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가을 예찬

카잔 2015. 9. 19. 22:52

낮에는 햇살이 따갑더니 해가 기울면서 금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맑은 하늘, 큰 일교차, 강한 자외선, 서늘한 바람, 코스모스... 가을이 성큼 다가섰다. 걷기 좋은 계절이다. "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다시 말해서 아침의 첫걸음을 동반하는 희망과 에스프리, 저녁의 휴식에서 맛보는 평화와 정신적 충만감을 찾아서 여행한다." 가을이야말로 스티븐슨의 이 말을 온 몸으로 경험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몸과 마음이 맞는 이와 '함께 걷기'는 매력적이고, 고즈넉한 마음으로 '홀로 걷기'는 매혹적이다. 가을은 날씨를 쫓아 벗들과 함께 하기에 좋고, 하늘을 벗삼아 홀로 거닐기에 좋다. 구름이 바람의 유혹을 따라 하늘을 배회한다. 나는 가을의 유혹에 못 이겨 구름처럼 떠돈다. 가을은 산책과 여행을 하기에 황홀한 계절이다. 봄날의 꽃가루나 황사가 없고, 꽃샘추위 같은 불청객도 없다. 가을 바다는 땡볕과 인파 대신 청명한 쪽빛으로 우리를 반긴다. 가을 산은 자연이 그려놓은 산수화로 단장하여 산행객을 맞는다.

 

가을 밤 연남동 어귀, 경의선 숲길공원에 돗자리 술집들이 열렸다. 연인들과 삼삼오오 친구들이 초가을 밤을 밀어와 웃음소리로 수놓는다. 그들은 추억을 쌓았고, 나는 산책을 즐겼다. 숲길공원의 끝까지 다녀오는 30분 동안 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변진섭의 서정적인 가요들(숙녀에게, 로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가을은 발라드에 어울리는 계절이다. "길을 걸으면 불러보던 그 옛 노래는 아직도 내 마음을 설레게 하네. 하늘을 보면 님의 부드런 고운 미소 가득한 저 하늘에 가을이 오면."

 

밤은 하지를 지나면서부터 내내 길어지기 시작한다. 문득 가을의 어느 날, 짧아진 하루해를 체감한다. 낮 동안 활동하던 이성(理性)은 어스름이 깔릴 무렵 석양과 함께 모습을 감춘다. 하늘이 사랑빛으로 붉게 물들면 설렘이 찾아든다. 별이 반짝일 무렵이 되면 감성도 빛난다. 한여름이면 여전히 무더울 시간이고 한겨울이면 몸을 움츠릴 시각일, 가을날의 밤 10시는 낭만이 피어나는 순간이다. 가을밤은 단풍처럼 곱고, 바람처럼 시원하다. 추수할 곡식처럼 풍요롭고, 익은 과일처럼 달콤하다. 가을밤은 생(生)이 건네는 선물이다.

 

가을에는 책 따위를 읽을 시간이 없고, 컴컴한 영화관으로 들어가기엔 아까운 날씨다. 자동차를 타고 편안하게 이동하는 대신 낙엽을 밟으며 오솔길을 걷고 싶다. 일감 바구니를 깨끗이 비우고 도시락 싸서 소풍을 가고 싶은 기분이다. 아침이면 쾌청한 하늘에 인사를 건넨다. 한가위날 가족과 함께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평범한 평일날 친구를 만나 술잔을 비운다. 기분이 좋으니 책이 그리워진다. 나긋한 에세이를 집어 들었다. 독서는 그 재미가 가을 향유보다 진할 때까지만 이어진다. 대개 30분을 넘기지 못한다. 가을은 평생의 취미까지 잠시 잊게 만든다. 과연,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