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친구들이 그리워지는 밤

카잔 2014. 3. 15. 23:39

 

1.

고향 후배들이 연구실에 오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면서 설레였고 기다려졌다. 수년만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서둘러 일정을 마무리하고 연구실로 향했다. 사실 마무리가 아니라 도주였다. 오늘 난 강연회에 참석했었고, 자리를 뜰 때엔 박원순 서울시장님의 강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음 강연자는 하버드대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해피어』, 『완벽에의 추구』 등의 저자 탈 벤 샤하르였다. 서둘러 오기엔 조금은 아까운 기회들이었다. 강연회를 모두 듣고 와도 약속시간에 늦지 않을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먹을 거리와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하고 싶었다. (외국 강사의 통역 강의는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점도 결정에 한 몫을 했다.) 나는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어떤 와인을 딸까? 와인을 잘 모르는 후배들이지만, 자꾸 맛좋은 와인을 마셔봐야 와인 맛을 알아가지, 하는 생각으로 <1865 까르미네르>를 골랐다. 그리고 책 한 권씩과 제주여행에서 사온 '미스트'를 선물로 준비했다. 그 무렵, 아쉬운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회의가 늦게 끝나 약속 시간이 약 한 시간 정도 늦춰지게 되었다는 소식! 속상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하철이 일찍 끊기는 토요일이라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어 아쉬웠다. 밤 9시가 조금 넘어서야 모두 모였다. 한때 같은 교회를 다닌 네 명의 청년이었다. 둘은 결혼을 했지만 둘은 아직 싱글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엊그제 헤어진 것처럼 친근하다. 어렸을 적 인연들은 고향집 음식 같다. 오랜만에 먹어도 맛나고, 한술 뜨기만 하면 옛날의 입맛이 되살아난다. 

 

2.

둘은 와인을 즐기지 못했다. 평소에 와인을 마시질 않으니, 맛좋은 와인인지 아닌지 알 길도 없다. 호스트로서 딴엔 질 좋은 와인을 내놓는다고 했지만, 그들의 취향을 알지 못한 선택이었다. 호의가 빗나갔을 뿐, 불찰은 아니다. 물론 그의 어렸을 적 취향 몇개는 안다. 하지만 나이들며 생겨나는 취향들이 있다. 10대와 20대 초반에 와인 취향을 갖기란 드문 일이니 와인은 성인 취향 중 하나다. 세월을 건너뛰어 어른이 되어 만났으니 성인 취향을 모를 수 밖에. 와인이 대화를 부르는 술이라 하나, 우린 취하지 않아도 놀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안부를 나누고, 서로 사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그저 '만남'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하나의 자원이 필요했다. 시간이라고 불리는 참으로 소중한 자원! (우리의 이날 만남은 너무 짧았다. 90분의 만남이었으니까.)

 

3.

우리는 서른 일곱, 서른 여섯의 사내 둘 그리고 서른 다섯, 서른 넷의 여인 둘이었다.

다섯인 그녀가 말했다. "오빠, 난 요즘 흰 머리가 늘어 고민이예요." 여섯인 사내가 받았다.

"그래도 머리가 빠지는 것보다는 낫잖아." 일곱인 나를 겨냥한, 진담 반 농담 반의 말이었다.

내가 나설 차례였다. "그래, 나의 꿈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는 거야. 하지만 진행되는 상황을 보니 난 대머리 될 운명이야. 하하."

 

누구나 나이들어 간다. 나이들수록 주름과 흰머리가 늘고 피부는 늘어진다. 일부는 탈모가 진행된다. 그 일부에 내가 속한 것이 아쉽지만, 나만의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들며 머리가 빠진다. 다행한 것은 사람들이 나의 탈모에 별반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들 자신의 외모에 신경 쓰느라 다른 이의 새치나 탈모에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다. 처음 탈모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모두들 내 머리만 쳐다보는 느낌이었지만, 느낌일 뿐이었다. 슬쩍 쳐다볼 순 있겠지만, 오랫동안 관심 갖는 이는 없다. 내가 갑자기 대머리가 된 것도 아니고 점차 진행되는 것일 뿐이니 크게 신경쓰지 말자고 생각했다. 물론 탈모를 늦추는 습관적인 노력은 해야 할 테고. (샴푸 후 머리 잘 말리기, 자주 빗질하기 등)

 

4.

우리는 최근 수년을 어떻게 지내왔는지 굵직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에 대한 대화도 주고 받았다. (한 사람당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이야기를 마쳐야 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말을 하면서, 이런 주제의 대화들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나 지인들과 함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말이다. 이를 테면, 이런 질문들.

 

-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사건과 결정들에 관한 이야기 (과거)

- 지금 갖고 있는 관심사와 고민들 그리고 생각들 (현재)

-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 계획 그리고 변수들 (미래)

 

5.

우리는 막차 시간에 쫓겨 얼른 일어나야 했다. 일산까지 가야 하는 이가 있었다. 시간이 무르익기도 전에 헤어져야 하는 상황... 만남의 시간이 너무 짧아 아쉬웠다. 지하철 역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오니, 나의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 만나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들...! 어릴 적의 인연이 모두 마음이 통하는 우정이 되지는 않겠지만, 진실한 우정 중에는 어릴 적에 만났던 친구들이 많다. 그들이 보고 싶은 밤이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용혜원 시인의 <친구야>라는 시도 생각났다. 예술성보다는 웃음이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용혜원 시인의 푸근함이 느껴지는 시, 전문을 적어 본다.

 

보게 친구,

연락 좀 하고 살게

산다는 게 뭔가

서로 안부나 묻고 사세.

 

자네는 만나면

늘 내 생각하며 산다지만

생각하는 사람이 소식 한 번 없나

일년에 몇 차례 스쳐가는

비바람 만큼이나 생각날지 모르지.

 

언제나 내가 먼저

소식을 전하는 걸 보면

나는 온통 그리운 뿐인가 보네.

 

덧없는 세월 흘러 가기 전에

만나나 보고 사세.

무엇이 그리도 바쁜가.

자네나 나나 마음 먹으면

세월도 마다 않고 만날 수 있지

 

삶이란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 중에 몇 사람 만나

인사 정도 나누다 가는 것인데.

자주 만나야 정도 들지.

 

(아래엔 나도 몇 마디 끼적였다. 시인께는 죄송한 처사나, 나는 연락을 잘 하지 못하는 쪽인지라, 내 입장에서 몇 마디 적어보았다. 나의 친구들을 생각하며. ^^)

 

이보게 친구, 어찌 지내시는가.

연락 한 번 없다고 무정하다 생각 마시게.

자네를 향한 그리움이 들 때마다

마음의 소원을 빌고 있다네.

 

자주 행복하기를,

더욱 건강하기를.

 

표현해야 사랑이라는 말도

사랑은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말도

모두 진실 한 조각씩을 품었으니

서로의 우정법을 존중하세.

 

연락은 시원찮아도

만남을 향한 바람은 여물다네.

그러니 언제라도 서로 마음과 시간을 내어

함께 술잔을 들고 회포를 푸세.

 

몇 사람 만나 인사 정도 나누다 가는 것이

삶이고 우정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왕이면 진하게 인사하고

기분좋게 마시며 흉금을 나누는 사이기를 바라네.

 

새해 인사를 나누는 통화에서 

2월에 한 번 만나자는 약속이 무상하고만.

세월은 벌써 3월의 중순을 지나고 있으니.

더 늦기 전에 벚꽃 구경이나 가세.

 

별안간 찾아와 활짝 피었다가

홀연이 지고 마는 벚꽃 같은 인생이니

미루지 말고 어여 만나세.

분주함을 벗고 느긋하게 이야기 나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