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거절을 위한 10가지 지식

카잔 2016. 9. 1. 17:59
훌륭한 강연을 듣고 왔다. 내용이 충실했고 강사는 지혜로웠다. 강의 진행 방식과 부드러운 태도도 인상 깊었다. 강연이 진행되는 내내, 청중과 호흡했고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할까』의 저자,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의 강연은 왕복 2시간의 이동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책을 출간한 지 얼마되지 않은 저자의 강연은 종종 실패로 이어진다. 강연이라는 독립적인 학습의 장(場)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처사에 화가 날 때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보세요"라는 말을 남발하거나(이러면 강연회의 의미가 사라진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면(발걸음한 시간이 아까워진다), 홀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김호 대표는 강연을 책의 내용에 유기적으로 연결시킨 동시에 강연 자체를 독립적인 학습의 장으로 만들었다. 강연은 입장 시에 배부된 10장의 카드로 진행되었다. 카드는 유인물이었고, 강연의 핵심 내용이었다. 추후에는 학습자료가 되었다. (카드는 청중을 위한 훌륭한 배려였고, 효과적인 홍보물이었다 - 카드의 뒷면에는 책의 이미지가 인쇄되어 있기에.)


10장의 카드는 거절에 관한 10가지의 실용적인 지식이었다. 유익한 내용이라 글로 정리했다. 다섯 가지는 번호를 매겨가며 순서대로 정리하고, 후반부 다섯 가지는 글 속에 버무렸다. 때로는 강사가 제시한 언어로, 때론 나의 언어로 썼다. 김호 대표님의 지혜와 나의 견해가 뒤섞인 글이지만, 대표님께 기댄 바가 크다.


1) 거절을 잘하려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 "나는 어른인가?" 신체적 경제적으로 어른인 이들도, 심리적으로는 어른이 아닐 수 있다. 자기 의견과 느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솔직하게 전달할 줄 아는 이들이 (심리적) 어른이다.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얻은 가장 가슴 아픈 교훈은 내가 어른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젠 어른으로 살아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거절에 관한 책을 집필한 강사의 말이다.


2) 라이프 스타일로서의 민주주의(Democracy as a Lifestyle)를 추구하라! "의견이 다르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문화가 '라이프 스타일으로서의 민주주의'입니다." 강사의 말을 듣고 나니,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로 나아갈수록 개인들이 주체로 존재하기가 수월해진다. 개인들이 다양성의 중요성을 인식할수록 거절의 힘이 키워질 거란 생각도 했다.



3) "거절은 결국 '선택의 힘'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숙고하고 선택한 대로 진솔하게 발언하는 것이 거절이다. 강사는 '사회적 증거의 저주'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옆 사람이 알아봐 주는 선택안(사회적 증거)만을 추구하며 산다면,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터닝포인트는 대개 수입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 시간의 확대를 선택한 경우더라는 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적 증거와는 반대의 선택을 한 사람들은 점점 더 삶의 질을 높여갔으리라.


4) 강사는 거절을 돕는 세 가지 개념을 소개했다. <미움 받을 용기>의 "과제의 분리"! 왜 거절을 못할까? 거절을 당한 당사자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다. "과제의 분리"란, 합당한 거절을 했다면 나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하는지는 그 사람에게 달린 과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현명함을 추구하면 그만이다. 스탠리 밀그램의 "대리자적 자세"! 권위자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대리자적 자세로는 선택의 주도권과 사유의 기회를 잃게 된다. 마틴 셀리그먼의 '학습된 무기력'! 거절을 못 하는 상태가 지속되면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고 극복할 의지마저 잃게 된다. 심지어는 "(다른 여지가 분존재할 때조차) 어쩔 수가 없었다"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5) "평생 거절의 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버트 드 니로는 2015년 뉴욕대 졸업식에서 남긴 말이다. 그의 말처럼, 세상 어디에나 거절이 존재하고, 우린 언제나 거절을 당할 수 있다. 강사는 말했다. "거절을 삶의 디폴트 중 하나로 여기세요." 거절을 당했다면, 우리가 무언가 행동하고 도전했다는 의미다.   


강연 분위기는 더욱 진지해졌다. 나부터 몰입했기에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못했다. 강연을 들으면서 질문도 생겼다. 거절의 달인이라고 해서 배려할 줄 모르거나 공동체성에 무책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거절을 잘 하는 사람이 공동체에 한껏 헌신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거절을 어떻게 배려나 경청과 조화시켜야 하는지 궁금했다. 나의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이 후반부의 강연은 흡족한 답변이 됐다.


자신을 살리고 상대를 배려한, 훌륭한 거절은 지혜와 용기의 산물이다. 거절이 항상 지혜로 탄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배려와 섬김을 모르는 이기주의도 거절을 낳으니까. 책과 강연에서 강사가 다루는 거절은 이기적인 거절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한 거절이다. 개인주의적 거절이라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강사는 개인주의가 공동체성과 공존할 수 있음을 그래프로 보여주었다.


한국은 개인주의 지수는 18점으로 가장 낮다. 집단주의가 강하다는 뜻이다. 일본의 개인주의 지수는 46점, 독일은 67점, 미국은 91점이다. 이제 커뮤니티 지수를 보자. 커뮤니티 지수란, 어려울 때 마음 편하게 연락하는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YES"라고 대답한 비율이란다. 개인주의와 커뮤니티 지수는 비례했다. 개인주의가 가장 높은 독일과 미국이 커뮤니티 지수도 높았다. 이기주의는 공동체를 헤치지만,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살린다.


좋은 거절은 이기주의가 아닌 개인주의에 기반한다. 개인주의적 거절은 자기 주장에 능할 뿐(Assertiveness) 공격적이지(Aggressiveness) 않다. 자기 의견의 주장(개진)과 상대방 마음 이해(연대)를 동시에 추구하는 이상적인 거절이 개인주의적 거절이다.


마지막 카드에 적힌 키워드는 '취약성(Vulnerability)'이다. 연약한 정신은 자신의 취약성을 직면하지 못한다. 강인한 정신만이 자신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피드백을 요청하고, 개선해 나간다. 거절을 하지 못하며 살아왔다면, 우선 그러한 삶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강사는 강조했다. "(거절 못하는 삶을) 내가 살아가는 나만의 방식이야, 라고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문제 해결도 없습니다."



강연은 끝났고, 사람들의 표정은 흡족해 보였다. 신선한 공기가 주는 상쾌함처럼, 강연은 가슴과 머리를 기분 좋게 했다. 한 대목만 의아했다. 강사는 도입부에서, 인분 교수 사건처럼 권위자의 불합리한 명령에 복종하는 여러 사례를 소개한 후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실험(대리자적 자세)도 잠깐 언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음의 말로 도입부를 정리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강사의 말처럼 회사에서나 가정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타인의 명령이나 의견에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사례들은 강사의 사례와는 '정도의 차이'가 너무 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거절을 잘 하는 축에 속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입부는 '극단적 사례'라는 생각과 '경각심으로 이끄는 괜찮은 사례'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고개를 갸우뚱했던 도입부를 제외하면, 강연의 내용과 강사의 교수법에 모두 만족했다. 나는 마음이 없는 자리에 끌려가서 '이것도 나름 의미 있지' 라며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거절은 나의 화두나 관심사가 아닌데도, 후기까지 적은 이유는 (내용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김호 대표님이 빚어낸 90분짜리 강연 예술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예술의 본질은 '무슨 내용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렸다. 청중에게 배포된 카드는 교육 효과를 높였고, 강연 내용은 이론과 사례가 조화를 이루며 청중들에게 전달되었다. 오늘의 청중을 고려하여 정돈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사는 차분했지만 강했고, 강연은 조용히 진행됐음에도 울림이 컸다. 이런 강연이라면 매주 찾아다니고 싶다. (연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