넘어서려는 이들에게 도움 되고자, 책읽기를 통한 사유 훈련을 5단계로 정리해 둔다. 단순화의 위험이 있고 앞선 내용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단계화는 이해를 도우니까.

 

1단계. 저자의 생각 이해하기

2단계. 생각을 전달하거나 정리하며 기억하기

3단계. 다른 책을 읽으며 1~2단계를 반복하기

4단계. 여러 저자의 생각을 서로 비교하기

5단계. 선호 또는 동의하는 생각을 선택하고 다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