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법

카잔 2011. 2. 6. 22:04
 

힘겨운 일을 겪고 나니, 일상에도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변화 전후의 일상을 비교하며 무엇이 더 나은지를 따져보는 일은 무의미합니다. 실제로 평온했던 일상에 파문이 일어났고,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불청객처럼 나를 찾아 온 고통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 노력은 두 가지로 이뤄집니다. 하나는 어서 일어나려는 회복의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체험의 노력입니다. 전자는 새로운 삶을 향한 나의 이상(Ideal)이고, 후자는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될 나의 현실(Reality)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는 또한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을 내려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최근 저는, 블로그에서 두 가지의 노력 중에 한 가지만 보여 주었습니다. 새 날을 펼쳐가려는 '회복의 노력'을 말이지요. 지질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아는 이들을 안심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상을 지내다 보면, 내가 아직 슬퍼하고 힘겨워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시간은 하루 한 두 시간이고, 나머지의 시간 동안 저는 나의 삶,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 나의 삶 속에서 저는 회복의 노력뿐만 아니라, 체험의 노력을 위해 애씁니다. 체험의 노력이란, 슬픔을 부정하거나 합리화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 하지 않고, 나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체험'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30분 울어야 할 울음을 20분 만에 그치지 않는 것이고, 매우 괴롭고 아프지만 고통의 실체를 음미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힘겨운 과정을 통해 깨닫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고통은 삶의 불청객이나 장애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일부다. (두 가지 노력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면) 고통 후에는 더욱 강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다. 고통을 피하면, 진정한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충분히 아파하고 슬퍼하는 체험은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만약 제가 슬퍼하고 있으면, 그것은 제가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을 훌륭히 치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슬픔을 외면하거나 다른 감정으로 대체해 버리면, 감성과 인간성이 메말라 버립니다. 초연해야 하는 것은 사사로운 감정이지, 충격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 자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슬퍼하는 것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슬퍼하는 행동을 옳지 못하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몰아가거나 은근히 슬픔을 즐겨서는 안 될 일이지만, 건강한 영혼으로 고통에 침잠하는 모습을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표현이 우습긴 하지만, 슬퍼하는 것은 고통에 매우 잘 대처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고통에 지혜롭게 대처하려는 저의 노력은 두 가지 모양입니다. 하나는, 슬프고 힘들지만 내게 일어난 일들과 그에 대한 나의 감정과 반응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용기와 지혜 그리고 끈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용기를 내어야 내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고, 끈기가 있어야 힘들다고 슬픔을 내쳐 버리거나 외면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상실이 인생의 일부라는 지혜를 받아들여야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지?'하는 불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다행하게도 저는 '왜 나에게만?' 이라는 짜증 섞인 질문이 들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의 상실 체험으로 인생의 일부라는 걸 배웠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지혜롭게 대처하려는 노력의 다른 하나는, 첫 번째 과정에서 생겨난 에너지로 하루를 힘차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집중과 초연함 그리고 결심이 필요합니다. 자꾸만 과거로 향하는 나의 시선을 오늘에 고정시켜 새로운 일상을 위한 노력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연함은 충분히 체험한 나의 감정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난 이제 너를 알아. 그러니 나를 떠나가 줘."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이제 결심해야지요. 달라진 상황 속에서도 힘차게 살아가겠다고.


블로그에는 '회복의 노력'을 주로 보여 드리다가, 불쑥 노선을 변경하여 '체험의 노력'을 공개하는 까닭은, 며칠 전에 받은 메일 덕분입니다. 나에게 깊은 감동을 준 메일이었습니다. 메일은 읽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는데, 사연은 이렇습니다. 메일은 준 K는 3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K는 얼마 전, 4년 동안 함께 출퇴근하며 언니 동생으로 친하게 지냈던 직장 동료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했지만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결혼한 지 이제 겨우 2개월 지난 고운 색시의 죽음은 가족에게 뿐만 아니라 K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1~2년 후에는, 나도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라고 말했다던 망자의 말에 K는 가슴은 미어졌습니다. 나 또한 가슴이 휑했습니다. K는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표현했습니다. 매우 슬픈데, 아무도 충분히 슬퍼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어서 기운을 내라고, 빨리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답니다. 슬픔을 밀어내려 하고, 담담해지려고만 하는 사람들과 달리 강한 영혼을 가진 그녀는 메일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번 메일은 그녀의 영혼이 얼마나 강인한지 다시 한 번 보여 주었습니다.


잠시, 고통을 당했을 때의 지혜로운 대처법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K의 시선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회복의 노력'과 '체험의 노력'을 조화시켜 자신에게 필요한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한 직후에는 '체험'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슬픔을 온전히 느끼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지만 놀랍고 감사한 사실이 있습니다. 고통이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견디기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희미해질 뿐 사라지지 않는 고통도 있지만, 평생 동안 우리를 잠 못 들게 만드는 고통은 없습니다. 극심한 고통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수개월 동안 우리를 짓누를 것입니다. 이러한 슬픔과 고통을 스스로 밀쳐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슬픔 속으로 스스로 빠져들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이 늘 이렇지' 하며 자괴감이나 피해의식을 만들어내는 것 말입니다. 체험의 노력은 축구가 아닌 야구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야구 선수가 수비를 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신을 향하여 날아오는 공을 잘 받아내는 것이 수비수의 역할입니다.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오면 피하지 않습니다. 강한 타구가 날아오면, 때로는 몸으로 먼저 막아내고 글러브로 잡기도 합니다. 체험의 노력은 야구 선수처럼, 나에게 몰려오는 슬픔, 고통, 괴로움, 절망 등을 잘 받아내는 것입니다. (이 때, 피해의식에 빠지는 사람들은 야구가 아닌 축구를 하듯이 슬픔의 사건을 이리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닙니다.)


축구 선수의 능동적인 움직임이 필요한 순간은 회복의 노력을 할 때입니다. 슬픔을 충분히 느낀 이후에는, 삶을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집니다.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기도 하고, 큰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당연한 소유물에서 한없는 감사를 느끼기도 하고, 살아가는 방식을 과감히 바꾸어 버리기도 합니다. 삶의 속도를 늦출 용기와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슬픔을 당하기 전과 다른 일상에서도 힘차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들을 얻기 위해 일부러 고통을 택하긴 않겠지만, 영혼의 성장은 분명 고통 후에 찾아오는 축복입니다. 그 축복 속에서도 여전히 상실과 고통의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지만, 잃은 것만큼이나 남은 것도 많음을 깨닫습니다. 통장 속의 잔고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이, 잃어버린 것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아니니까요. 최근에 제가 겪은 상실은 일의 영역에 있어서는, 성실히 다져온 노력의 모든 것입니다만, 제 인생에는 일 이외의 영역도 있으니, 제게 남은 것들도 많습니다. 아껴주는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여러 가지 무형의 자산들!


이런 깨달음 뒤에야 축구 선수로 힘차게 뛸 에너지가 생겨납니다. 체험의 노력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날아오는 공을 받는 야구 선수처럼 자기 삶에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라면, 회복의 노력은 축구 선수가 되어 다시 예전처럼 아니 오히려 보다 더 큰 용기와 에너지로 새로운 일상을 위해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히딩크라는 훌륭한 축구 감독을 아시지요? 고통은, 히딩크가 박지성 선수에게 해 주었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해 주는지도 모릅니다. 히딩크는 당시의 월드컵 전사들에게 과학적인 체력 훈련을 실시하여, 전후반 90분을 힘차게 뛰어다닐 수 있는 체력을 키워 주었지요. 우리는 고통을 통해, 삶을 세심하게 볼 수 있는 시력과 새로운 일에도 힘차게 도전할 수 있는 심력을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죽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가 아니라면, 고통은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고통은 삶의 히딩크 감독인 셈입니다. 체험의 노력과 회복의 노력 간에 균형을 추구하던 저도, 빨리 축구 선수가 되려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빨리 일어서야 한다는 조바심이 있었다기보다 충분히 슬퍼하기엔 1월이 매우 분주했습니다. 이사, 브라질 여행 준비, 강연 등의 일을 취소할 순 없었으니까요. 바빠야 빨리 잊는다는 말은, 고통의 진정한 치유 과정과는 상관없는 말일지도 모르겠군요. 바쁘면 잠시 잊긴 하나, 이 글을 쓰기 위해 사색한 과정을 가질 수 없으니까요. 고통스러워하는 내게 잠깐의 망각이 아니라, 깊은 안식처를 마련해 준 것은 바쁨이 아니라, 아프지만 고통에 대처하려는 노력을 통해 얻은 지혜였습니다.


머지않은 날에 다시, 체험의 노력에 초점을 두어야겠습니다. 그 사건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슬플 것입니다. 하지만 슬퍼할 것입니다. K처럼 저 역시, 그렇게 나약하지 않습니다. 저 만능 스포츠맨이거든요. 결국 나는 야구와 축구를 모두 잘 해낼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실현전문가 이희석 와우스토리연구소 대표 ceo@youni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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