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태풍이 찾아온 날의 단상 (2)

카잔 2012. 8. 28. 13:47

 

4.

요즘 들어 옛 친구 생각이 많이 난다. 그래서 죽마고우에게 연락했다. 9월 초에 만나서 식사하고 함께 공을 치기로 했다. 스크린 골프를 치든, 당구를 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친구를 만난다는 사실에 벌써 설렌다. 또 다른 친구 두 명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엔 둘 다 여자다. 여자인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 결혼을 했으니까. 게다가 둘 다 사모님이시니 나와는 신분도 안 맞고. 하지만 이건 문제가 안 된다.

 

"오! 니가 웬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전화 안 할 줄 알았는데, 혹시 결혼해?"

 

친구의 첫마디였다. 그 말에 스쳐가는 생각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결혼할 땐 전화를 하는가 보군. 내가 결혼할 때에는 먼저 전화할 거라고 생각하네.' 결혼할 땐 내가 먼저 연락을 할까? 모를 일이다. 긴 시간 생각할 순 없었다. 나는 지금 통화중이니까.

 

"그러게 말이다. 내가 전화를 다 하고."

 

우리는 무려 12분 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셋째를 가졌다는 이야기도 듣고, 새로 부임한 교회 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남편이 목사님이시다. 사실 이 친구가 목사 사모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인생이란 게 예측을 불허한 뜻밖의 일이 자주 생기기 마련이다. 때론 내가 인생을 몰라서 잘못 예측해서 그렇고, 때론 상대가 인생을 모르거나 자기를 몰라서 엉뚱하게 인생살이를 해서 그렇다.

 

또 다른 사모님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신랑, 그러니까 목사님께서 먼저 받으셨다. 워낙 수년 만의 전화라 전화를 잘못 걸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우선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저 OO 친구 이희석이라고 합니다." 순간, 무슨 친구?, 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스스로 대답했다. "예전 교회 친구입니다. 혹시 지금 OO랑 통화 가능할까요?" 말을 하면서도 내가 왜 이렇게 정중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친구에게 전화하는 게 죄 짓는 일도 아닌데.

 

곧이어, 웃는 소리와 함께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아마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내 말을 들었나 보다. 그 남자는 신랑이 맞았다. 목사님께 안부라도 여쭐 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사이, 친구와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마도 전화 통화하기는 적어도 3년은 된 것 같다. 그래도 반갑고 어색하지 않고 만나보고 싶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종종 만나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게 벌써 8~9년 전의 일이다. 그사이, 친구는 아이 셋을 기르는 사모님이 되었다.

 

그간 나를 무얼 했을까?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라는 자괴감 없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 내 인생에게 고마웠다. 난, 책을 세 권 썼다. 2권이 공저라서 아쉽다. 2권을 더 써서 3권의 책을 들고 사모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됨을,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음을 안다. 우리는 친구니까. 특히, 그는 영원한 것들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모님이니, 그저 내면세계가 건강하면 기뻐할 친구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길을 간다. 세월이 더해질수록 인생에 쌓이는 것도 저마다 다르다. 친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만남 자체가 배움을 준다. 가능한 인생살이의 저마다의 경우를 들으며, 내가 사는 곳의 세상의 극히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하고 내가 사는 인생살이의 모양도 수천만 가지의 모양 중의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질투심만 적당히 컨트롤할 수 있다면, 친구와의 만남도 인생 수업이다.

 

나는 올해 혹은 내년 가을에 사모님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목사님과 함께 식사를 해야겠다. 한번은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지, 하는 생각을 이제야 실천할 수 있겠다. 식사를 하고나면, "이제 둘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시게" 하며 센스 있게 잠시라도 빠져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고, 아니어도 좋다. '힘든 세상을 지내다가 문득 떠오르는 친구' 얼굴을 잠시라도 볼 수 있으니.

 

수도 없이 들었던 변진섭 5집에는 '구름 닮은 친구'라는 곡이 있다. 중학교 때에도 좋아했던 곡이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더욱 공감하며 듣는 것 같다.

 

변진섭의 '구름 닮은 친구'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파란하늘 사이 숨어있는 구름을 보았어.
어릴 적 친구닮은 그 자그만 구름은
나를 보며 밝은 햇살 뒤로 웃고만 있었지
힘든 세상을 지내다가 문득 떠오르는
지난 어릴 적 내 친구는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걸까
세월은 이렇게 살같이 흘러
서로 같은 하늘 그 어딘가에서 기억 하겠지
눈물처럼 여린 추억들
언제나 마음은 함께 있는 것
외롭고 험한 세상 이 곳에서
너의 추억은 얼마나 내게 큰 힘이 되는지

많은 시간이 흘러 난 은빛 머리위로
곱기만 하던 어릴적 꿈들 다시 기억하겠지

 

5.

안 하던 일도 하다 보니 탄력이 붙었다. 연락 한 번 해야지, 했던 분의 연락처를 인터넷에게 수소문했다. 2006년에 만난 HRD 컨설턴트 J. 그로 인해 대명산업개발(대명리조트) 워크숍을 여러 차례 진행했었다. 당시, '다 내가 강연을 잘 하기 때문이야' 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기억한다), 요즘 들어 고마운 분들에 대한 마음이 애틋해지곤 한다. 그 중에 가장 기억나는 분이 J다.

 

인터넷 서핑을 통해 어렵사리 찾아낸 그의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다. 식사라도 대접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메일이 날아가고서 5분이 채 안 되어 그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우리는 9월의 어느 날에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내 마음에 어찌 그리도 깊은 기쁨이 찾아오는지! 감사를 표현하는 일은 행복을 높여준다.

 

6.

오늘은 에세이를 읽고 싶은 날이다. 딱딱한 이론서도, 가슴을 치고 드는 성공철학서도 아닌, 그저 잔잔하게 누군가의 삶과 일상을 들여다보며 내 삶을 반추하고 싶다. 지적 토론도, 열정적인 대화도 아닌, 편안한 만남이 그리운 날이다. 누군가와의 음성 언어가 아닌 한 두 권의 책이 던져 주는 문자 언어가 더욱 편안한 날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전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책값을 아끼는 요즘이라 그 책은 없다.

 

집이 아닌 사무실이라 아쉽다. 아무래도 오늘 같은 감정을 만져줄 수 있는 책은 집에 더 많으니까. 사무실을 뒤적여 보니 세 권의 수필집이 있었다. 나는 책장에서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을 꺼내 마음 내키는 대로 펼쳤다. 스님이 정채봉 선생을 그리는 글을 읽었다. 정채봉 선생은 2001년 1월에, 스님은 2010년 3월에 저쪽 별로 떠나셨다.

 

스님은 2000년 연말에 정채봉 선생을 만나러 갔던 일을 적어 두셨다. 선생은 스님을 무척이나 반가워하셨단다. 더 못 뵐 줄 알았는데 다시 뵙게 된 것이 무척이나 기쁘셨나 보다. 스님이 정채봉 선생을 만나고 헤어졌던 그 날의 순간이 마음에 잔잔히 다가왔다. 산으로 돌아오시며 몇 번이나 우셨을지도 모를 스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병실을 나오면서 나는 그를 안아주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이것이 이 생에서 우리 사이에 마지막 하직인사가 된 셈이다. 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뼈만 남아 앙상한 그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몇 차례 길가에 차를 세워야 했다.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이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

 

선생은 고향인 순천 용수동 천주교공원 묘지에 잠드셨다. 언젠가 순천에 가면 순천문학관과 묘지에 들러 인사 드려야겠다. 선생님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동화와 수필을 읽으며 그나마 덜 못되게 살아온 것이 감사하다고 말씀 드려야지. 나에게는 지금, 정채봉 선생의 글이 필요한 것 같다. 점점 못돼 먹어가고 있으니.

 

문득 엄마가 그리워졌다. '울음으로도 풀 수 없는 외로움'이 느껴지면서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사실 부산 지하철 참사 소식을 들으면서도 엄마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표현을 안 했을 뿐이다. 부산 지하철 참사 → 대구지하철 참사가 난 장소 → 엄마가 교통사고 당한 지점, 이라고 연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할머니와의 전화 통화가 떠올라 그나마 마음을 달랠 수 있다. "할머니 이번 추석엔 하루 이틀 일찍 갈게요. 여유롭게 엄마에게 다녀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경영지식인 이희석 유니크컨설팅 대표 ceo@youni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