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전세계약을 한 날

카잔 2011. 1. 22. 20:18


1. 국수역과 선릉역은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3시간 밖에 되지 않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온 듯 한 공간차를 느꼈다. 두 공간은 조금 어지러울 정도로 많이도 달랐다. 어지러움은 머릿속에서 일어난 물리적인 골치 아픔이 아니라, 생활의 변화를 앞둔 마음속의 혼돈이었다. 논밭과 들판 사이로 난 중앙선로를 달리다가 서서히 정차하는 국수역은 한적한 시골이다. 토요일 오후임에도 국수역은 한산했다. 청계산을 올랐던 등산객들 열 댓 명이 전부였다. 나는 그들 속에 끼여 한 시간에 2대씩 오가는 왕십리행 열차를 기다렸다. 미끄러져 온 열차는 앉을 자리가 넉넉했다.

국수역은 용산에서 출발하여 양평을 지나 용문까지 내달리는 중앙선의 일개 역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국수리에 속하나, 마음의 거리상으로는 300km 밖에 있는 대구보다 먼 곳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오늘 나는 국수역에서 중앙선을 올라타서 구리시 - 상봉동 -회기동을 지나 왕십리역까지 왔다. 거기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서 선릉역까지 왔다. 지하를 달리던 2호선이 선릉역에서 나를 뱉어낼 때, 공간의 차이에서 온 그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햇살이 환히 나를 비출 때 탔는데, 테헤란로로 걸어 올라오니 세상을 뒤덮으려는 어둠과 어둠을 밝히려는 조명이 서로 겨루고 있었다. 

2. 전세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왔다. 그리고 4일 후면 내가 살게 될 집에 다녀왔다. 난생 처음 하는 전세계약이지만, 제대로 준비를 못했다. N 사건으로 인해 나흘 동안 제 정신이 아니었던 탓이다. 부동산 중개업자의 넉넉한 인상 덕분인지, 지난 방 가계약할 때 뵈었던 집주인의 믿음직스런 한 두 마디 때문인지 혹은 그저 남의 말을 잘 믿는 내 성정으로 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세계약을 하러 가면서도 마음이 편안했다. 한 번도 살지 않은 시골로 이사한다는 것이 내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책장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가늠하기 위해 벽 길이를 재어보기도 하고, 집 밖으로 나와 동네를 둘러보기도 했다. 사실 둘러볼 것도 없었다. 작은 가게라도 하나 있기를 바랐지만, 오늘은 찾지 못했다. 사전답사랄 것도 없었다. 줄자를 가져오지도 않아 잰 길이는 그야말로 대중없었고, 동네 풍광을 사진기에 담으려는 노력도 그다지 정성스럽지 못했다. N 사건의 영향 때문이리라. 한 가지 확실하게 파악해 둔 것은 집에서 국수역까지의 소요 시간이었다. 걸어서 30분! 딱 반시간이 걸렸다. 시간은 문제 되지 않으나 가는 길의 절반이 위험한 차도라는 것이 아쉽다. 

3. 나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나흘 후의 나는 전날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잠들 것이다. 이 많은 책 짐을 어떻게 옮겨야 하나, 를 생각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 엄두라는 놈 때문에 미뤄온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N 사건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자본주의에 찌든 인간이 모든 일을 돈에 연결시키듯이 나는 요즘 모든 순간마다 N 사건에서 허우적댄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엄두를 내는 일이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으니 이미 일을 저지른 셈이다. 내 안에서 스스로 엄두를 만들어 낸 것인지, 상황이 엄두를 끄집어낸 것인지 따지고 싶진 않으나, 후자인 듯 하여 찜찜하긴 하다.

3시 25분에 앞으로 '살 집'을 출발하여 6시 20분에 지금까지 '산 집'에 도착했다. 한참이 걸린 시간 때문인지 어딘가에 들렀다 온 기분이지만, 30분 동안 순두부백반을 먹은 시간을 제외하곤 내가 한 일은 '귀가'였다. 멀다. 오가며 읽었던 김영하의 『검은 꽃』 주인공들이 조선을 떠나 멕시코로 향하는 여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내 생활 반경에 비하면 멀고도 멀다. 선릉역 지하철 개찰구를 나오며 확인한 숫자는 800이었다. 여느 때의 추가요금이 0원이거나 100원이었으니, 800원의 추가요금이 보여주는 것 역시 '먼' 거리였다.

4. 이동하다 순두부백반을 먹은 것은 국수역에 도착했더니 방금 전에 열차가 떠났기 때문이다. 다음 열차가 도착하기까지는 27분이 남았으니 '밥이나' 먹었던 것이다. N 사건 이후로, 식사는 대충 때우는 것이 되었다. 삼일 동안 강연을 제외하고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그저 집에 있는 것들로 배를 채웠다. 다행히도 강연 후 귀가하던 날, 집 앞에 있던 쇼핑 백 하나로 영양의 균형을 잠깐이나마 맞출 수 있었다. 속 깊은 와우팀원이 과일을 사서 문 앞에 걸어 두었던 것이다. 과일과 시리얼, 그리고 주먹밥 등으로 연명(^^)하다 오랜만에 밥다운 순두부백반을 먹었다.

백반과 함께 나온 순두부는 내가 예상한 것이 아니었다. 얼큰한 국물의 찌개가 아니라, 강릉의 초당마을에서 먹어봤을 법한 희멀건 두부였다. 입맛이 정교하지 못한 내게는 당황할 일도 아니고, 담백한 맛이 괜찮았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괜찮은 맛이었다. 잠시 후, 일하는 할머니께서 휴대용 가스버너를 들고 내 테이블로 오시더니 버너 위에 순두부가 반쯤 남은 냄비를 올리신다. 식었다고 데워 주시려는데 전 괜찮으니 놓아두시라고 했다. 고마웠다. 예상하지 못했던 순두부가 담백했던 것처럼, 할머니의 인심이 따뜻했던 것처럼, 이사가 안겨다 줄 새로운 생활도 담백하고 따뜻했으면 좋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실현전문가 이희석 와우스토리연구소 대표 ceo@youni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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