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회한의 레퍼토리를 딛고서

카잔 2015. 2. 10. 20:50

카페에 앉았다. 카페 구석에 앉은 여인, 친구의 스무살 시절 옛 애인과 닮았다. 친구의 젊은 날들을 함께했던 그녀였다. 세월은 흘렀고 췌장암 투병을 하던 친구가 죽은 후, 그녀에게서 메일이 왔었다. 오래 전부터 내 블로그를 읽어왔다는 그녀는, 한때 자신의 연인이었던 내 친구의 부음 소식을 읽은 그 날, 한밤중에 가족 몰래 숨죽여 울었단다.

 

나는 회신을 보냈고, 다시 메일이 왔다. 한번쯤 만나 슬픔을 나누고도 싶었지만, 내게 그런 용기는 없었다. 울기만 할 뿐이리라. 세월은 여전히 잘도 흘렀다. 다시 7개월이 지나, 앉은 모습이 닮은 여인을 보니 그녀가 떠올랐다. 잘 살겠지? 가끔씩 슬프기도 할까? 그럴 것이다. 명징한 건, 때때로, 여전히, 내가 슬퍼한다는 사실이다. 

 

온갖 마음의 심란함을 딛고서 『인문주의를 권함』 파일을 열었다. 지난 해 9월, 마법같이 사라진 노트북 데이터 중에서 가장 온전하게 남은 원고라, 얼른 탈고하여 출판사에 넘기고 싶지만 최근 들어서야 겨우 손을 대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지난 6~7개월이 야속하다. 이것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 후회가 부질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미 퇴고를 마쳤었던 한 줄 한 줄을 또 고쳐쓰려니, '이걸 다시 해야 하다니' 하는 푸념과 '이걸 넘어서야 한다'는 의지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간다. 짜증과 결심을 반복한다. 희망을 품지만, 그것은 깃털과도 같아 절망의 무게에 이내 가라앉는다. 집필 원고들, 수업 기록들, 사진, 강연 자료들, 독서일기, 여행일지, 성찰일지 등의 각종 나의 역사적 기록물들... 나도 모르게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상기하고 있다. 휴우...... 길게 새어나오는 무거운 한 숨. 

 

일상을 살다가... 문득 상실을 회상, 푸념, 상실 목록 재확인, 한 숨.

수십 번도 더 겪었던 레퍼토리다, 그리고는 되뇌인다.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어. 놀라운 일이.'

 

짙은 아메리카노를 여러 차례 홀짝였다. 쓴 맛이 왠지 반갑다. 에스프레소의 진한 맛이 문득 그립지만,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즐기기엔 아메리카노가 좋다. 오전에 읽었던 전혜린의 글들이 떠올랐다. "내가 지닌 여러 가지 제한이나 껍질에 응결당함이 없이 내 몸과 내 정신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무한 속에 내던지고 싶다." 연이은 상실로 열정이 응고되었던 날들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진다.

 

나는 그날들이 안타깝고 아쉽다. 잃어버린 것들은 나의 청춘과 맞바꾸었던 내 삶의 일부였기에, 상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하루에도 여러 번 떠오르는 친구 생각과 날마다 넘어서야 데이터 상실의 여파는, 이제 내 삶의 일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될까? 새로운 일상을, 새로운 마음에 담아야겠다. 여전히 슬프지만, 예전처럼 눈물만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때로는 힘이 듭니다. 눈물도 나고요. 그래도 삽니다. 다름 아닌 삶이니까요," 와우카페 한줄게시판에 쓴 문장이다. 누군가가 나를 염려하여 안부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리주저리 몇 마디의 답변을 할 테지만, 그 말들을 줄이면 "내 상실과 점점 더 화해하고 있습니다. 곧 다시 열심히 살 거예요," 정도가 되리라. 한 글자로 줄인다면, "삶"이 될 것 같다. 힘들지만 살아가고 있다는 현재진행형의 고백이기도 하고, 현실이 어떻든 이것이야말로 내 삶이라는 운명애의 표현이기도 하다.

 

주문한 커피는 맛이 없으면 외면하고 남기면 그만이다. 깊고 풍미가 가득한 커피를 찾아가면 된다. 손에 든 책이 시시하면 내려 놓으면 그만이다. 위대한 책들은 수두룩하다. 삶은 외면하거나 내려놓을 수 없다. 쓰다고 외면하면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닌 바로 내 삶의 시간들이 흘러가 버린다. 내 삶이 시시하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의 삶 속으로 뛰어들 수도 없다. 나는 오직 내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필연의 굴레인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는 뒤집어 생각하련다. 숙명의 터 위에서 찬란한 꽃을 피워내리라. 아모르 파티!

 

나는 다시 예전처럼 살 것이다. 아니 예전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언젠가는 세상 수많은 이들 중 한두 명 정도는 내 삶을 두고, 

아름답다고, 석양처럼 그윽하다고 말해 주면 좋겠다.

오늘 나는, 『인문주의를 권함』 두 장을 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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