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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세심하게 읽지 마라

카잔 2016. 1. 25. 18:25

"선생님, 읽었던 내용인데 기억이 안 나요." 책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에서 종종 듣게 되는 하소연이다. 독서와 기억의 관계는 복잡하고 모호하다. "책을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라고 처방한다면 독서 선생으로서의 직무 유기거나 독서라는 행위를 신중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표지다.

 

독서 후의 허접한 기억을 설렁설렁 읽은 탓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주의를 기울여 세심하게 읽은 경우에도 책의 내용을 새하얗게 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다행하게도(?) 우리의 기억력만 시시한 건 아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의 대표 주자인 몽테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수년 전에 꼼꼼히 읽고 주까지 이리저리 달아놓은 책들을 마치 한 번도 접한 적이 없는 최신 저작인양 다시 손에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나는 내 기억력의 그러한 배반과 극심한 결함을 어느 정도 보완하기 위해서, 얼마 전부터 의례적으로 모든 책의 말미에 그 책을 다 읽은 때와 그 책에 대한 개략적인 판단을 덧붙이곤 한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책을 읽으면서 품게 된 저자에 대한 전체적인 관념과 그 분위기만이라도 남을 것 같기 때문이다." (몽테뉴 『수상록』/ 김병욱 역)

 

몽테뉴의 고백은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함을 넘어서서 읽었다는 행위 자체를 잊어버린 심각한, 하지만 우리에게도 종종 발생하는 상황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독서가 행해졌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 때도 여전히 독서가 독서일 수 있는가?"(p.81) 

 

철수와 영희가 3년 전에 같은 책 A를 집어 들었다고 하자. 철수는 A를 끝까지 읽었다. 영희는 책의 1/3을 읽었다. 그런데 지금 철수는 A의 내용을 몽땅 잊었다. (읽은 사실조차 잊었다고 해도 좋겠다.) 영희는 읽은 내용의 일부를 기억했다. 누가 A를 읽은 것인가?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읽는다는 행위의 여러 층위를 깊이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주의 깊게 읽은 책과 얘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책 사이에는 여러 수준의 독서가 있다.” 책을 읽었다, 안 읽었다라는 말로는 우리의 독서 양태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통렬하다. 곱씹을 대목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독서와 기억의 관계에 관한 저자의 주장에 집중하자. 독서 후의 기억에 대해 바야르 교수는 말한다.

 

“독서는 단순히 어떤 텍스트를 인식하는 것, 혹은 어떤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은 아니다. 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는 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한 독서다.”(p.77)

 

"기억하는 것이 많건 적건, 우리는 언제나 책의 일부분을 읽었을 뿐이다. 그 역시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책에 대해 대화를 한다기보다는 당면 상황에 따라 다시 손질된 불명확한 기억들에 대해 대화하는 것이다."(p.78)


'소득으로서의 독서'가 아닌 '상실로서의 독서'에 대한 바야르의 주장과 몽테뉴의 진솔하고 구체적인 고백은 심리적 위로를 준다. 저자는 위로 제공에 그치는 않는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일반적인 직관과는 달리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독자가 세심하게 읽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싶다면, 세심하게 읽는 독서의 부작용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저자는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① 한 권의 책이 전체 책들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는지를 파악하고 ② 책 한 권을 읽을 때 우선 얼개를 파악하기 위해 대충 훑어보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세심은 "작은 일에도 꼼꼼하게 주의를 기울여 빈틈이 없다"는 뜻이다. 저자의 진의는 '세심한 독서'의 전면 부정이 아니라, 책의 개요를 파악할 때에는 세심함이 아닌 전체적 시각이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저자의 진의를 염두에 두고서 그의 주장을 좀 더 살펴보자. 위상을 파악해내는 총체적 시각을 가지려면 한 권의 책에 파고들면 안 된다.(p.27) “진정한 교양은 전체성(totality)을 지향해야 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 환원될 수 없”(p.29)기 때문이다. 저자는 대충읽기의 대가라 할 폴 발레리를 소환하여 책을 대충 읽는 것의 위력을 설명하기도 한다. 발레리를 통해 저자는 책의 개요 파악을 위한 대충 읽기를 강조한다.  

 

바야르 교수에 따르면, 잘 교육받았다는 것은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p.31)이다. 이 말이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분들이라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읽기는 몹시 재밌는 독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저자의 생각에 반발감이 드는 분들도 이 책이 필요할지 모른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처세술이 아니라, 절대로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독서가 필요한 이유와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지혜를 담은 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