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즐거운 지식경영

3천 권 장서를 향한 첫걸음

카잔 2016. 8. 6. 17:48


1.
저자는 오카자키 다케시, 1957년생이다. 삼촌 나이라 생각하니 친근감이 생긴다. 주름살이 어느 정도일지, (사람마다 천양지차일) 흰머리의 비율도 상상해 본다. 일본 저자의 책을 읽기는 오랜만인데, 오랜만에 만난 낯설음이 ‘삼촌 상상’으로 친근함으로 바뀐다. 저자와 삼촌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는 독서와 더불어 살고, 삼촌은 책과는 거리가 먼 분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젊은 날엔 국어교사로, 30대 중반 이후로는 집필에 매진하며 서평가로 활동해 왔다.


2.
추천의 글부터 읽었다. 누군가가 내게 ‘독서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장정일이다. (이어서 이현우, 한기호, 고명섭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무려 7권까지 나왔고, 책 이야기를 담은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도 3권까지 출간됐다. 장정일의 광팬이라 자처하는 출판 편집자 김영훈 씨는 『장정일의 독서일기』의 문장을 뽑아 『이스트를 넣은 빵』이라는 책으로 냈다. 추천의 글은, 그 지독한 독서가 장정일 씨가 썼다.


추천의 글이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이 책이 장정일 선생에게 영감을 안긴 독서는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난하고 덤덤하게 책을 소개한 느낌이다. 한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전자책의 시대가 오면, 장서가와 독서가가 구분되리라는 말이었다. 내가 어떤 독서가인지 돌아보게 한 그의 설명을 보자.


“책이 물질인 한,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거기에 어떤 가치나 감정을 부여하거나 읽고 난 책을 곁에 쌓아두기만 해도 자연히 장서가가 되는 구조가 성립한다. (중략) 책이 물질성을 읽고 난 전자서적 천지에서는 독서가와 장서가가 분명히 나뉠 것이다. 전자책을 읽은 독자가 그 단계에서 정보를 얻거나 이용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독서가가 되고,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책’이라는 물질을 추구하면, 그때에야 비로소 장서가가 탄생하는 이원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장서가다. “장서가가 장서가인 이유는 장서가가 책을 읽는 독서가와 사뭇 다르게 존재하기 때문”(장정일)이다. 독서가도 물론 책의 내용을 중요시한다. 책에 고명한 정신이 담겼기를 바란다. 장서가는 거기에 한걸음 더 나아간다. 같은 내용, 같은 번역일지라도 표지나 장정이 바뀌거나, 편집과 디자인이 달라지면 그 책을 다시 구매하고 싶어한다.(나는 실제 구매하는 경우도 있고, 절제하는 경우도 있다.)


3.
책은 14장으로 구성되었다. 전반부는 집이 책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질 위기에 처한 사례가 등장한다. 목조를 기본재로 하는 일본 주택의 특성이라 다행이라 생각하게 읽었다. 책장에 대한 이야기, 장서가의 서재 편력 이야기 등이 흥미로웠다.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독서가와 장서가들의 사례가 소개된 점이 이 책의 미덕이었다. 남의 집은 흘낏 구경만 해도 힌트를 얻기 마련이니까.


4.
장서가 1~2백 l권 정도이거나 책을 소장하지 않은 독서가에게 이 책은 타문화를 읽는 교양서이리라. 장서가 1만원을 넘는 내게 이 책은 실제적인 실용서로 읽혔다. 14개의 장이 끝날 때마다 저자가 제안한 교훈 중 몇 가지는 일본의 문화에서만 적용되는 지침도 있지만, 2번, 4번, 10번, 14번은 정말 유용했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보여주기도 하는 14가지의 교훈은 아래와 같다.


1) 책은 생각보다 무겁다. 2층에 너무 많이 쌓아두면 바닥을 뚫고 나가는 수가 있으니 주의하시길.
2) 그 순간 자신에게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일단 손에서 놓을 것.
3) 헌책방에 출장 매입을 부탁할 때에는 어떤 책이 얼마나 있는지 명확히 전달해야 한다.
4) 책장은 타락시킨다. 필요한 책은 곧바로 손에 닿는 곳에 있는 게 이상적.
5) 책은 상자 속에 넣어두면 죽는다. 책등은 늘 눈에 보이도록.
6) 책장은 지진에 약하다. 지진이 나면 책이 흉기가 될 수 있다.
7) 장서는 불에 잘 탄다. 자나 깨나 불조심!
8) 책은 집에 부담을 준다. 집을 지을 때는 장서의 무게를 계산해 두자.
9) 트렁크 룸을 빌렸다고 안심해선 안 된다. 조만간 꽉 차버린다는 것을 유념하자.
10) 진정한 독서가는 서너 번 다시 읽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다.
11) 생활력과 수집력을 갖추려면 규칙적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래야 가족도 이해해준다.
12) 종이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전자책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서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어렵다.
13) 수수한 순문학 작품을 팔아버리더라도 도서관에 가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폐가 서고를 확인할 것.
14) 장서를 한꺼번에 처분하고 싶다면 ‘1인 자택 헌책시장’을 추천! 잘 팔기 위한 핵심은 책값 매기기에 있다.



오른쪽에서 세번째 인물이 오카자키 씨 (출처는 오마이뉴스 윤성근 님 기사 "헌책방의 여자 누드사진")



5.
장서의 괴로움은 꽤나 크다. 보관하는 어려움도 크지만, 장서를 팔 때의 심정은 찢어진다(고 저자는 표현했다). 책과의 이별이 고통스러운데도 장서 관리를 위한 책을 내다파는 일은 중요한데, 저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2장 장서는 건전하고 현명하게’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래도 역시 책은 팔아야 한다. 공간이나 돈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꼭 필요한 책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해 원활한 신진대사를 꾀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지혜롭게 만든다. 건전하고 현명한 장서술이 필요한 이유다. 초판본이나 미술서처럼 수집할 가치가 있는 책들만 모아 장서를 단순화하는 방법도 있지만, 대부분 책이 너무 많이 쌓이면 그만큼 지적 생산의 유통이 정체된다. 사람 몸으로 치면 혈액순환이 나빠진다. 피가 막힘없이 흐르도록 하려면 현재 자신에게 있어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일단 손에서 놓는 편이 낫다."(p.31)


6.
4장에는 평론가 구사모리 신이치 선생의 사례가 나온다. 결국 어리석은 장서가로 묘사되는 셈인데, 저자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책 전체에서 가장 뜨끔했던 대목이다.


“책을 필요 이상으로 끊임없이 쌓아두는 사람은, 개인차가 있긴 하겠으나 멀쩡한 인생을 내팽개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생활공간 대부분을 거의 책이 점령하는 주거란, 일반 상식에서 보면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멀쩡한 정신은 아니다.  그저 한도 끝도 없이 갖고 싶은 책이 눈앞에 아른거려 책을 계속 살 수밖에 없는 비틀어진 욕망뿐이다. 게다가 그에 대한 반성마저 별반 없다.” (p.65)
 
이것이 『책장의 정석』을 쓴 나루케 마코토 씨의 조언이라면, 나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장서가가 아니다. 그래서 장서가를 공감하지 못한다. 『책장의 정석』 역시 장서가의 책장 정리에는 큰 도움이 못 된다. 『책장의 정석』도 300~500권의 장서가를 향한 조언으로 쓰인 책이다. 하지만 오카자카 다케시 씨는 사정이 다르다. 마코토 씨가 저편이라면 다케시 씨는 우리 편이다. 『장서의 괴로움』에서 공감되는 문장이 많이 만난 것도 그와 내가 책에 관해서는 비슷한 유의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저 구절은 본인께 던지는 충언이기도 할 것이다. 나도 반성하면서 동의한다.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만 제외하고. (나는 책을 쌓고 무너뜨리는 현장에서 무언가를 많이 줍는다. 지난날들의 추억, 새로운 집필에 대한 착상, 읽을 책들의 목록 등을.)


7.
이 책을 읽은 순서는 이렇다. 먼저 추천의 글(장정일 씀)을 읽었다. 그리고 차례를 읽었다. 다음으로 펼친 곳은 10장이다. 이어서 14장을 읽었다. 차례에서 가장 관심이 갔던 두 개의 장을 먼저 읽은 것이다. 두 개의 장은 내게 아주 유익했다. (직관의 놀라운 힘을 종종 이렇게 경험한다.)


‘10장. 적당한 장서량은 5백 권’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5백 권이 장서의 적정한 수준이라는 말인데, 과학적 제안일 수는 없다. 저자의 말마따나, 장서의 규모는 “사람에 따라, 주거환경에 따라 다르다.” 이번 장에서도 공감가는 대목은 부지기수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 “책이 너무 많이 늘어나 따로 방을 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경우 집세나 임대료가 추가로 들기 마련이다. 책이 별로 없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출이다.”(p.146)


5백 권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한 배경은 일본의 걸출한 영문학자 ‘요시다 겐이치’다. “평론, 소설, 수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이를 이룬 요시다 선생에 대해, 문학연구가 시노다 씨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요시다 씨는 ‘책장에 책이 5백 권쯤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시노다 씨의 부연 설명이 가슴을 친다. 지성인에게 ‘5백 권 장서의 실현’이 지니는 가치를 보여주는 말이다.


“책 5백 권이란 칠칠치 못하다거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어지간한 금욕과 단념이 없으면 실현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를 실행하려면 보통 정신력으로는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읽으면 독서가라고 말하지만,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다.” (p.150)


8.
‘14장. 장서를 처분하는 최후 수단’은 ‘1인 헌책시장’을 열어 단번에 책을 처분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간단한 제안으로 끝내면 짧은 분량이겠지만, 여기에는 저자의 헌책 시장 이야기와 저자가 영감을 얻은 또 다른 이의 헌책 시장 이야기로 채워져 꽤나 많은 분량이다. 1인 헌책 시장은 나도 생각해 오던 바라 반갑고 재밌게 읽었다. 1천 권 정도 솎아내어 시장을 연다면, 장서로 인한 복잡한 공간과 나의 마음이 조금은 정돈될 것 같다.


9.
너무 멀지 않은 날에 두 가지를 실천하고 싶다. 1인 헌책 시장과 장서 정리정돈(줄이기)! 쓰고 나니 결국 하나의 목적을 향한 일이다. 장서 500권을 실현할 자신은 없다. 저자도 이렇게 썼다. “어떤 사정이 생겨 2만 권을 5백 권으로 줄여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과연 소장할 책을 선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없다.”(p.151) "한다면 일단 제로 상태로 돌아가서 갖고 싶은 책 5백 권을 새로 수집하는 수밖에 없다. 분명히 말해 책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나의 작업환경에서 5백 권은 매우 곤란한 수치다."(p.152)


곤란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책은 학력이 낮고, 혈연과 지연도 미약한 나의 인생을 도약시켜 준 사다리였다. 고층 사다리는 아니었지만, ‘언젠가 거기’에서 ‘지금 여기’로의 전환을 이뤄주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영원한 사다리도 없고, 영원한 구렁텅이도 없으리라. 어떤 점에서 장서는 내 인생의 구렁텅이가 될 때가 있다. 이사할 때가 그렇고, 책들이 차지하는 공간 비용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백 권은 도무지 자신이 없다. 1천권 정도는 시도해 보고 싶다. 3천 권 정도는 그나마 현실적이면서도 매우 도전적인 목표인 것 같다.


10.
3천 권 장서가! 나도 모르게 한 숨을 내뱉었는데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결의를 다졌다. 오묘한 목표다. 장서 관리에 관한 책을 읽으니, 장서 관리의 의욕이 생겨난다. 장서의 규모를 줄이고 싶은데, 다시 책의 힘을 빌어야 하다니! 아이러니다. 그래도 장서술에 관한 책들을 사지는 말아야지! 아닌가, 새로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얼마간의 투자를 해야 하는 걸까?


새로운 투자를 하든, 현재의 자산을 활용하든,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장서가가 되기를 꿈꾼다. 숫자보다는 책의 질이 중요함과 숫자도 현실적인 문제임을 고려하면서, 나는 성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