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나는 왜 이 글을 썼을까

카잔 2015. 1. 21. 09:35

 

1.

평생동안 우리가 진정 사랑했던 이들은 몇 명이나 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당신이 좋아하는 다른 것과 비교하면, 이를 테면 책을 좋아한다면 읽은 책의 권수, 여행을 좋아한다면 여행을 갔던 도시들과 견주면 사랑의 숫자는 더욱 초라해진다. 대다수가 이런 상황이라면, 이것은 우리가 형편없이 살아서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힘든 존재인 것이다. 아름다운 삶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숫자를 늘려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아름다움을 논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다음의 질문이다.

 

상실은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 이 글을 쓰게 한 동기이기도 하다. ('상실이 우리를 바꾸기나 하는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나는 부럽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경험이 아직은 없을 테니까.) 나 역시 정말 사랑했던 이들은 소수다. 학창시절이면, 대개 그렇듯이 나도 친구를 사랑했다. 사회인이 되면 많은 친구들과 헤어지지만 마음 맞는 소수의 친구들은 평생을 간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친구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태 전에는 존경했던 스승도 세상을 떠나셨다.) 사랑했던 그 소수의 사람이 떠나고 나면, 우리의 내면은 변한다. 문득 새만금방조제가 떠오른 건 왜일까. 새만금이 지도를 바꾸었듯이 상실은 내면의 지도를 바꾸기도 한다.

 

2.

스무 살의 청년도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지만, 그 앎은 그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리라. 당신 또한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앎이 당신께 교훈이나 삶의 지침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죽음에 관한 상상은 슬프거나 불쾌하게 느껴져, 추상의 관념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불쑥 상실을 현실에서 생생하게 만나면 우리는 당황하고 후회한다.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그 관계에 더 헌신하지 못했음을. 회한과 후회는 필연적인 인생사다. 삶의 모든 비극을 미리 대비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때로는 우리의 잘못이 후회에 기여하겠지만, 어떤 후회는 불가항력적이다.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미리 생각해 두지 못하고, 좀 더 일찍 더 사랑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한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인간 존재의 슬픔이다.

 

3.

지하철 선로에 아이가 떨어졌다고 하자. 용감한 시민 한 명이 뛰어내려 아이를 구했다면, 그는 영웅이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 있기만 했지 아무 일도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영웅의 반대적인 존재는 아니다. 인지상정의 감정(당황, 불안, 두려움)을 느꼈을 뿐 아무런 잘못도 없다. 죽음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기실 노년이 죽음에 대한 태도와 청춘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같을 순 없다. 노년은 구체로, 청춘으로 추상으로 죽음을 사유한다. 한 젊은이가 예순 무렵에나 터득할 교훈을 스무 살에 이미 가졌다고 하자. 그는 훌륭하다. 뒤늦게 깨닫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못한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은, 주문한 음식이 늦게 배달되는 것과 비슷하다. 누구의 잘못인가? 분명 당신 책임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배달원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적 화를 낼 수도 없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문제는 다음부터다. 일찍 왔더라면 경험하지 않았을 허기짐의 시간을 시간 10분, 20분은 누가 보상해 주는가. 음식을 두고 치졸하게 굴 필요는 없지만, 삶으로 옮겨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많은 이들이 뒤늦게 후회한다.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다. 그때 느끼는 감정은 허기진 것과는 비할 바 못되는 아쉬움이다. 후회하면서도 자기를 기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는 후회는 안 한다고 말한다. 나는 만족이 커서 후회를 인식조차 못하는 삶을 살고 싶다.

 

4.

삶의 경이를 깨닫고, 순간마다 몰입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여유로운 일상! 이 문장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나는 확신하게 말하리라.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고. 아니 기억보다는 이 단어가 더 낫겠다. 죽음을 사유하자! 나는 정말, 죽음에 대한 사유가 삶의 경이를 일깨운다고 믿는다. 죽음에 대한 사유가 잠시 어두운 터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되돌아가지 않고 사유를 좀 더 밀고 나아가면, 어둠의 끝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곳은 예전보다 더 빛나는 세계다. 경이와 환희의 세계, 몰입과 성취의 세계, 자유와 여유의 세계, 나눔과 사랑의 세계. 나는 말하고 싶다. 죽음에 대한 사유가 그 세계로 가는 터널이라고. 이것이 제목에 대한 답변이다.

 

5.

내가 20대 초반부터 죽음에 대한 글들을 읽어왔다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이해와 놀람이 교차한다. 양친이 모두 스무살이 되기 이전에 돌아가셨으니 이해가 되다가도, 상실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사유하고 죽음에 관한 텍스트를 읽지는 않을 것이기에 놀랍다. 언젠가는 죽음을 주제로 책을 집필하든, 연재글을 쓰든, 어떤 노력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모든 작가가 죽음을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는 글쟁이는 다뤄야하만 하는 주제일 것이다. 마치 특수임무처럼 말이다. 아쉽게도 두 번의 노트북 자료 상실로 띄엄띄엄 써 왔던 글, 메모, 자료가 없다. 특히 친구와의 사별을 틈틈히 기록한 메모까지 잃은 건 정말 아쉽다. 디테일한 기록은 마음을 추스린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아직까지는 기억하고 있는, 사별의 순간에 느꼈던 생각과 한 조각의 지혜를 기록이라도 해 두어야겠다. 세월은 기억보다 강하기에.

 

아쉬운 대로 내가 읽은 것들부터 공유한다. 이 글이 마음에 와 닿은 분들은 읽어보시면 도움 되리라 생각한다. 추상적으로 접근한 텍스트보다는, 죽음을 생생한 삶의 지혜로 승화시킨 텍스트 위주로 소개한다. 언젠가 언급했지만, 알랭 드 보통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삶의 경이로 전환시키는 데에 최고 수준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사실 그는 거의 모든 인문적 주제를 삶의 기술로 전환하는 데 능하다. 자기경영서처럼 디테일하지는 않지만, 사실 많은 자기경영서는 편협하거나 치우친 디테일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의 책 중 『프루스트가 내 삶을 바꾸는 방법들』 1장이 죽음을 다뤘다. 죽음을 현재에 몰입하는 기술로 전환하는 법을 발견할 것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상실수업』은 사별 이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지혜롭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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