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즐거운 지식경영

세 권의 책을 구입해버렸다

카잔 2015. 9. 8. 13:31

내가 책 구입을 이리도 자제했던 적이 있던가. 아마도 있었을 것이다.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고, 두뇌는 조종종 지금의 순간을 과장하기 십상이니까. (『뇌 마음대로』라는 책은 자기를 기만하기 일쑤고 착각에 허덕이는 뇌에 대하여 두 챕터를 할애했다.) 나는 지갑이 가벼워질 때마다 서점을 멀리했겠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수입이 생기면 책을 샀고, 덕분에 다른 살림살이가 늘어날 기회는 없었다. 책 구입에 돈을 많이 쓴 것에는 내 나름의 전략은 없었다. 일관된 방향도 없었다. 장서에 대한 철학과 공부 키워드가 있기는 했지만, 얼마간은 지적 욕망의 노예였다는 말이다. (노예는 과장된 단어지만, 확실히 내 구매욕을 다스리지는 못했다.)

 

이번 여름부터 시작된 책 구입 자제는 꽤 오래 갈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보다 최소한 1/5 로는 줄었으리라. 정확히 가늠해본 것은 아니다. 아직은 돌아보기보다는 꾸준히 이어가야 할 시점이다. 서점에서 지갑을 열지 않기로 한 가장 큰 원인은 이번에 만기된 적금액이 책값으로 절반 이상 날아갔기 때문이다. 목돈이 나가니 이제야 알겠다. 내가 너무 많은 돈을 공부하는 데에 써 왔음을. (모든 것은 양면적이다. 덕분에 읽은 책들이 많고 더러 공부도 했지만, 왠지 얻은 결실보다 비용이 컸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세 권의 책을 읽어야 한 권의 책을 사는 것으로! 서평을 쓰면 한 권의 책을 사는 것으로! 책을 한 권 출간하면 세 권의 책을 사는 것으로!

 

 

얼마 전, 세 권을 샀다. 아니, 사 버렸다. 아직 출간도 안 된 책으로 미리 앞당겨 구매한 것이다. 이제 책을 사는 길은 부지런히 책을 읽는 일 뿐이다. 사실 이 놈들을 구매한지는 꽤 되었는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기에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글을 쓰는 중이다. 읽은 책도 있고, 읽고 있는 책도 있고, 서문만 살펴본 책도 있다. 당분간 만지작거리며 계속 읽어나갈 책들인데, 책을 구입한 이유 또는 읽은 소감을 간단하게 기록해 본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작년,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기사를 3개 보고서, 책으로 출간되겠구나 싶었다. 책으로 읽어야지 했던 것이 주요한 구매이유였고(책으로 읽겠다는 마음은 합리적이기보다는 취향적 이유다), 문병호 선생님의 추천이 구매시기에 영향을 미쳤다. 제레미 리프킨, 노암 촘스키, 웬델 베리의 글을 가장 고대했고 영감을 주거나 인식의 확장시킨 사상가를 만나면 그의 책들을 계속 읽어나간다는 계획이다. 『3차 산업혁명』을 E-book으로 구매할 예정이고, 주요한 환경 선진국을 방문할 생각도 있다. 인문학은 인간과 삶에 대한 인식을 준다면, 사회과학은 사회에 대한 인식을 준다. 인간만 이해해서는 지성과 지혜를 얻기 힘들다.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사회는 인간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기 마련이니까. 사회에 대한 앎을 넓히는 것! 이것이 책을 읽게 된 가장 큰 이유다. 물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책읽기는 계속 진행될 테고. (책의 난이도는 2)

 

『라케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이다. 용기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고전적인 논의가 담긴 책으로 사실 책의 내용을 이미 알지만, 앎이 아닌 실제로 용기 있는 삶을 살고자 선택한 책이다. 읽으면서도 용기를 실천하면 그만인데, 나는 또 책을 읽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독서는 내게 인식의 확장 뿐만 아니라 행동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내 방식대로 가기로 했다. (책의 난이도는 2. 일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대목은 3)

 

『부정변증법』

옮긴이(대구대 독문과 홍승용 교수)는 이 책이 두 가지를 면밀하게 고찰하고 반성하는 책임을 알린다. "『부정변증법』에서 반성의 일차 대상은 인식의 도구 자체다." 이는 20세기 철학 사조의 주요한 한 흐름이었다. "아도르노는 인식의 불완전성, 오류가능성, 역사적, 사회적 제약성 등을 불가피한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이 점에서 아도르노는 유물변증법의 기본 원칙에 따른다."(p.26) 다른 하나의 목적은 실천 비판이다. "아도르노의 반성은 사유의 도구만 아니라 인간의 실천 전체를 겨냥한다."(p.30)

 

내가 머리를 쥐어짜며 철학서를 읽는 이유가 있다. 사유의 잠수자들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깊은 인식과 치열함의 극한에 이른 사유 과정 자체다. 옮긴이 해제의 마지막 문단에서 그것을 밝혀준 대목이 있어 옮겨둔다. "『부정변증법』은 광범위한 영역의 철학사적 주제들에 관하여 눈여겨볼 만한 논평과 해석을 가한다. 그 한 문장 한 문장에서는 현실적 난제들에 대한 비타협적 고뇌의 흔적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현실변혁의 어려움, 그 과정의 장구함, 단숨에 실현될 수 없는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그려낼 끈질긴 노력의 필요성 등을 그로부터 읽어낼 수 있다. 설혹 그 결론이 바람직하지 못할지라도 극단에까지 도달하려는 사유의 과정들은, 손쉽게 정리된 바람직한 결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현재의 문제들과 대결하는데 도움을 주리라고 여겨진다."(p.47) (난이도는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