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나는 전봇대가 아니다

카잔 2015. 9. 6. 17:13

'아, 라틴어 복습해야 하는데...' (수업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오늘도 하지 않으면 이번 수업은 따라가기 버거울 것이다.) '벤야민도 읽어야 하는데...' (벤야민 세미나는 미리 읽어가지 않으면 얻는 것이 확연히 줄어든다.) '마음편지를 미리 써 두면 좋은데...' (월요일마다 보내는 마음편지는 작성하지 않고 당일날이 되면 과업처럼 다가온다.) '원고도 한 번 더 퇴고해야 할 텐데...' (한번만 더 들여다보아야만 여타의 출판사로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애일당 청소하는 날인데...' (아침에 하려다가 관두었는데, 오후가 되니 귀찮아졌다.)

 

 

여느 때 같으면 즐거운 공부요 독서요 일감바구니 비우기 놀이거리일 텐데, 오늘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이것은 압박감의 목록이다. 나는 내 소중한 시간을 압박감에 내어주고 싶지는 않기에 지금의 내 상태에 바짝 다가서서 나를 흔들어깨우기로 했다. 잘 영근 결실을 맺고 있는 나무를 흔들면 과실이 우두두 떨어진다. 나는 전봇대가 아니라 과실나무다. 해마다 자라고, 계절마다 육체적 정신적 옷을 갈아입고, 때가 되면 결실을 맺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를 흔들면 '우두두' 까지는 아닐지라도 그간 노력하고 공부해 온 것들의 결실이 떨어질 것이다.

 

결실 하나. 2년 전에 읽은 책 한 권.

 

잘 쉬어야 에너지를 충전하고, 에너지가 많아야 활력 넘치는 일상을 창조한다. 무위(無爲)가 좋은 휴식인가. 2년 전에 읽은 책 『휴식』에 따르면, 고대 현자들에게 좋은 휴식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나 자유로운 시간보다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가장 깊숙한 내면과 만나는 시간’이다. 오늘 집을 나서며 자기경영 노트를 가방에 던져 넣은 것이 반갑다. 나는 노트를 펼쳐 이틀 전 『리더십 챌린지』 페이지 모퉁이에 적었던 가치와 원칙 목록을 옮겨 적으며 다듬었다. 내가 추구할 가치, 근본으로 삼을 원칙을 바라보니 과연 휴식이 되는구나 싶었다.

 

 

결실 두울. 새로운 목록 하나.

 

나는 지금 당장 정신적 전환을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방안 하나를 실천했다. 목록을 교체하는 것이다. 남은 휴일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가. 9월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무엇을 읽고 싶고, 무슨 영화를 보고 싶고,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 나는 희망의 목록을 작성했다. 

 

오늘? 6시부터는 프로야구를 보자, 그 전까지는 읽고 싶은 책을 읽자, 저녁 식사로는 맛난 수제버거와 와인을 마시자, 저녁에는 잠깐이라도 산책을 해야겠다... 그리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애일당을 주말 청소도 하자. 이 모든 것은 하기 싫으면 내일로 연기하자. 오늘 남은 여덟 시간은 하고 싶은 일들로만 채우자. 하루의 1/3도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인생이 세월과 함께 점점 시시해지지 않을까.

 

<베테랑> 관람하기, 파주 지혜의숲도서관에서 일하지 않고 책만 읽기, 좋은 사람들과 와인디너 즐기기, 순천 여행, 할머니랑 엄마에게 다녀오기, 금산 여행,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 읽기. 이것은 하고 싶은 일들이다. 읽고 싶은 책이야 많고 떠나고 싶은 곳도 많지만 목록과 실천은 별개의 문제이니 당장 손에 잡을 수 있는 목록이 채워지면 목록의 확대보다는 실천이라는 또 다른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 나으리라.

 

결실 세엣. 컨디션 향상을 위한 결심.

 

목요일 저녁부터 피곤해졌던 컨디션이 토요일까지 이어졌고, 오늘은 좀 나아졌지만 몸이 가벼워진 정도는 아니다. 3일 동안 생산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결정적 이유다. 목, 금, 토 삼일 동안 리더스쿨 수업을 진행하고, 『리더십 챌린지』와 『우정론』을 조금씩 읽고, 포틀랜드 여행과 모 카드회사에서의 강연을 다룬 포스팅을 한 것이 전부다.  (포스팅은 피곤한 상태에서 올려서인지 읽으신 분들의 시간이 헛되지는 않을까 염려될 정도다. 내렸다가 글을 조금 고쳐 다시 올려두긴 했지만.)

 

오늘부터 숙면을 취하기 위한 노력을 재개하고, 스트레칭에 자주 시간을 주어야겠다. 8월 중순 이후, 글쓰기에 집중하느라 취침 시간이 조금씩 늦어졌고, 스트레칭에 소홀했는데... 다시 건강관리에 관심을 주기로 한 것이다. 운동은 정말 숙제 같다. 안 하면 뭔가 찜찜하고 하고 나면 홀가분해지 말이다. 하면 내게 유익한 줄 알면서도 막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멀리 내다보면 건강관리야말로 소중하고 중요한 일인데도 그렇다. 결국 이런 일들은 자주 결심함으로 다루는 수 밖에 없다.

 

중정 나무가 예쁜 연희동 카페 CENACLE

 

나를 흔들었더니 그간 읽은 책의 내용과 희망의 목록 그리고 앞날을 위한 결심이 떨어졌다. 전봇대가 아니라는 반증이리라. 후진해 오는 차를 피할 줄 모르기는 전봇대나 나무나 마찬가지겠만, 나무는 갖가지 결실로 세상에 유익을 주고 나무그늘로 누군가에게 휴식이 되어준다. 무엇보다 나무는 살아 숨쉬며 성장한다. 나무처럼 살고 싶다. 하늘을 향해 성장하고, 계절마다 변화하고, 누군가에게 유익을 주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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