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거북이의 자기경영

나이는 마음을 앞서간다

카잔 2015. 10. 19. 11:10

월요일 오전, 카페로 일하러 가는 길이었다. 한 여인이 바쁜 걸음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막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와 출구를 나선 참이었고, 여인은 내 곁을 지나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찰나의 스침에도 그녀의 출렁이는 배가 눈에 띄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그 여인은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Inspection 모임이라 부르는 친구들과 주말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둘째 날 아침, 하루 늦게 합류하는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 패스트푸드점 <버거킹>에 잠시 들렀던 때였다. 건강에 관해 잠시 말을 주고받았는데, 요지는 명료했다. “우리도 이제 진짜 건강에 신경 쓸 나이다.” ‘진짜’라는 말이 강한 억양으로 강조되었는데, 지난 번에도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거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해왔음을 말하는 와중에 인식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친구 한 명은 <버거킹> 한 쪽 구석에 의자를 붙여 누워 자고 있었다. 아니, 죽은 듯이 뻗어 있었다. 전날밤 과음한 탓이다. 호텔을 나섰을 때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속이 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던 모양이다. 인스펙션 최고 주당이 세월 앞에 무너진 참사였다. 방금 목격한 출렁이는 뱃살과 술병이 난 주당 친구의 두 이미지가 오버랩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나이를 항상 인식하며 살지는 못한다. 뱃살은 슬그머니 늘어나고, 시나브로 체력도 떨어진다. 5년 전, 10년 전의 마인드로 살아가지만 가끔씩 몸이 세월의 흐름을 알린다. 예전 같으면 끄떡없었던 주량에도 뻗어버리곤 한다. 이러한 경험이 없더라도, 조금만 세심하게 자기 몸을 들여다보면 세월을 발견 수 있다. 뱃살, 모발, 눈가, 목, 피부 등 어디에서나.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 있다. 인식을 못하는 것과 마음이 젊은 것은 다르다. 인식 못함은 생각 없음 또는 지혜 없음에 가깝다. 세월의 소중함이나 현재의 나이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마음이 젊은 것은 현실을 직시하되 주름살, 탈모, 탄력을 잃은 피부에도 마음을 명랑하고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정신적 힘이다. 나이 듦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서도 밝고 활기찬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최고의 지혜에 속한다.

 

뱃살과 술병의 이미지가 어우러져 나를 생각하게 했다. ‘나이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앞서간다. 편안함은 곧잘 우리 몸을 망가뜨린다. 마음과는 다른 몸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몸의 어딘가가 불편하다면 익숙해진 생활방식과 결별해야 한다.’ 깊은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단호하고 실천적인 착상이었다. 다음과 같은 결심들로 이어졌으니.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뱃살을 완전히 빼고 탄탄한 몸매로 가꾸자. 서른여덟 내 나이에 대한 글을 쓰자(글쓰기는 사유의 도구인 동시에 나를 돌보는 수단이다), 다시 먹거리 관리에 힘쓰자, 가을의 정취를 술자리로 고양시키되 와인 반 병, 소주나 막걸리는 한 병을 넘기지 말자!’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읽었던 헤세의 아포리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모든 꽃이 시들고 모든 청춘이 노년에게 길을 비켜주듯 모든 인생의 단계도, 모든 지혜와 모든 미덕도 그 시절에 피어날 뿐 영원히 지속되지 못한다. 마음은 삶이 부를 때마다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시작을 각오해야 한다.”(p.30) 나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각오하며, 이 즈음에 읽을 만한 책을 가방에 챙겨왔다. 결심한 것들은 잠언집이 아닌 실천강령이다. 일상의 작은 영역을 변화시킬 준비는 끝났다. 헤세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출발할 준비가 된 사람만이 우리를 마비시키는 익숙함에서 몸을 빼낼 수 있을 것이다.”(p.31)

 

* 인용한 책 : 헤르만 헤세, 이재원 옮김, 『헤세의 인생』 그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