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예비군 훈련장에서의 하루

카잔 2010. 11. 15. 21:09


특별한 외출인지라, 집을 나서기 전 기온을 확인했다. 이미 어젯밤 뉴스를 통해 오늘 날씨가 어떠한지는 들었다. 나는 기상청 예보가 틀렸기를 바랬다. 오늘 날씨는 내 소박한 바람을 외면한 영하 0.5도. 11월 첫째주부터 연속 3주째 주초마다 추위가 닥쳤다. 삼한사온이라는 다소 모호한 단어가 곧잘 맞아 떨어진다고 신기해 하던 터였지만, 오늘은 그 단어가 못마땅하다. 마음부터 추워지는 단어, 예비군훈련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물로 샤워한 후 흰색 반팔 셔츠, 전투복 상의, 오리털 파카, 야전 상의 순으로 껴입었다. 몸이 뚱뚱해졌다. 움직임이 불편했지만, 추위에 떠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입지 않을 것 같아 "할머니 뭐 이런 걸 사셨어요. 저 내의 잘 안 입어요" 하며 받아 들었던 얇은 회색 내의도 바지 안에 껴입었다. 약간의 간식과 헤진 가죽 장갑을 건빵 주머니에 넣고 출발했다.

훈련 입소 시각은 9시이고, 9시 30분까지 지연 입소자를 받는다. 그 이후에 도착한 이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외는 없다. 예비군 훈련은 오래 전 친구들에게 들었던 것보다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그건 아마도 내 친구들은 대학교를 다니면서 받아서일 것이고, 나는 친구들보다 5년 늦게 전역했으니 직장을 다니면서 받는 것도 하나의 원인이리라. 직장인으로서의 예비군 훈련은 학생들의 그것보다 긴 것으로 안다. 사실, 한 번도 비교하여 확인해 본 적은 없다. 알아본다고 하여, 나의 예비군 훈련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니까. 삶을 개선하지 않은 궁금증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내겐 필요악이다. 그런 궁금증을 해결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된다. 내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많은 기사들을 검색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저 궁금한 것들일 뿐이니까.

늘 그렇듯이 25분 늦게 훈련장에 도착했다. 훈련장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다. 물론 부대측이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다. 지연 입소자들은 다양하게 불이익을 당하지만, 나는 25분을 버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입소식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기다리는 동안 줄을 서야 한다. (퇴소식도 마찬가지다.) 내 순서가 되어 98번 표찰을 받아 가슴팍에 달았다. 왠일인지 주민등록증을 걷지 않았다.(알고 보니, 노트북이 모자라 수기 작업을 해서 그렇단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연말 2차 보충이라 입소자가 몰려서 그럴 게다. 이렇게 자질구레한 설명을 덧붙이는 까닭은 혹여나 실무자들이 핵폭탄을 맞지 않기를 바래서다. 군대에서는 별이 기침을 하면 병들에게는 폭탄이 떨어진다. 사실 학교도 마찬가지도,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다. 이번 G20을 통해서, 국가도 마찬가지란 생각을 했다. 이런 면에서는 고마운 G20 이다. 허허.)

방탄헬멧을 쓰고 탄띠를 차고 소총을 어깨에 메어 내 자리로 갔다. 이때부터 모든 예비군들은 다른 사람 혹은 동물이 된다. 어린아이가 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관에게 떼를 쓰기도 하고, 거북이가 되어 야전상의 안으로 목을 깊숙이 밀어넣거나 행동이 매우 느려진다. 노인이 되어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달관한 모습으로 교육을 관람한다. 청개구리가 되어 교관의 모든 말을 반대로 행동한다. 미인이 되어 매시간마다 잠에 허우적댄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예비군 대원들은 교관의 모든 부탁을 어기는 범법자가 된다.


매우 추운 날이라, 교관들은 예비군 대원들을 많이 배려해 주었다. 훈련 장소를 양지 바른 곳으로 옮겨 주기도 하고, 여러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여러분 추우시죠? 추운 건 여러분도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까진 상투적이다.) 여러분 피부는 가죽으로 되어 있고, 제 피부는 갑옷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오호 조금 새로운 표현이네.) 퀴즈 하나를 내겠습니다. 박찬호와 박세리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맞추시면 휴대폰 제출자 다음으로 일찍 보내 드리겠습니다.(와! 재밌네) 퀴즈에 귀가 쫑긋했고, 보상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답을 몰랐다. 한 사람이 손을 들었고, 교관을 그를 가리켰다. "공주 출신이요" 라는 소리가 들렸다. 정답이었다. 그들은 모두 공주 출신이란다. 허허. 재밌네. 다행이다. 잠시나마 시간이 빨리 흘렀다. 덕분에 1분 20초가 지났으니. 세상에서 가장 시간이 안 가는 장소가 어디냐는 퀴즈가 나온다면, 그리고 정답에서 예비군 훈련장이 빠진다면, 대한민국 모든 예비역들이 성토할 것이다. 최소한 한 사람은 난리칠 것이 분명하다.

예비역들은 훈련 때마다 나름의 시간 견디기 도구를 들고 온다. 대부분은 핸드폰과 MP3를 들고와 시간이 날 때마다 시간 견디기에 활용한다. 피곤한 몸을 끌고 와 틈날 때마다 조는 이들도 있다. 몇몇은 책을 들고 온다. 나도 그렇다. 오늘은 멜빵 주머니에 범우문고 001번을 들고 왔다. 금아 선생의 수필이다. 조정래 선생은 한국의 빼어난 수필가로 신영복 선생, 법정 스님, 피천득 선생 이렇게 셋을 꼽았다. 법정 스님의 글과 신영복 선생의 명성은 이미 여러 책으로 접해 보았지만 금아 선생의 수필은 처음인 듯 하다. 추운 손 비벼가며 쉬는 시간마다 수필 몇 편을 보고 나서, 나는 금새 조정래 선생의 선정에 깊이 공감하였고, 이 책을 읽게 된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금아 선생의 수필에는 생명력이 있고, 그것은 선생의 삶이 뿜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선생의 수필은 세월을 노래하고, 일상을 성찰했다. 젊음을 사랑하는데, 주책스럽지 않았다. 그가 노년도 사랑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봄>과 <오월>이 그랬다. 일상을 들여다 보는 눈은 깊고 지혜로웠다. <종달새>, <비원>, <서영이와 난영이>가 그랬다.

금아 선생의 수필 40페이지를 읽고, 맵고 맛없는 육개장을 한 그릇을 먹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추위를 밀쳐내느라 서성대고, 교육 시간에는 교관의 농담에 잠시 웃기도 하지만 웃지 않는 나머지 시간에는 망상을 하고, 여러 번 시계를 보고 나니 어느 덧 훈련이 한 시간(동계훈련 한 시간은 35분) 남았다. 교관이 말했다. "오늘은 추우니까, 조금 일찍 훈련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하루 고생하셨고 내일은 방한 대책 강구하여 따뜻하게 오세요." 나도 모르게 낮은 소리로 외쳤다. "와! 대박이다." 정말 기뻤다. 정확히 35분 일찍 마쳤는데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아마도 날이 너무 추워 대대 전체가 일찍 마쳤나 보다. 캬! 신바람 나는 걸음으로 연병장으로 이동했다. 퇴소식 절차는 입소한 순서대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표찰 번호가 가장 빠른 사람이 떠난 후, 98번인 내가 퇴소하기까지는 40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니, 이럴 수가! 25분을 벌었다고 여긴 나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된 날이다. 허탈하거나 속상하진 않았다. 일찍 떠난 이들에 비하면, 나의 퇴소 시각은 늦었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시각보다는 조금 일찍 퇴소하는 것이니까. 기쁜 일도 남들과 비교하면 불행해 질 수 있으니 남들과 내 행복을 비교하진 말자. 잔꾀를 부린 것이 좀 부끄럽군. (퇴소 시각을 따져 보니 5시였다. 왠지 일찍 마친 것이 아니라, 원래대로 마친 것 같다. 그래도 기쁘니 됐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게 기쁜 소식 하나, 슬픈 소식을 하나가 생겼다. 기쁜 소식은 일상의 소중함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 일인지는, 일어나서 전투복을 입고 무거운 전투화를 신고, 전투화보다 무거운 마음을 끌고 훈련장에 오면서 더욱 진하게 깨닫는다. 오늘 입소식 때에는 주민등록증을 수거하지 않았는데,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대신 보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걸리면 골치 아프다. 사실 결과가 무섭다.) 가정이긴 하지만, 누군가가 나 대신 훈련에 가 준다면 나는 최대(!) 20만원까지 지불할 용의가 있다. 그렇다면 내 평범한 일상의 하루는 20만원짜리다. 아, 소중한 내 하루! 늘 느끼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된 것은 분명 기쁜 소식이다. 하지만 여기 슬픈 소식도 있다. 나는 내일 또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오! 통재로다. 내일 뿐만 아니라, 수요일에도, 목요일에도 그리고 금요일에도 훈련을 받아야 하니까. 예비군 훈련 매니아냐고 약올리지 마시기를! 솔직히 조금 괴로우니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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