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일 년에 한 번뿐인 여행이기에

카잔 2014. 11. 1. 16:15

가족과 함께 10월의 마지막 이틀을 부안 변산반도에서 보냈다. 올해의 가족여행이었다. 대구에서 부안의 서해안까진 차로 왕복 9시간 거리다. 할머니를 모시고 가기엔 꽤 장거리지만, 가족들이 변산반도를 좋아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몇 년에 걸쳐 매해 변산반도를 다녀오기도 했거니와 내변산과 외변산이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국립공원 아닌가!  
 

 
나는 지난달 3일부터 7일까지 전주, 대전, 부안을 다녀왔다. 2014년 와우그랜드투어였다.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와우들도 음식, 분위기, 여정 모두 즐거워했다. 특히 전주 한옥마을의 음식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변산반도의 가을 풍경도 인상에 남았다. 그이들의 밝은 표정에 나는 보람을 느꼈다. 이에 탄력을 얻어 가족여행의 장소로 정했다. 그렇다고 쉬이 결정했던 것은 아니다.
 
여행지 결정은 언제나 어렵다. 여러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계절, 날씨, 동선은 물론이고 동행의 취향에 따라 여정이 달라진다. 누군가는 자연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역사 유적을 기대한다. 여행의 목적을 미리 공유하여 동행자들의 기대를 특정 영역으로 조정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가이드 역할을 한다면 나의 역량도 감안해야 한다. 
 
여행지 선정 1순위는 '내가 잘 아는 곳'이다. 안동, 영주, 거제, 전주, 제주, 영월, 속초, 양양, 평창은 여러 번 다녀온 곳들이다. 한 번밖에 가 보지 못했지만, 준비를 꼼꼼히 해서 기억이 생생한 담양 같은 곳도 이에 포함된다. 변산반도는 다섯 번이나 여행했다. 불과 23일 전에도 다녀왔다. 새로운 지역 여행도 좋겠지만, 낯선 곳은 아무래도 실수하기 십상이다. 실수할 때마다 가족이 고생할 일이나 시간 손실을 생각하면 모험을 지양하게 된다.
 
2순위 기준은 동행하는 분들의 취향이다. 역사와 문화재보다는 자연과 절경을 좋아하는 가족의 취향에 따라 안동, 영주, 전주가 제외됐다. 안동에도 멋진 절경이 많지만, 안동 하면 아무래도 도산서원, 하회마을, 병산서원이 먼저 떠오른다. 3순위 기준은 새로움이다. 다수의 여행자들이 이왕이면 가 보지 못한 곳을 좋아한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삼촌 숙모도 전라도 여행은 처음이라 하신다. 몇몇 여행지가 기준에 따라 탈락되고, 남은 선택지에서 변산반도를 골랐다.

 

직소보


부안에는 명소가 수두룩했다. 사찰로 향하는 전나무 숲과 경내가 아름다운 내소사, 해안 따라 펼쳐진 자연의 걸작 적벽강, 바닷물의 침식으로 형성된 퇴적암이 겹겹의 세월을 상징하는 채석강, 피서철에 더욱 흥겨워지는 격포 해수욕장, 부안의 작은 진주라 할 모항 해수욕장, 내변산의 풍광 중 백미로 꼽는 직소보와 직소폭포! 
 
올해도 가족여행 경비는 내가 전액 부담한다. 지금까지의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키워주신 삼촌 숙모의 은혜에 비하면 작디작은 보답에 불과하다. 여행 준비도 줄곧 내가 맡아왔다. 가족 중엔 나만큼 전국을 돌아다닌 이가 없다.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포부가 생겼다. ‘최고의 가족여행을 만들어보자! 지금까지 여행보다 더욱 즐거운 여행, 가족 모두가 오래오래 추억하는 여행을.’
 

 
나만 서울에 따로 살다 보니, 여행 준비를 위한 소통 채널이 필요했다. 본가의 동생이 소통을 맡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동생과 두 차례 메일을 보냈다. 첫째 메일엔 여행 준비를 위해 가족들이 결정해야 하는 안건을 담았다. 동생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동선, 숙소, 식사 메뉴가 결정되었다. 둘째 메일엔 여행 복장을 가늠하기 위한 날씨, 도보 거리 등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전했다.
 
부안의 여러 장소와 동선이 눈에 훤히 보였다. 할머니께서 걷기 힘드실 경우, 어디에서 쉴 것인지, 차를 어디에 주차할는지, 도보 이동 거리는 어떤지 등 세부 사항도 체크했다. 도보 40분 거리의 직소폭포가 관건이었다. 할머니에겐 제법 먼 거리다. 휴식을 위한 계획을 세웠고, 에너지 충전용 간식을 준비했다. 여행지에서의 시간 가치를 생각하면, 꼼꼼히 준비해야 했다.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는 동시에 그곳만의 정취를 맛보려면 전체 일정이 여유로워야 한다.
 
<첫째 날>
 
09:00 대구 출발
13:00 점심식사
14:00 내소사
16:00 모항 해수욕장
17:00 체크인
17:40 일몰 관람
18:30 저녁식사
 
<둘째 날>
 
10:00 호텔 출발
10:30 적벽강
12:00 점심식사
13:30 직소폭포
16:00 부안 출발
20:00 대구 도착
 
여행 당일,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전날 챙겨 둔 가방을 들고 차에 앉으니 5시 30분이었다. 양평 아카이브에 들렀다가 대구에 도착하니 9시 05분이었다. 식구들이 나오는데 15분이 걸려 우리 가족은 9시 20분에 출발했다. 양호한 시간 준수다.
 
대구에서 전라도로 향하는 도로 사정은 정말 열악했다. 지방 도시과 교통이 편리한 서울과는 확연히 달랐다. 고속도로 주변의 정돈되지 못한 풍광, 깜짝 놀랄만큼 간소한 휴게소, 시대를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특히 88올림픽고속도로가 복병이었다. 편도 1차선의 고속도로라니! 앞에 트럭이 달릴 때면 속도를 줄인 채로 추월 차선이 나올 때까지 트럭 꽁무니를 따라야 했다. 공사 구간도 많아 잦은 정체가 일어났다. 삼촌과 영호남 지역 격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열악한 고속도로 사정으로 점심 식사가 한 시간쯤 늦어졌다. 다행히도 이후 일정부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부안 적벽강

 
적벽강은 변산면 격포리의 해안 절벽을 일컫는 명칭이다. 송대의 시인 소동파가 머물렀다는 중국의 적벽강과 흡사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적벽강은 물 흐르는 강(江)이 아니다. 산등성이나 언덕을 뜻하는 강(岡)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안내문이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강(江)이라고 표기되어 혼란스러웠다. 조만간 시간 내어 동파의 적벽강 문헌을 찾아보아야겠다.
 
동파 소식은 황주로 유배되었을 때 그 유명한 적벽부를 지었다. 적벽부는 역사적 회고와 인생에 대한 감회가 어우러진 절창이다. 때는 삼국시대, 명장 주유가 조조의 군대를 격파했다. 소식은 주유의 공을 회상하면서 시작하여, 꿈결 같은 인생의 일면을 읊조리면서 노래를 맺었다. 나는 적벽강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와 적벽부의 시작부 두 줄과 종료부 예닐곱 줄을 외워두었다. 여기서는 전(前)전벽부 전문을 적어둔다. 
 
장강은 동쪽으로 굽이쳐 흐르며
세찬 물결로 천고의 인물들 다 쓸어가 버렸네.
옛 성의 서쪽에는
사람들 말하길 삼국의 주유가 싸웠던 적벽이 있다네.
어지러이 널린 바위 구름 뚫을 기세로 솟아있고
성난 파도는 강기슭 할퀴며 달려들어
천 겹의 눈덩이 쌓아올리듯
이 강산 한 폭의 그림 같으나
한때 영웅호걸 그 얼마나 많았던가!
아득히 멀리 주유 살던 때 생각하니
소교와 막 혼인하고 영웅의 자태가 드높았으리.
깃털 부채와 비단 두건 쓰고 담소하던 중
적군의 배는 재가 되어버렸지.
이 마음 혼백 되어 고향 땅 노닐 때
정 많던 그대여 날 보고 웃겠지.
일찍 희어진 머리 보고서
인간의 삶이란 꿈과 같은 걸
강에 비친 달에 한 잔 술 권하노라.
 
외워둔 적벽부 몇 줄을 읊을 기회가 오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적 호기심을 쫓아 준비했을 뿐이다. 가족 앞에서 시를 외는 것도 멋쩍은 일이었다. 하지만 부안의 적벽강을 바라보면서 잠시 적벽강의 유래와 소식에 관한 짧은 얘기를 나눌 기회는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의 예상은 어긋났다. 적벽강에 도착했을 때,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닷바람이 엄청나게 불었다. 오래 걷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소식과 적벽부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제대로 탐방한 첫 여행지는 능가산 내소사였다. 사찰로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에서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오대산 월정사, 포천 광릉수목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전나무숲길이라 일컬을 만큼 아름다운 산책로다. 셋 중 우열을 가리긴 힘들다. 내소사 전나무숲길은 그만의 운치가 있는데, 숲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 덕분이 아닌가 한다.
 

내소사 전나무숲길

 
내소사는 임진왜란의 참화로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조선 인조 때 대웅보전 등 몇몇 전각을 중건했다고 전한다. 전란을 겪었는데도 국보급 문화재가 많다. 대웅보전이 보물이고, 삼존불 뒷벽에 그려진 백의관음보살좌상은 국내에서 가장 크단다. 전각의 꽃무늬 문살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동종 또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대웅보전

 
와우투어를 하면서는 설명을 덧붙이며 문화재 하나하나를 함께 살폈지만, 가족여행 때는 그러진 못했다. 이제 와서 뒤늦게 아쉽다. 들으시건 말건 잠깐씩 말을 꺼내면 기꺼이 들으셨을 텐데, 관심이 없으시다 싶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은 내 성향 탓임을 아는 까닭이다. 메마른 지식을 나열하는 방식 대신 인상 깊은 스토리텔링을 준비했더라면 용기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모항 해수욕장과 채석강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풍광이었다. 바다는 하늘빛을 반영한다. 와우그랜드투어 때는 화창했던 하늘 덕분에 모항의 앞바다가 보석처럼 빛났다. 이번엔 달랐다. 우중충한 잿빛 바다가 펼쳐졌다. 멋진 풍광이 아니어서 속상했다. 우리 가족은 경상도 사람들이다. 감탄은 드물거나 짧았다. 경상도 전형의 무뚝뚝함과 심드렁함이 자연스레 우러나곤 했다. 채석강을 경상도의 감성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채석강의 일몰이 분위기를 바꿔 줄까. 일몰 시각은 오후 5시 40분! 채석강을 잠시 둘러보고 바닷가에 앉은 시간이 5시 10분. 최적의 타이밍에 도착했지만, 날씨가 따라주지 못했다. 구름이 태양을 꼭꼭 숨겼다. 맑은 날이었다면 석양을 바라보며 환상적인 30분을 보냈겠지만, 그날의 하늘은 무심했다. 할머니를 비롯해 가족 모두가 바다로 떨어지는 일몰은 본 적 없다고 하셨기에, 더욱 아쉬웠다.
 

부안 채석강 앞바다

 
첫날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튿날엔 아침부터 비가 왔다. "가을비가 오면 얼마나 오겠노?!" 숙모의 예상과는 달리, 제법 굵은 비가 온종일 내렸다. 예정했던 직소보와 직소폭포 여행은 무산됐다. 수성당 관람도 하지 못했다. 차를 몰고 수성당 주차장까지 갔었지만 "비 오니까 그냥 가자"는 말씀에 차를 돌려야 했다. 아, 얄궂은 날씨여!
 
대안은 실내 여행지였다. 신석정 문학관, 신재생에너지체험관 그리고 고려청자박물관이 있었지만, 가족은 예술 쪽엔 관심 없었다. “고마 집에 일찍 가자”라는 말씀이 슬쩍 튀어나와 나비처럼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말씀을 들었지만, 나는 못 들은 척할 수도 없었고 그 말을 쫓아 이른 귀가를 결정하기도 힘들었다.
 
여행의 향방을 결정해야 했다. 상황은 경비와 일정을 책임졌던 내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비장의 카드였던 직소보 트레킹이 무산되어 아쉬웠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에 감정적으로 매여 있을 겨를은 없었다.
 
결정하기 위해 감각을 곤두세웠다. 나의 선택은 전적으로 가족의 관심과 의향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을 할 때나 세심한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그래왔듯이 나는 질문을 던졌고(“어떡하면 좋을까요? 편히 말씀 주세요”), 답변의 내용뿐만 아니라 어조와 말투에서 의향을 파악하려고 귀를 기울였다. 애를 쓴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 자연스러운 나의 본성이었다.
 
차가 막힐지도 모르니 조금 일찍 출발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삼촌과 동생은 '새만금 방조제'에도 관심을 보였다. 대구로 돌아갈 경로는 대전을 경유하는 경부고속도로를 선택한 터라 부안에서 군산까지 이어지는 새만금 방조제를 들르기로 했다. 방조제의 시작부터 끝까지 달리는 바닷길은 무려 34km였다. 바다 풍경이 환상적이면 좋겠지만, 10분만 지나면 절경도 시들해지는 법이다. 하물며 우리는 경상도 사람들이다! 감수성 풍요로운 분들도 계시니, 우리 집은 경상도의 전형을 갖추었다. 억양은 높지만, 감탄은 짧다.
 
새만금은 뜻밖의 여정이다. 방조제에 진입하기 전에 홍보관에 들러 기본 정보를 얻었다. 홍보관 관람과 새만금을 달리는 드라이브 덕분에 오후 일정은 거의 채워졌다. 새만금 방조제는 어땠냐고? 동생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헤드뱅잉을 하면서 잠들었다. 그러잖아도 먼 귀갓길인데 34km를 덧붙인 꼴이 됐다. 방조제를 달리는 도로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하늘도 바다도 잿빛이었다.
 

새만금 방조제

 
이번 가족여행은 기대를 벗어났다. 변산반도 여행이 좋을 거라던 확신도 보기 좋게 깨졌다. 가족끼리 나눌 이야깃거리 하나가 쌓였지만, 여러모로 안타까운 여행이었다. 물론 가족과 함께한 시간만으로도 의미는 컸다. 첫날 숙소에서 삼촌 숙모와 나눈 진솔한 대화는 뜻깊었고, 할머니의 웃음을 자주 보아서 기뻤다. 허나 여행마다 잊지 못할 추억을 쌓고 싶었던 나로서는 못내 아쉽다. 아니면, 이렇게 아쉬운 여행으로써 잊지 못할 추억이 된 걸까. 
 

 
어디 날씨 때문이겠나. 궂은 날씨에 따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불찰이 컸다. 숙모 휴가에 맞춰 한 달 전에 결정했던 일정을 바꿀 수는 없었다. 다른 가족들은 어떤지 문득 궁금해진다. 내년 가족여행을 준비할 때는 일정과 여행지에 대한 조사뿐만 아니라 여러 가족의 여행기를 찾아봐야겠다. 그들의 즐거움과 어려움은 또 어떤 모습일까.
 
내가 가족여행에 너무 부담을 갖거나 과도한 기대를 거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좀 더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떠나는 편이 낫기도 하겠지만, 매년 아름다운 여행 추억을 선사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대구로 향하는 귀갓길을 운전하면서 이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차창엔 궂은 날씨로 인해 가 보지도 못한 내변산의 풍광들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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