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부끄러운 속내

카잔 2009. 6. 8. 23:35

집을 나섰다. 점심 약속 시간이 15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각이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이니 기다림 없이 탈 수 있으면 정시 도착 가능~ ^^
그러나 만약 4~5분을 기다려야 한다면 지각할 것 같다.
점심식사 약속이기에 조금 늦을 것 같으면 먼저 식당에 가시라고 양해를 구하면 될 테지만,
늦고 싶지 않은 욕심과 제 시간을 맞출 수도 있다는 비현실적인 인식이 앞섰다.

'멀지 않으니 달리자.'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으면서 달리기로 결정했다.
몸이 가볍다~ ^^ 제 시각에 도착할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몸이 빨리 움직여 주었다.
저만치 보이는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었다. 속력을 냈다.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경계석을 헛딛여 그만 발을 접질렀다.
아이고야. 다음 신호를 기다려야 했다. 걸을 수가 없으니. 발목이 아팠다.

헉. 예상 시나리오가 틀어져 버렸다. 아픈 걸 참고 걸어도 5분 이상은 늦을 터이고
절뚝거리며 가면 15분 이상은 늦을 것 같다. 이를 어쩌나?
늦는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싫은데... 이궁.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해결 방안은 사실을 과장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발목을 접질러서 오늘 갈 수가 없겠다고 말이다. 없는 사실이 아니니까 거짓말도 아니다.

허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거짓말은 아니지만 정직한 것도 아니다.
걷지 못할 정도의 상태도 아니고, 지각하는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 안 가기로 선택한 것이니까.
종종 거짓말을 하며 모임에 안 가곤 했던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거짓말의 메뉴로는 몸살, 집안 일 등이었지만, 진실은 그저 가기 싫어진 나의 변덕스런 마음이거나
무언가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준비하지 못하여 책임감 없다는 소리를 면하기 위해서였다.

생각해 보면, 나의 명분만을 생각한 못난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무슨 변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년 전부터 거짓말이 줄어들었다.
아마도, 나의 연약한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 내가 설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 후부터였으리라.
작년에는 '그냥 집에 있고 싶다'는 '솔직한' 이유를 전하며 이틀 전에 모임 불참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때로는 가감없이 '가기 싫어서'라는 이유를 전하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말했던 다른 경우는 '추워서' '집에 있고 싶어서'등의 이유가 많았다.
그랬더니 상대방에게 오해나 상처를 줄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서서히 정직함과 배려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거짓말도 하기 싫고, 있는 그대로 말하려니 불편을 줄 것 같은 경우에는 약속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이렇게 잘 살아왔는데, 오늘 갑자기 예전의 병이 도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발목이 아파서 어쩔 수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었다.
다행히도 세 명이서 만나는 것이니, 나 한 명 빠지는 것이 덜 미안하기도 했다.
허나, 아무래도 정직하지 못한 게 걸렸다.
진짜 이유가 따로 있으니 가짜 이유를 말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게다.

결국, 지각이라는 상황을 각오하고 천천히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결정했으니 어쨌든 늦게 될 상황을 알려야 했다. 휴대폰을 찾았는데, 으악. 집에다 두고 왔다.
연락할 길이 없다. 아무리 빨리 가도 십분은 늦을 텐데... 어쩌나?
또 다시 가지 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핸드폰을 두고 왔으니 전화도 못 받았다고 하면 될 테니까.
'아... 오늘 나 왜 이러지?' 너무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20대 초반에 세워 둔 나의 지배가치가 떠오른다.
"다른 이들로 하여금 나를 좋게 여기게 하는 것보다는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좋게 느끼도록 힘쓴다."
오늘은 자꾸만 이 가치와 반대로 행동하려는 나를 발견한다.
나를 좋게 여기게 하려는 마음 때문에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다.

핸드폰이 없지만, 지각을 할 테지만, 약속 장소로 향한다.
아마도 식당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리라.
15분 정도 지각한 채로 식당에 들어섰다. 저기에 두 분이 앉아 있었다.
"늦어서 죄송해요"라고 말씀 드렸다. 별 일 아닌 듯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렇게 편안한 일인데, 못난 나는 이렇게도 여러 갈등을 거쳐서야 이 자리에 서 있다.

오늘은 예전의 나로 돌아가 버린 날이다.
이것은 그간의 성장을 향한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날이 있다는 뜻이고, 우리는 일직선의 상승이 아니라,
점점 높아져가는 산등성이처럼 성장한다는 뜻이리라.
부끄러운 나의 속내를 드러낸 까닭은 아끼는 두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에게 위로 혹은 용기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한국리더십센터 이희석 컨설턴트 (자기경영전문가) hslee@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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