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즐거운 지식경영

양평 아카이브에 대하여

카잔 2015. 10. 20. 08:52

스무살이 되면서부터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주 책을 읽었고, 돈이 생길 때마다 책을 샀다. 때때로 책 구입비가 버는 돈을 초과하기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3~4천 권의 책을 소장하게 되었고, 취업하고 수입이 늘면서 책 구입에 들어가는 돈도 규모가 커졌다. 장서가 1만 권에 이르고부터는 책 구입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20일이 지나고 있는 이번 달에도 구입한 책은 딱 두 권이다. (한병철『에로스의 종말』,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적지 않은 장서는 골치 아픈 문제를 동반한다. 장서의 보관 말이다. 장서는 자신이 머물 공간을 요구한다. 습기가 많으면 안 되고, 바닥이 튼튼한 공간이어야 한다. 장서의 공간은 곧 비용이다. 열렬한 독서가로 산다는 것은 결국 얼마간의 비용을 지불하는 일이다. 책 구입비와 장서의 공간 마련비! 3~4천 권이 되면 작은 방을 하나 따로 내어 주어야 하니 장서는 내 집 마련의 방해꾼이 되기도 한다. 또한 장서는 이사할 때마다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욕심은 없지만, 책 욕심은 많았던 나도 장서로 고생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사는 웃돈을 얹혀 주어야 했고, 책 때문에 조금 더 넓은 집을 구해야 했다. 비단 책 뿐만이 아니라 살림이 많아도 마찬가지겠지만, 책은 그 놈의 엄청난 무게 때문에 아주 무거운 애물단지가 된다. 아직 책을 내다버릴 정도의 내공은 못 된다. 바보 같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언젠가 읽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고 책에 갖다 바친 돈이 아깝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장서들을 '양평 아카이브'에 보관한다. 양평 아카이브는 볕이 잘 드는 원룸으로, 장서의 9할이 머무는 공간이다. 연남동 작업실에서 주로 머물면서, 읽은 책을 아카이브로 갖다 놓고 필요한 책을 들고 오기 위해 한달에 서너번 양평을 오간다. 2013년 친구 박상이 양평 아카이브에 왔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벌어진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더니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선 자리에서 천천히 360도 회전을 하고 음성을 넣으면서 짧은 녹화를 마쳤다. 내가 말했다. "재수씨에게만 보여줘라잉!"

 

녹화를 마친 친구가 물었다. "이 책 얼만큼 읽었나?" 그나마 좋은 질문이다. 좀 더 나쁜 질문은 "이 책들을 모두 읽었어요?" 라는 물음이다. 이 많은 책들을 어찌 다 읽겠는가. 발터 벤야민이 <나의 서재 공개>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말한 것처럼,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책을 읽지 않기에 골수 수집가가 된다. "10퍼센트 정도는 읽었을 걸. 안 읽은 책들이 어떤 책인지 정도는 알고." 친구의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스무살 이후로 많은 시간을 책과 함께 보냈다. 책을 읽는 일에, 사는 일에 그리고 책을 옮기는 일에도! (책장을 넘기며 텍스트를 읽는 것이 가장 유익하고 즐겁지만 사는 일에도 순간적인 만족감이 있다. 옮기는 일은 고될 뿐이다.) 6천권 정도까지는 주제별, 분야별로 장서목록을 엑셀파일로 정리했었지만, 노트북 데이터를 날리면서 목록도 함께 사라졌다. 그 이후로 장서 목록은 머리로만 관리돼 왔다. 한달 즈음 시간을 내어 아카이브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정리하며 지내고 싶다. 벌써 수년 동안 품어온, 하지만 실천은 못한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