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2013년 마지막 날의 일상

카잔 2013. 12. 31. 22:30

 

1.

오전 10시에는 모 출판사와의 미팅이 있었다.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해의 마지막 날에 내 글을 호의적으로 보아준 이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의미' 있는 날에 외부 약속을 잡으며 내가 부여한 '의미'다. 하지만 '의미'는 주관적이고 그래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점이 문제다. 심지어는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서도 의미가 바뀌기도 하니까. 오늘이 그랬다.

 

12월 31일 오전 8시, 나는 출판사 미팅을 미루고 싶었다. 어느새 나는, 새해 첫 근무일(1월 2일)에 만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의 문제다. 어디든 갖다붙일 수 있어서 언제든 자기기만의 도구가 된다는 것.) 그저 자유롭게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나는 편집자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만..." 이라고 시작된 본론을 언급할 즈음, 메일을 접었다. 좀처럼 약속을 변경하지 않는 노력이 발현된 것.

 

10시 정각, 출판사가 운영하는 북카페에 도착했다. 편집자와 편집장을 만나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눴다. 만남은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올해는 출간하자는 제의를 거절만 했으니(세번이었다) 이제는 만나기라도 해 보자는 소극적이고 회의적인 생각에서 이 출판사랑 함께 일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편집자의 호의와 편집장님의 사람좋은 웃음과 직업의식을 느끼며 내 안에 어떠한 감응이 일어났나 보다. (아직, 촌스러운 책 표지 디자인은 걸림돌이다.)

 

2.

'오늘 저녁 시간은 홀로 보내야지.' 이것이 2013년의 마지막 날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한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원칙은 조금 과장이고, 지키고 싶은 지침 정도가 맞겠다. 원래는 서해 바다에라도 훌쩍 다녀올까 생각했었다. 친구가 아산병원에 항암주사를 맞으러 온다는 소식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는 미련없이 올해의 마지막 일몰을 포기했다. 포기하자마자 다른 일정들이 치고 들어왔다. 시간은 무엇으로든 채워지기 마련인 유리컵과 같다.

 

저녁 시간까지 약속 하나가 잡혔다. 한해가 가기전 차라도 한 잔 해요, 라고 보낸 와우팀원의 문자에 나는 별다른 생각없이 '당연히 그러면 좋지' 하는 마음으로 화답했던 것. 시간을 쪼개야 했다. 오전 출판사 미팅과 점심약속, 그리고 아산병원 방문 등으로 바쁜 하루다 보니, 와우팀원과는 6시부터 7시 30분까지 만나기로 했다.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는 내 글과 삶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를 원하는 이들과 함께했다.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오후엔 아산병원에 들렀다. 도착을 했지만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아 좀 기다렸다. (서관 5층 주사실에 있을 테지만 워낙 병실이 많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했더니 아내가 대신 받았다. 친구는 잠들어 있었다. 수액을 맞듯이 한 시간 사십 분 동안 항암제를 투여받고 나면 그는 다시 대구로 돌아간다. 잠든 친구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컨디션이 나아지는 요즘이다. 그의 건강 상태도 이전의 상태로, 2013년 가을 이전의 건강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3.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정이 좀 많았네' 하고 생각했다. 모두 어찌할 수 없는, 내가 선택한 일들이었다. 소중한 이들의 상황이 빚어낸 일정이었다. 그들이 내게 무언가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부드럽게 요구한 와우팀원도 있긴 했다.) 스스로 그들의 상황을 인식하며 자유롭게 선택한 일들이었다. 과도한 책임의식이 없었으니 '무리했구나' 하는 피해의식으로 나를 몰고갈 필요도 없었다. 누군가가 찾아주는 인생이라니! 감사한 일이다.

 

배가 고픈 건지, 아픈 건지 헷갈리는 증상을 느끼며 귀가했다.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라, 가볍게 식사하고서 글을 써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 즈음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올해가 가기 전 식사를 함께 하고팠는데... (중략) 한해의 마지막 식사가 맛나고 풍요로운 식탁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나를 아껴주는 고마운 말이라 마음이 감하고 동했다. 와인을 곁들이기로 생각했다. 그러면 마리아주를 고민하게 되고 결국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다.

 

 

한해를 돌아보는 글도 쓰고, 오늘 도착한 책도 읽고, 책상도 정리정돈하고 싶었다. 하지만 매우 졸립다. (일정도 많았고 와인도 마셨다.) 한해는 커녕 하루 일상을 돌아보니 책 읽을 시간도 정돈할 시간도 없다. 마치 인생살이 같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지만 그것을 위해 쓰일 시간이 부족한 것 말이다. 새해가 주어진다는 점이 위로가 되어주지만, 의식하여 소중한 일들을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 금새 덜 중요한 일들로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