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분노가 치미는 CF : 뉴 그랜저

카잔 2009. 3. 8. 12:00


한 편의 CF가 마음을 힘들게 했다. 그 CF에는 많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련된 이미지의 차 한 대와 절묘하게 오버랩되는 대사가 CF의 전부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져로 대답했습니다."
그랜저가 부드럽게 주행하고 "당신의 오늘을 말해 줍니다"라는 자막이 뜬다.


CF를 처음 본 감정은 분노였다.
하루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다소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안타까움, 위기감, 두려움 등.
생각을 정리할 것도 없다. 그냥 몇 가지 생각을 쏟아내련다.
길어질 것이다. 최소한의 오해는 걷어내야 하기에.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결코...
나이 서른이 넘도록 몰고 다니는 차가 없어서,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런 오해를 일축하기 위해서 차 한 대 굴리며 이런 얘길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나의 분노는 폼 나는 세상에서 나만 초라한 것 같다며 처량함을 느끼는 것도 결코 아니다.
불공평한 세상을 향한 한탄이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처량한 감정이 아니란 말이다.
말하자면,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에서 표현된 말 따위에는 전혀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는 게다.

"차가 없는 남자애는 피곤했다. 우선 폼이 안 났다.
대학교 3학년이나 된 이 나이에 아직도 강남역 뉴욕제과 앞,
압구정동 맥도널드 앞 같은 곳을 약속 장소로 정한다는 건 쪽팔리는 일이었다.
게다가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갈 때는 또 어떤가?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여자애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연애,
동네 사람들 눈을 피해 놀이터 벤치에서 몰래 뽀뽀하는 연애는 고딩 때나 하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의대생이라 해도 차가 없다는 건 심각한 감점 포인트에 해당했다."

오늘도 사당역 5번 출구 앞, 먹자골목 입구에서 저녁 약속을 했지만...
대학교 3학년보다 10살이나 많고, 자동차 안에서 뽀뽀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의대생도 아닌 것이 차도 없지만... 나는 분노하지는 않았다.
CF는 그런 한 개인의 처량함과는 차원이 다른 심오한 것이 깃들어 있다.

나는 공개적으로 이 CF를 싫어한다고 밝힌다.
이런 CF는 절대로 어필되지 않는 세상이길 바란다.
모두가 'CF 뭐 이래?' 라고 의아해하거나 기분나빠하기를 기대한다.
(나 같은 소시민 한 명이 이런 입장을 밝힌다고 뭔가 바뀔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꽤 비장하다 보니 이런 표현이 튀어나왔다. 이해해 주시라... ^^)

이제, 내가 이 CF를 싫어하는 까닭, 혹은 CF가 담고 있는 은밀한 문제를 정리해 본다.
개인의 문제인 것 같지만 시대의 지배 담론이 담겨져 있고
그래서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문제다.
허나, 개인도 알고는 있어야 자신이 정말 꿈꾸는 삶을 향한 노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다.


1. CF는 소유 가치를 존재 가치와 연결시킨다.

값비싼 물건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냐, 라는 질문은 그 사람이 가진 소유물의 가치를 나타낸다.
어떤 사람들은 귀중한 물건을 소유하게 되면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믿는다.
전적으로 헛된 시도는 아니지만, 옳은 말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의 소유 가치는 높아지지만, 존재 가치는 소유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광고 선전대로 갖추어 입으면 존재 가치가 높아지리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소유 가치와 존재 가치는 별개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CF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묻는다. (정신적) 안녕을 비롯한 안부를 묻는 것이다.
대답이 가관이다. 그랜저도 대답했으니. 물질적 풍요로 대답했지만, 동문서답이다.
광고를 만든 이도 동문서답 속에 절묘한 메시지를 담았다고 생각했으리라.
문제는 담아낸 메시지가 절묘하지 않고 절망스럽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소유의 품격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품격을 높여 가는 것이다.
좋은 것들을 소유해 갈 때 품격이 더해지리라는 착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수록
CF는 적중하고, 그랜저 판매 대수는 늘어갈 것이다.


2. CF는 우리를 지출연쇄작용으로 인도하여 스스로 삶의 질을 포기하게 만든다.

소유 가치와 존재 가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구분해내지 못하는 사회는 개인을 소비의 세계로 내몬다.
작은 집에 살고, 소형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을 하층 시민으로 보는 사회에서 사는 대부분의 개인들은
(신념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보다 큰 집, 보다 멋진 차를 가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줄 상품을 구매하거나 구매하기를 희망한다.

두 개의 가치를 구분하는 능력이 상실될수록 소비 세계로 내몰리는 속도와 힘도 강화된다.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품위 유지를 위해 갖추어야 될 필수품이 늘어나는 것처럼.
신혼 부부는 무리한 지출을 하더라도 신혼 필수품을 모두 갖추려고 할 것이다.

나는 소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가치와 동일시되어가는 현상을 경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유 가치에 한 눈을 판 사이에 삶의 질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득은 늘어나는 수준보다 구입해야 할 ‘기본 필수품’의 목록이 더 빨리 늘어나는 사람들은 
결국 더 많이 일하는 것을 선택한다. 
미국의 경우, 여성은 1970년대 중반보다 매년 평균 200시간, 남성은 100시간을 더 일한다고 한다.
도시에는 최신 가전제품이나 멋진 가구값을 매달 갚아야 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사람들의 머릿 속에는 여유 있게 사는 것보다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듯하다.

통근시간이 늘어나고 더 많이 일하게 됨으로 수면 시간이 줄어들고 여가 생활이 위협받는다.
매달 갚아야 하는 할부금을 가진 사람들은 경제적 자유가 주는 정신적 자유를 모르고 산다.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잡고 있다면 자신만의 삶의 철학이 깃들 자리는 없다.
결국, 소유 가치를 높이는 사이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포기하게 되는 것은 삶의 질이다. 

나는 부자에서 시작된 소비 패턴이 부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이어지는 것을 막자는 것이다.
삶의 질을 포기하게 만드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니까. 행복한 척이 아니라 진짜 행복 말이다.

"부자들 사이에서 고급 외제차를 구매하는 것이 일상화된다면
국산 대형차를 몰던 부자에 가까운 이들도 조금 무리해서라도 고급 외제차를 구매하게 된다.
필요하거나 갖고 싶어하는 것을 규정하는 인식의 참조틀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출이 늘어나면 이번에는 바로 그 아래의 사람들의 참조틀이 달라지고,
그렇게 소득 사다리의 가장 낮은 단계까지 지출연쇄가 일어나는 것이다.

공연장이나 운동경기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으로, 모든 사람들이 경기를 잘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다리만 아플 뿐이다. 그렇다고 다시 자리에 앉을 수도 없다. 모두가 서 있는데 경기가 보일 리가 없다. 힘들어도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 교보문고 북모닝CEO 편집팀의 『부자아빠의 몰락』서평 중에서

3. 나는 중산층 이상의 분들에게 다시 '노블리제 오블리스'를 생각하시길 권한다.

2009년에도,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극심한 경제 불황이 이어질 것이라고 한다.
연일 보도되는 뉴스를 조금만 훑어보아도 경제 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세계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2%에서 0.5%로 대폭 하향 조정해 발표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28일 공개한 '세계고용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에서 올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 일자리의 수는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의 경우 1천800만개,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의 경우 5천100만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불황에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실업급여 신청도 크게 늘고 있다. 지난달 실업급여 지급액만도 1년 전에 비해 600억 원 가까이 증가하는 등 절박한 실업자들의 발길이 신청 창구로 몰리고 있다."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들이 정리해고 불안에 임금 삭감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생산량 감소로 잔업 특근이 없어지면서 실질 임금이 대폭 줄어든 것. 여기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생산하던 에쿠스 차종이 단종됨에 따라 115명이 정리해고된 것을 비롯해 경제위기 이후 모두 350여 명의 비정규직이 정리해고됐다. 뿐만 아니라 현재 524명은 정리해고 당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

경제성장률 0.5%라는 수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저 수준이다.
60여 년 만에 가장 낮은 수치이므로 젊은 세대로서는 처음으로 겪는 경제 위기가 현재의 상황이다.
물론, 의사 말을 들으면 먹을 음식이 없고, 경제학자 말을 들으면 심각하지 않을 때가 없지만...
이번의 위기는 예전과는 다른 진정성이 엿보인다.
우리 집앞 테헤란로 이면 도로의 술집은 주말이면 손님들로 휘청대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눈에 띄게 손님이 줄었들었다. 이제 가게 주인들의 주머니가 휘청댈 것만 같다.

CF에는 이러한 상황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세상의 부는 점점 양극화되는데, 이것은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변해간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 많이 가진 분들이 그랜저를 구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덜 가진 분들이 그랜저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을 막고,
많이 가진 분들이 그랜저와 함께 노블리제 오블리스까지 가져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훌륭한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가도록, 실현하도록 돕는 자유를 허용한다.
또한 가족간의 애정 관계를 더욱 깊어지게 만드는 책임을 공유한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사회는 개인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희망을 쫓아 열심히 살게 하는 사회다.
만약 꿈을 박탈하고 절망을 안겨다 주는 구조를 가진 사회라면 개인들의 복수에 무너지게 된다.

나는 이 CF를 보고 수많은 '덜 가진 사람들'이 그랜저를 향한 '꿈'을 꾸기를 바랬다.
많은 '가진 사람들'이 그랜저와 함께 약자를 위한 배려와 나눔의 정신을 가지기를 바랬다.
그렇다면, 나의 오늘 글은 기우에 불과할 것이고 우리 사회는 건강한 사회이리라.
만약, 건강하지 않은 사회로 흘러가고 있다면 나는 가진 자들에게 현명한 선택을 부탁하고 싶다.

약자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쇠퇴하고 만다.
그 쇠퇴는 약자들만의 쇠퇴가 아니다. 모두의 몰락이다. 
사회를 이끄는 세력은 '가진 분'들일지 몰라도
사회를 이루는 기반은 소수의 '가진 분'들이 아니라 다수의 '못 가진'분들이기 때문이다.

*

끝으로, 오늘의 글이 소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최근 구입한 겉옷 하나로 인해 "오, 외국물 먹더니 많이 세련되어졌네'라는 말을 들은 나로서는 
오히려 하나의 괜찮은 소비를 찬양하는 편이다. (나에게 꽤 비싼 값이었다.)
없이 살다 보니, 이렇게 오해받을까 봐 거듭 밝히게 된다. 아이고. ^^
(사실, 내 글을 쭈욱 읽어오신 분들에게는 걱정도 안 한다.
보보가 삶의 질을 선택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란 걸 알고 계실테니.)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전문위원 (시간/지식경영 컨설턴트) hslee@eklc.co.kr

'™ My Story > 끼적끼적 일상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연 후에 찾아오는 감정들  (24) 2009.03.17
행복이 깃든 일상적인 하루  (8) 2009.03.15
베이징에서의 드라마가 이어지기를...  (2) 2009.03.07
한 남자  (0) 2009.03.05
모순  (4) 2009.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