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태풍이 찾아온 날의 단상 (1)

카잔 2012. 8. 28. 12:43

 

1.

태풍이 오기 전날의 아침은 아주 맑았다. 햇살이 내 얼굴을 간지럽히어 깰 정 도였다. 창 밖으로 보이는 햇살은 찬란했다. 하루 뒤면 태풍이 온다는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게 날씨다. 어젯밤에 비가 억수같이 내리다가도 이튿날엔 쨍 하고 해가 뜨기도 하니까. 날씨가 변덕쟁이인 걸까, 밤이 마술사인 걸까?

 

태풍 전날의 아침, 서울 잠실.

 

야구를 보면서도 비슷한 궁금함이 들 때가 있다. 지난해에 잘 쳤던 타자가 올해는 형편없는 성적을 내는 것은 왜일까? 한해의 신인왕이나 MVP로 선정된 선수들도 이듬해에 죽을 쑤는 경우도 많은데 말이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달엔 정말 열정적으로 살던 이가 이번 달엔 원인 모를 무기력에 빠져들기도 한다. 왜 그런 걸까? 우리가 변덕쟁이인 걸까,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걸까? 삶에는 흐름이 있고, 흐름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걸까?

 

2.

나는 태풍 이브 날, 하루 종일 일만 했다. 공저 원고를 마감해야 하는 날이었다. 사실, 화창한 하늘이 계속 나를 유혹했지만 끝까지 거절했다. 나의 완강함이 아니라, 마감일의 압박 때문이었다. 저녁 6시 30분, 원고를 보냈다. 뿌듯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성취감은 석양이 빚어내는 하늘빛에 비하면 초라했다. 하늘은 매우 아름다웠다. 내일 태풍이 온다는데, 저렇게 예뻐도 되는 거야? 그래도 되는 거였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태풍 대비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태풍이 번개처럼 오는 것도 아닌데, 그저 자신만의 속도대로 북상할 뿐인데, 나는 무어 그리 조바심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나는 책상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메일을 확인하느라 나서는데 30분이 걸렸다. 나는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노을의 붉은 빛이 하늘에 남아 있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니, 그새 하늘이 캄캄해졌다. 일출이나 일몰을 본 사람들은 안다. 태양이 생각보다 매우 빠르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무심코 슬쩍 보면 멈춰 서 있는 듯 하지만, 지평선이나 수평선과 같은 기준치를 대고 가만히 바라보면 태양의 움직임은 꽤나 빠르다. 세월도 마찬가지다. 생각 없이 사는 일상 속에서는 하루하루도 길고 세월도 느린 것처럼 느껴지지만, 어느 날 문득 지난날을 셈할 때면 세월 역시 엄청난 속도다.

 

"인생은 산파가 장의사에게 보내는 소포"라는 스페인 속담이 마음에 와 닿는 날이다. 세월의 야속한 속도를 느낄 때마다 떠오르는 시가 있다. 유자효 시인의 '인생'.  

 

인  생

 

가을 청량리

할머니 둘

버스를 기다리다 속삭인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스물다섯에 이 시를 만났고, 단박에 내 가슴 깊이 꽂혔으니 나는 무언가를 느끼는 데에는 재빠른 사람이다. 인생의 소중함, 시간의 절절함, 상실의 의미 등을 느낀 것이 다소 빨랐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항상 너무 늦게 움직인다. 결정력도 부족하다. 실행력과 결정력의 부재가 내 결혼이 늦어지고 있는 주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3.

태풍이 오기로 한 날의 아침 하늘은 흐렸다. 아침부터 바람이 거세다. 바닥의 낙엽이 50m 상공까지 치솟았다. 낙엽이 워낙 빨리 날아다녀 오래전 자취를 감춘 박쥐가 다시 등장한 모양 같았다. 거리의 가로수들이 미친 듯이 손짓을 해대어 하마터면 할 일도 없으면서 밖으로 나갈 뻔 했다. 사실 나는 유혹을 받을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바람이 매우 세차게 불면 바깥으로 달려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수시로 창밖에 서서 바람의 세기를 살폈으니까.

 

문득 떠오르는 어릴 적 만화 주제가. "캔자스 외딴 시골집에서 어느 날 잠을 자고 있을 때, 무서운 회오리바람 타고서 끝없는 모험이 시작됐지요~" 실제로 바람이 나를 날려 버린다면 흥미진진한 모험이 아니라 참혹한 비극이 펼쳐지겠지만, 나는 창밖의 광풍을 바라보며 순진한 상상을 했다. '신나는 모험이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한 2~3년 환상적인 모험을 다녀오는 거야.' 그 사이 세상의 시계는 멈춰 있어야 한다. 다시 돌아와도 내 나이 그대로이게.

 

상상을 멈추게 한 것은 오피스텔 생활지원센터의 안내 방송이었다. "창문을 열지 마시고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생활지원센터에서 생활비는 지원도 안 하면서 외출을 통제하네,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그렇잖아도 나가려던 약속도 취소하고 안 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어차피 각자 자기 안전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지사고, 사람들 중에는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이도 있으니 "외출하지 말라"는 방송의 실효성은 떨어진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오늘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세 개의 약속이 있었다. 그 중 아침 산행 약속과 점심 미팅은 연기했다. 태풍이 나에게 갑작스런 시간을 선사한 것이다. 갑작스러웠지만 반갑고 고마웠다. 사실 취소가 아니라 연기니까 결국 다시 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좋다. 내게 남은 인생의 총량은 일정하니 언젠가는 못 다한 일을 남겨두고 떠나야 한다. 그러니 살면서 항상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 덜 소중한 것을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덜 후회될 테니까.

 

반가운 나만의 시간! 나는 일부러 현관문까지 잠그고 사무실 내에 처박혔다. 미녀와 엘리베이터에 갇힌 기분이 이런 걸까? 나는 오전 내내 묘한 흥분을 느끼며 나만의 아지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치 태풍이 내게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어도 됨"이라고 합법적인 허가를 내어 준 것만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물론, 집에만 있는 것이 불법도 아니고, 이런 날이 드문 것도 아닌데, 오늘은 비밀 아지트에 숨어 있는 쾌감이 들었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 게임을 할 때, 아무도 찾지 못한 곳에 꼭꼭 숨어서 나의 승리를 예감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어쩌면, 내가 여전히 책임감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만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로 쉬는 법을 알지 못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경영지식인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 ceo@youni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