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이해하는 명상 (1)

오고 가는 이들에 대하여.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오고 가는' 것에 대하여 사색해야 한다.



1978년 2월 15일, 나는 지구별에 왔다.
삶은 여행이니, 나는 '지구별 여행자'인 셈이다.

유럽 여행을 여행을 하며, 호스텔에서 세계 각지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국적과 나라가 다르지만, 우리는 하루짜리 친구가 된다.
다음 날이면, 우리는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다. 

삶을 살면서도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학창시절에 만난 친구들, 직장에서 만난 친구들.
함께 하는 동안, 우리는 종종 싸우기도 하지만 대체로 즐겁게 어울렸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지평이 넓어졌다.
사는 집의 평수도 함께 넓어지면 좋으련만 친구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산다. 자신만의 고민을 지니고 산다.

삶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사는 곳도 흩어졌다. 세계로 떠난 친구도 있다.
그러면서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친해도 자주 못 보는 아쉬움.
영원히 이별하게 되는 이들도 생겨났다. 살아서는 다시 못 보는 그리움.

여행친구와 만나고 헤어지듯
우리는 삶의 친구들과도 만나고 헤어진다.
다른 것은 삶의 친구들은 조금 더 길게 만난다는 것.

이것을 '허무'라고 생각해서는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허무가 아닌 '고마움'라는 생각이 든다. 생(生)이 고맙고, 벗이 고맙다.
생은 내게 삶을 선사했고, 친구는 기쁨을 안겨다 주었으니.

아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언젠가 헤어짐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허나, 인생은 헤어짐이 두려워 만남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2010년 9월 2일. 아침에 문자 하나가 왔다.
"석.. 오늘 아침에 옥한흠 목사님께서 소천하셨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 중 하나를 잡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며칠 전, 이윤기 선생님의 소천 소식도 문자로 받았다.
그 때도 잠시 멍했다. 소천하시기 불과 며칠 전에 당신께서 번역하신 책을 읽었다.
당신께서 다녀오셨다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에 다녀온지도 불과 보름 전이었다.

올해 5월 8일, 소중한 친구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어버이날에 돌아가셨으니 매년 친구 어머니의 기일을 잊지 못하리라.
무엇보다 잊지 못할 일은 1992년 따뜻한 봄날에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기일이겠지.

내 생에 만남도 헤어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다.
많다고 해서 덤덤하게 만나고, 무심하게 헤어지는 것은 좋은 생이 아닐 것이다.
남 눈치 보지 않은 채 호들갑스럽게 만나고, 가슴의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는 생을 살자.

어차피 헤어질 것이라 생각하여 함께 하는 과정을 애정과 배려 없이 지내서도 안 된다.
그러면 삶이 메마르고 삭막해질 것이다.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영원한 것에 주려고 했던 그 모든 것을 지금 함께 하는 이들에게 주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존경스러운 동료를 만나고 헤어졌다.
나는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별의 슬픔을 겪어야 할까? 눈물이 난다. 두렵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감각은 부모를 일찍 여읜 자가 지닌 감성적인 능력이다.

어떤 이들이 하늘 나라고 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가 젊다면....나는 그이의 어머니가 겪게 될 (고통이라 할 만한) 슬픔을 상상할 수 있다.
곁에서 (딸을 먼저 보낸) 할머니의 아픔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열살이 넘은 아이를 남겨 놓고 떠났다면
나는 그의 자녀들이 겪게 될 슬픔과 외로움을 상상할 수 있다.
내가 그 슬픔과 외로움을 오롯이 경험하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헤어짐은 슬픈 일이지만, 떠나는 이는 우리에게 뭔가를 남긴 채 떠나간다.
어머니가 남겨 준 것은 사람을 향한 공감이고, 세상의 어두움에 직면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참 좋은 것이다. 어머니와 바꾸기에는 너무나도 허접한 것이긴 하지만.

생과 사를, 만남과 헤어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만남과 헤어짐 사이에 있는 함께함의 시간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서로 사랑하면 된다.
삶과 만남, 그리고 사람을 경외하면 된다. 경외심은 우리를 나은 삶으로 인도한다.

지구별 여행자, 라는 책이 있다.
읽지 않은 책인데 소중한 형이 읽어준 덕분에 한 구절을 안다.
오고 가는 이들의 존재 의미요, 우리가 감사하고 혼신을 다해 사랑하는 이유가 담긴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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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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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unice 2010.09.03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쁜 일이라 하여 모두 좋은 것 만은 아니고,
    나쁜 일이라 하여 모두 유익하지 않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제는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읽었습니다.
    읽고 싶어 손에 든 책인데, 태교에 비극이 괜찮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전 『고래』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이 스쳤었는데,
    그때는 그냥 지나쳤었지요.

    오늘은 한가지 정도는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제가 너무 빨리 가르치려 하는 것일까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최선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
    제가 가고 싶은 길이고, 제 아이가 갔으면 하는 길입니다.

    선생님이 겪으셨던 상실의 아픔, 슬픔과 외로움에 비할 것이 없지만
    제 삶의 가르침들을 기억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겠습니다.

    • 보보 2010.09.03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태교는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엄마가 무엇을 배워가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세상 전체가 학교이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좋은 수업이겠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접해야 하나, 라는 질문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겁니다.
      '무엇'이든 배움을 끌어낼 수 있고, 그걸 딛고 도약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이 안 되면 자꾸 삶의 다른 측면을 부정하게 되지요.
      현실주의자는 가능성과 긍정적인 면을, 이상주의자는 어둡고 현실적인 면을 말이죠.
      우리는 이성적 낙관주의자로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관념론자임을 나타내는 주장들이지요.
      보다 균형있게 사고하고 실천하시려면,
      '무엇'을 접하는가, 도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것을 간과하지 않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