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운명이다

카잔 2015. 7. 31. 22:30

 

운명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후 자서전 제목이다. 서거 1주기를 맞아 고인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인터뷰, 구술 기록을 토대로 유시민 선생이 정리한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틋한 느낌이 드는 밤이지만, 그 분에 관한 글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 수업을 준비하다가 문득 그가 떠올랐고, 그 분의 뜨거운 삶이 그리워졌다. 잇달아 내 그리운 사람들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결국 자서전 제목을 읊조림으로 마음을 달랜다.

 

『운명이다』를 뒤적이다가 밑줄 그은 문장들을 만났다. 30쪽에 나오는 "나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이하의 문장들을 읽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오늘은 7월 31일이다. 한 달의 마지막 날 밤에 울고 싶지는 않아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8월에 다시 자서전을 들춰 보리라 생각하면서. (그럴 시간이 있을까를 의심도 하면서.) 주섬주섬 몇 개의 문장을 옮겨본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혼신으로 노력했던 한 사내가 어른거려, 코끝이 찡한 대목들. 

 

"세상이 바뀌긴 했는데 좀 이상하게 바뀌었다. 군사 정권은 남의 재산을 강탈할 권한을 마구 휘둘렀는데, 민주정부는 그 장물을 되돌려 줄 권한이 없었다.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안 된 채 권력만 민주화되어 힘이 빠진 것이다. 부당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한테 더 좋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억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의 한계일 것이다. 정수장학회 문제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 날 잘못된 역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장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소유자가 정권까지 잡겠다고 했다. 그런 상황까지 용납하고 받아들이자니 너무 힘들었다." (52쪽)

 

“20년 정치인생을 돌아보았다. 마치 물을 가르고 달려온 것 같았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다고 믿었는데, 돌아보니 원래 있던 그대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은 진보를 이루는 데에 적절한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것일까?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친다. 고인의 정치를 두고 "차원이 다른 분"이라며 주변 사람에게 침 튀기며 떠들었던 시절이 떠오른 것은 잠깐이고, 내가 고인을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에 무심했던 탓도 있지만, 고인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기간 동안의 나는 군 복무를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느라 세월을 정신없이 보냈을 때였다. 생각해 보니, 사람이 갖춰야 할 여러 의식 중 나는 유독 정치의식이 빈약했다. 꾸준히 정치 관련서를 구입하긴 했지만, 다른 분야 공부와 긴급한 일상에 항상 우선순위를 내어주면서 살았다.

 

고인께 비할 바 아니지만, 나도 얼마 전 12년 내 와우 인생을 돌아보았더랬다. 나의 세계, 다시 말해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내가 머무는 생활 영역에서만큼은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사람은 이기적 본성을 지녔다고 믿는 내게, 이타적 삶은 이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존재한다. 선한 의지를 발휘한다면 비열한 이기심이 아닌 고상한 이기심으로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나와 타자의 이익을 모두 챙기려는 고상한 이기심. (사실, 나는 에너지가 있을 때마다 딱 1%만 더 섬기고 손해 보려고 애썼다. 그래야 겨우 남에게 폐 끼치지 않은 삶이 되리라는 믿음이었다. 정신적 에너지가 없으면 곧잘 이기적으로 살곤 했다는 말이다.)

 

삶을 되돌아보자니 실수한 일도 많고, 후회스러운 대목도 있다. 지나고 보니, 죄다 아쉽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자책감까지는 아니지만, 자괴감은 든다. 그래, 부끄러움! 나는 말만 앞섰던 것 같아 부끄럽고,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라 부끄럽다. 또 다른 내 모습도 보였다. 그것은 '지친 기색'이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다른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말하는 고인에게서 나는 조심스러운 진단 뿐만 아니라 얼마간의 절망과 지친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내가 지쳐서일까, 실제 고인께서 그랬던 걸까.

 

얼마 전, 와우 한 명을 오랜만에 만났다. "어떻게 지내세요?" 불쑥 찾아온 질문에 내 진솔한 속내가 불쑥 화답했다.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지내. (그거 생각하면 힘들거든.) 그냥 열심히 살자는 생각만 하면서 지내고 있어." 괄호 속의 말은 가슴에만 머물렀었다. 친구가 세상을 떠난 후, 어쩌면 나는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웃은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습관적으로 게으름을 달고 사는 사람처럼, 나는 지난 일년을 그리움과 무상함을 안고서 살았다. 차이점이라면 게으름뱅이는 습관으로 그렇게 살고, 나는 운명으로 그렇게 산다는 점이었다.

 

힘들다고 징징대거나, 일상을 놓아버리는 것은 유아적 모습이다. 내 감정과는 별개로, 나는 내일을 반갑게 맞을 것이다. 내가 부른 적도 없는데 매일 아침마다 '하루'가 버젓이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징그러울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내 목구멍은 삼시 세끼를 요구한다는 사실처럼 말이다. 문득, 새로운 한 달을 온 몸으로 기쁘게 환영하며 맞이한 20대의 어느 날이 기억난다. 그때 나는 얼마나 열정적이었던가. 또한 삶의 슬픔을 얼마나 몰랐던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수년 동안 내 일상에 드리웠었던 그늘도 떠오른다. 은근히 슬펐던 내 어린 날들은 수년 동안 이어졌었다.

 

친구와의 사별로 인해 내 삶에 등장한 비애와 상념들은 언제쯤이면 밝게 승화될까. 나는 내 아픔을 이겨낼 재간은 없다. 내 마음 속 창고에 내팽개칠 생각도 없다. 자연스럽게 화해하고 싶다. 자연스러운 방식이 너무 더디게 찾아온다면 억지스럽지 않을 정도로 화해를 위해 노력하고도 싶다. 이제 두 시간 후면 달력이 바뀐다. 나는 2015년 8월이라는 한 달을 반갑게 맞을 것이다. 이 또한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기대도, 절망도 하지 않으면서... 나는 하루하루를 살 것이다. 멀쩡하게 일상을 살다가도 슬픈 추억이 번개처럼 내 삶에 무찔러드는 날들이지만 나는 내 삶을 애정하고 매일의 날들을 애무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억지스러운 저항과 기만적인 긍정은 건강한 모습도 지혜도 아니다. 무기력한 수용과 치유와 해결에 소극적인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내 인생의 힘겨운 날들에도 씩씩하게 살아갈 것이다. 깊은 심해로의 침잠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심장을 지닌 자만이 오래 잠수할 수 있으리라. 강인한 영혼을 지닌 자만이 인생의 어두움 속을 기꺼이 활보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