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두 양식을 맛나게 먹은 저녁

카잔 2012. 2. 19. 21:54

1.
어제는 후배 연구원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다. 친하게 지낸 사이였지만, 이미 강연 일정이 잡혀 있었다. 결혼식 참석을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강연이 취소되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달래는데 애를 먹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은 원래 가지 못했던 거였고, 가야 하는 강연이 취소되었으니... 와! 나만의 시간이 생겨났네.'

결혼식에 가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혼자 있고 싶은 열망이 더 컸다. 연구원 동문회장으로서의 역할 중 하나로서도 경조사 참석은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혼자 만의 시간도 갖고 싶었다.

2.
결혼식 20분 전에서야 집을 나섰다. 고민을 거듭하느라 참석을 결정한 게 다소 늦었던 것이다. 결정한 이후에 신속하게 움직였지만, 샤워를 하고 모처럼만에 정장을 꺼내 입는 데에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서둘렀지만, 버스 타고 가기에는 빠듯했다. 예식장까지는 대중교통으로 25분~30분, 차로 이동하면 15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어떻게 가야 빨리 갈 수 있을까?

차량이 많은 시간대에는 차를 잘 몰지 않지만, 특히 주말에는 오피스텔 주차장 입구가 혼잡하기에 차를 몰고 나가지 않는 편이지만, 나는 차를 타고 가기로 결정했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종합운동장에서 코엑스로 가는 도로는 차가 많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를 타고 가는 게 빠를 것이라 판단했다. 이 결정이 불러올 결말은 전혀 예상 못한 채로.

3.
차에 탔다. 시간을 확인하니 2시 40분. 그렇다면 차가 살짝 막히더라도 제 시각에 도착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희망은 좋은 길벗이지만 종종 좋은 안내자는 아니다. 희망은 주는 긍정적 착각을 삶을 살아갈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희망이 주는 독도 있다.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잘 될 거라고 믿거나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보는 경우다. 

주차장 출입구를 향해 우회전을 하자마자, 나의 희망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선 차량행렬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때도 희망이 남아 있긴 했다. 제 시각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0분이 지나도 겨우 20m 즈음 전진할 뿐이었으니까. 오피스텔 주자창을 나서기도 전에 시간은 3시를 넘어섰다.

내 차 뒤에도 행렬은 이어졌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차를 다시 주차하고 택시를 타고 가더라도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순 없었다. 나는 꼼짝없이 차 안에서 30분을 보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밝은 햇살이 가득한 날씨가 얄미웠다. 날씨는 내 마음과는 정반대였다. 탈출구가 없는 거대한 우주 차원의 감옥에서 지금 막 탈출한 느낌이 들었지만, 날씨는 매우 화창했고 맑았다.

4. 
난관이 끝난 건 아니었다. 주말에는 롯데마트, 롯데월드, 롯데백화점, 토이저러스 등으로 가기 위해 우회전하려는 차량이 오피스텔 입구까지 길게 늘어선다. 이 차량들로 인해 오피스텔을 빠져나가는 데에 무척 많은 시간이 걸린다. 사실 나는 주말 이 시각 즈음에 오피스텔 창을 통해 이 광경을 내려다 보곤 한다. 고약한 심성인 듯하나 꽉 막힌 차량 행렬 보며 재밌게 웃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 상황의 한 가운데에 있어 보니 전혀 재밌지 않았다.

'이게 뭔가?' 라는 생각도 들고, 슬슬 열이 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결혼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차려 입은 정장도, 반짝거리는 구두도 무색했다.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아가 더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컨트롤 할 수 없는 것 : 교통체증, 결혼식 시간. 컨트롤 할 수 있는 것 : 처한 상황에 대한 나의 반응.

우선 상황을 직시하고 결혼식을 포기했다. 아쉬움과 짜증은 그대로였지만, 포기하고 나니 어깨 위에 놓인 무게가 깻잎 한 장 정도만큼은 가벼워진 듯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지만, 샤워하고 옷을 차려 입은 게 억울했다. 나는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사거리를 한바퀴 돌아 귀가할 것인가, 아니면 어딘가로 자동차를 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멈춰 있는 차 안에서.

5.
내가 내린 결정은 두 가지였다.
1) 엔진오일 교환하기
2) 파주 헤이리예술마을 가서 책 읽다 오기
 

누구랑 함께 갈까, 를 두고 잠시 생각했지만 혼자 가기로 했다. 결정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아직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엔진오일 교환하러 가는 길도 막혔으니까.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결혼식장 부근을 지나칠 때의 시각은 3시 50분이었다. 결혼식 참석을 굳이 포기하지 않아도 포기되었을 법한 이런 상황에, 나는 무얼 믿고 차를 끌고 나온 걸까? 하하.

6.
집을 나선지 2시간이 지나서야 헤이리예술마을에 도착했다. 평소보다 2배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차를 타고 오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만의 시간을 보냈기에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이런 생각들을 했다. 나의 일하는 방식, 특히 효율성에 대한 생각들. 열심히 일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효과적으로 일하고 있지는 못한다는 결론이었다.

피터 드러커는 열정, 지식, 성실이 곧바로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 바 있다. 나는 나름대로 이 세 가지를 갖추고 있지만, 드러커가 성과에 필요한 능력으로 제시한 목표달성능력은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다. 헤이리에 도착할 즈음에 결론내려진 자가진단이 나를 즐겁게 해 주었다. 유쾌하거나 기분이 뜨는 즐거움은 아니었다. 차분하면서도 고요한 평온에 가까운 것이었다.

7.
차에서 내리니, 해가 서산에 떠 있었다. 측광이 예술마을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욕심이 생겼다. 석양을 받아 예쁘게 반짝거리는 카페들 사이로 난 길도 걷고 싶었다. 한길사가 운영하는 전시형 서점에서 책을 보려 했던 원래의 욕심과 충돌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은 욕심이 마음을 분주하게 했다. 

나는 하나를 포기했다.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는 없다. 시간 안배를 잘하여 두 가지를 모두 시도할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저 하나에 시간을 듬뿍 주자고 생각했다. 우유부단은 안 좋은 결정보다 나쁜 것이고, 정말로 필요한 것이 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나만의 결정 원칙을 상기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책이었고, 책을 구입하여 카페에서 독서하기 위해 이 곳에 오기도 했다. 
 
8.
한 시간 후, 서점을 나서는 나의 두 손에는 봉투 2개가, 봉투 안에는 9권의 책이 나뉘어 들어 있었다. 『아도르노』,『하이젠베르크』,『정신, 자아, 사회』(조지 허버트 미드 저),『역사를 위한 변명』,『타키투스의 역사』 등의 책이었다. 아도르노는 비판 이론과『계몽의 변증법』으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의 대표 주자다. 『아도르노』는 2세대의 거장 하버마스를 읽기 위한 초석을 쌓기 위해 선택한 책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철학을 소개한 『지평 확대의 철학』은 '점진적 자기발견의 정신탐구'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놀라워하며 구입했다. '점진적 자기발견'은 나도 자주 쓰는 용어이기도 했으니까. 전공자를 위한 난해한 철학서지만, 이번에 쓰려는 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구입했다. 사실 아닐 것을 알면서도 그저 '알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에 구입한 까닭이 가장 크다.

9.
카페에 앉아서는 고명섭 기자의 책을 읽었다. 그는 훌륭한 독서가이드다. 지적 호기심이 무척이나 강하여 서평가로서는 아주 멀리까지 나아갔다. 나를 포함하여 독서법에 관한 책을 쓴 저자들보다 내공이 훨씬 깊다. 로쟈는 고명섭의 『즐거운 지식』에 아래와 같은 추천사를 썼다. 책의 바다를 항해할 때의 '일등 항해사' 고명섭이라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였다.

"책에 관한 책’을 두 권 냈지만,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은 내게도 언제나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수평선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수심이 우리를 매혹하면서도 두려움을 안긴다. 어디까지 읽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어디쯤 읽고 있는 것일까란 물음에 한번이라도 붙들려본 독자라면 ‘일등 항해사’의 고마움을 알 수 있으리라. 그 바다의 유혹과 폭풍에 맞서 ‘두려움을 모르는 자’ 고명섭 기자는 오랫동안 내게 그런 ‘일등 항해사’였다. 서평을 일삼아 쓰면서도 그는 ‘앎의 기쁨’과 ‘배움의 즐거움’을 항상 누리고자 했고 전달하고자 했다. 덕분에 나도 기쁘고 즐거울 때가 많았다. 『즐거운 지식』은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그러모은 선물 보따리이자 묵직한 도전장이다. 한번 읽어보라고 그가 우리 앞에 던져놓는 ‘프로블레마’다. 이 갑판 위의 씨름이 한 번 더 흥겹고 즐겁다. 문제를 사유하는 자의 즐거움이다.
무척이나 재밌게 읽다 보니 배가 고팠네요." - 로쟈 이현우

나는 2시간 동안 고명섭의 책을 읽었는데, 일등 항해사의 가이드를 받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그의 책은 그간 공부한 나의 얕은 지식이 정리되도록 도와 주기도 했고,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을 재정비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왕성한 지식욕을 불사질러 주어 고맙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또 사야 할 책의 리스트가 늘어났으니. (요즘 나의 책 구매 속도는 엄청난 과속이다.)

10. 
배가 출출해졌다. 나는 헤이리예술마을에 갈 때마다 들르는 카페 '파머스 테이블'에 갔다. 치즈 포테이토와 햄버거 맛이 기막히는 곳이다. 나는 파머스 세트를 먹으며 다시 책을 읽었다. 고명섭의 책을 읽기도 했고, 명상을 즐기기도 했다. (말이 즐긴 것이지 아직은 고행 수준이다.)
밤 9시가 넘자, 홀을 서빙하던 직원이 퇴근하려고 옷을 갈아입었고, 손님들도 줄었다. 나도 집으로 출발했다.

돌아오는 길에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들으면 딱 좋을텐데, 결혼식에 가느라 가방도 없이 나왔기에 카오디오의 음악을 들어야 했다.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take 5'를 필두로 재즈곡을 연달아 들었다. 돌아오는 길은 헤이리로 갈 때보다 즐거웠다. 여전히 들뜬 즐거움이 아니라 차분한 평온의 감정이었다.
돌아올 때에는 45분 만에 왔다. 밤이라 살짝 밟긴 했다.

결혼식에 가지 못해 짜증으로 시작한 외출이었지만, 마무리는 뿌듯했다.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귀가하는 기분이랄까.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머물렀던 3시간 30분 동안 한 일은 신체적, 정신적 양식을 먹은 것 뿐인데도 기분이 좋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혼자 먹어도 괜찮을 만큼. 그리고 하루는 꽤 길다. 짜증과 만족감이 하루 동안에 모두 일어나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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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경영전문가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 ceo@youni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