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몸살 덕분에 삶을 생각하다

카잔 2013. 3. 11. 12:21

 

눈을 떴지만 몸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밤새 온 몸이 납덩이라도 된 마냥 무거워졌고, 통증의 지점이 분명하지 않았지만 팔다리가 쑤셨다. 고통을 잊고 싶어 다시 잠을 청했다. 고통 때문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뒤척이고 끙끙대기를 반복하다가 잠들었다. 두어 번 깰 때마다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통증 완화제의 역할을 해내는 잠을.

 

오후 6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밤 12시가 다 되어 잠들었으니 무려 18시간이나 몸져 누워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었던 적이 언제였나. 어쩌면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도 없으니 내 기억이 맞을 것 같다. 지난 주, 나는 그렇게 3박 4일 동안 몸살을 앓았다.

 

아픈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소리 없이 잘도 지나갔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 주었다. 진공의 시간은 무의미하겠지만, 시간 속에는 인생의 관대함, 나를 아껴주는 이들의 사랑, 신의 섭리가 스며들어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내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성장하고 치유되어진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시간의 흐름 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몸을 움직여 손수 해내야 하는 일들도 있다. 그런 일들은 아픈 동안에 쌓여간다. 아픔에도 고통의 주기가 있어 잠시 소강 상태가 될 때면, 쌓인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몸이 아프니 마음이 예민해져 있다. 예민함 때문에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기도 하지만, 섬세하게 인생을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나는 쌓인 일들의 가치와 경중을 생각했다. 

 

몸이 아파 못하게 된 일이 많은데, 그 미완의 일들에 대한 감정이 서로 달랐다. 내가 반드시 시간과 애정을 주어야 하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손을 떼야 하는 일도 있었다. <책을 이야기하는 남자> 원고를 보내지 못한 것은 무척 아쉽다. 왠지 모르겠지만, <행복한 거북이의 인생여행>에 포스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글을 쓰게 된 연유다.

 

내가 앓은 것은 감기가 아니었다. 콧물도 없었고 목이 따가운 등의 감기 증상이 없었다. 병원 진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몸살이었을 것이다. 하루만 쉬고 나면 회복되는 게 몸살인데, 이번에는 왜 이리 오래토록 앓았을까. 이불 속을 뒤척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나에게 무언가 전하려는 속삭임이 아닐까?'

 

바쁘게 살다보면 내 나이가 몇인지도 모른 채로 일상 속에 함몰되어 지낸다. 나는 이번 몸살 덕분에 내가 만 나이로 서른 다섯을 넘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만으로 서른이 되던 즈음에도 잠시 앓았던 것 같다. 적어도 5년에 한 번은 세월의 흐름을 인식하며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고마운 몸살이다.

 

물론 나는, 아직은 젊다. 하지만 20대 청춘은 아니니 그때처럼 무리하게 일하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어르신들은 아직 한창 나이라고 할 테지만, 그것은 그들의 나이에 빗댄 상대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들의 인생 선배도 그들에게 한창이라고 할 테지만, 그것 역시 공감이 결여된 시각이다. 결국 모든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현재 삶이니까.

 

갑자기 중년이라도 된 마냥 몸을 사리거나 점잔을 떨겠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영원히 청춘처럼 살고 싶다. 순진한 열정과 어리석은 호기심을 쫓으며 살고 싶다. 다만 정신의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육체의 현실을 인정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싶다. 체력의 유지, 관리에 애쓰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적어도 내 직업적 결실에서만큼은 나잇값을 하고 싶다.

 

몸살이 내 곁에 머무는 동안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지냈다. 고통의 주기가 정점에 머물 때에는 끙끙 소리를 내며 어서 고통이 내게서 떠나가 주길 바라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고통이 경감될 때마다 인생에 대해 드문드문 생각할 수 있었다. 고통이 생각의 기회를 주긴 했지만, 다시 아프고 싶진 않다. 그러니 건강할 때에도 생각 좀 하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