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가장 아름다운 선물

카잔 2016. 3. 10. 11:55

1.

일이 많아질 조짐을 느낀 하루였다. 낮에는 학습조직에 관한 워크숍 진행을 제안 받아 관련 미팅을 했다.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2박 3일짜리 워크숍을 서너 차례 할 수 있게 됐다. 최소한 두 차례를 진행하고픈 생각이다. 오랜만에 워크숍을 하면서 퍼실리테이터로서의 감각을 느끼고 싶기에. 저녁에는 '팔로워십'을 주제로 한 특강 의뢰를 받았다.

 

강연을 즐기긴 해도, 두 가지 모두 놀이가 아닌 '일'이다. 준비해야 하고 진행하는 데에도 시간을 써야 하는 일. (주제와 대상이 내게 맞춤한 강연은 내게 놀이다. 이번 강연은 새롭게 준비하고 개발해야 하는 영역이 많아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는 점에서 얼마간은 부담이다.) 3월의 일은 이 즈음에서 그만 받아야겠다. 공부와 놀이, 휴식도 중요하니깐.

 

2.

"진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놀랐다." 9일 알파고와의 1차 대국에서 패한 이세돌의 말이었다. 2차 대국의 승자도 알파고였다. 작년 10월만 해도 '프로기사 저단자 수준'이었다던 알파고의 실력이 불과 너댓 달 만에 세계 최고의 수준이 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여전할 테지만, AI로 인해 세상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2차 대국은 인터넷 생중계를 보았다. 줄곧 시청하지는 못했지만 관심과 귀를 열어 두었다. 중반까지는 백중지세였지만, 막판에 이세돌이 패하는 모습에 적잖이 충격이었다. 바둑을 몰라 기사를 찾아 읽었다. 프레시안 성현석 기자의 기사를 놀라면서 읽었다. 아래에 일부를 옮겨 둔다.

 

"당초 바둑계는 알파고가 과거 기보(棋譜, 바둑을 둔 기록)를 학습했으므로, 바둑 이론에 충실한 수를 둘 것이라고 봤다. 기계적으로 공식에 대입하는 것 같은 바둑 말이다. 따라서 알파고는 실수를 하지 않고 계산에는 강하지만 창의적인 수는 두지 않으리라는 예상이었다. 

이런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간끼리 두는 바둑에선 어쩌다 나오는 창의적인 수가 대국 한판에서 연거푸 쏟아졌다. 그저 계산에만 의지하는 게 아니었다. 미래의 큰 이익을 위해 당장의 작은 손실을 감수하는 전략적 판단에도 능한 모습을 보였다. 인간보다 더 인간의 강점에 가까운 바둑이었다."

 

3. 

저녁에는 <황금빛 아테네> 2주차 수업을 했다. 1주차 때보다는 청중들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수업 후 간단한 소감을 들어보니, 영화 <트로이> 감상이 그리스 고전을 이해하는 배경이자 디딤돌이 되어주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는 역사 공부의 좋은 길잡이요 벗이 될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낯설었던 지명과 인명이 조금씩 익숙해진 것도 편안한 분위기의 또 다른 이유겠다. 어떤 분은 예습을 열심히 해오기도 했다.

 

수업 후 뒷풀이 모임을 가졌다. 7명이 막걸리에 부추전, 두부김치를 곁들이며 담소를 나눴다. 사내 강사, 연극 배우, 직장인, 대학생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과의 대화였다. 뒷풀이에 참석하는 분들이 모두 즐거움 또는 유익을 누렸던 시간이기를 바래본다.

 

뒷풀이는 사실 묘한 자리다. 다양한 욕구가 발출되는 시간이다. 강연은 배움이라는 하나의 푯대가 있지만, 뒷풀이는 다양한 바람들이 공존하는 자리다. 어떤 이는 배움의 연장이기를 바라고, 다른 이는 즐거운 잡담을 나누기를, 또 다른 이는 흥겨운 술자리를 기대하거나 새로운 관계맺음을 희망하기도 한다. 각각의 바람들이 어느 정도씩 채워지는 뒷풀이 시간이면 좋겠다고, 귀가하면서 생각했다. 배움의 연장이기를 바라는 이가 있다면, 다음 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도.

 

4.

요즘 집 안이 엉망이다. 서류 정리를 한다고 모든 집안의 서류를 꺼내놓은 것이다. 곤도 마리에는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에서 "서류 정리의 기본은 전부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옷이나 책처럼 모조리 꺼내 한곳에 모은 뒤 '전부 버린다'는 전제 하에 꼭 남겨야 할 서류만 골라낸다. 서류는 부피가 작아서 자칫 쌓이 쉬우므로 전부 버린다는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좀처럼 양을 줄일 수 없다." 옳은 말이다. (e-book으로 읽었기에 인용문 쪽수를 표기할 수가 없네.)

 

나는 정리전문가의 조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지만, 어쩔 수 없이 창의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 서류 정리나 책 정리가 대표적 예다. 작가와 강사로 살아가는 나는 공부를 위한 책과 강연을 위한 유인물이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보다 많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나 독서광들 또는 학자가 쓴 정리정돈에 대한 책이 있으면 참 좋겠다.' 

 

피식, 웃음이 났다. 손수 노력해 볼 생각은 않고, 어딘가에서 비법을 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일이면 서류 정돈이 끝날 예정이다. 다음은 신발장 정돈이다.)

 

5.

작업실 수위 아저씨는 모두 세 분이다. 그 중 한 분은 사람들을 잘 기억하신다. 내가 인사를 잘 하긴 하나, 나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기억하시는 것 같다. 택배가 왔을 때엔 내 얼굴을 보며 "택배 왔어요" 하고 알려 주신다. 오늘은 사과 한 박스가 택배로 왔다. 지퍼 팩에 사과 다섯 개를 넣어서 아저씨께 갖다 드렸더니 웃으시며 "잘 먹을께요" 라고 화답하신다.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에게 선물하는가. 첫째, 보상이 돌아올 사람에게 선물한다. 이것은 실용적인 선물이다. 선물의 진정한 의미에서는 아쉬운 선물이다. 둘째, 자기를 기억해 주는 이에게 선물한다. 이것은 관계적인 선물이다. '기억해 주어 고맙다, 나도 기억되길 바란다'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셋째, 대가나 기억되기를 바라지 않는 선물이다.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는 이타적인 선물로, 이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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