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찢긴 구름은 천천히 대지 위를 달리며 그림자를 대지 위에 부드럽게 드리우고 있었다. 한 떼의 구름이 하늘 저쪽에서 일어났다. 태양이 구름 뒤로 들어갔다 나옴에 따라 대지의 표정은 살아 있는 얼굴처럼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곤 했다.”(p.39)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만난 구절이 1박 2일 영주로 다녀왔던 가을 여행을 상기시켰다. ‘아! 이번 여행에서는 가을 하늘 한번 쳐다보지 못했구나.’ 나는 15명이 함께 떠난 여행의 가이드였다. 후속 일정을 생각하고, 시간을 조율하고, 사람들을 챙기는데 관심을 두느라 홀로 느긋한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 이것은 아쉬움이 아니다. 나의 정열의 부산물이었다.

 

홀로 떠나는 여행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다르다. 홀로 떠난 여행은 사유할 시간을 듬뿍 품에 안는다. 머리가 맑아지고 영혼이 따뜻해진다. 나만의 속도로 만끽하고 나의 취향대로 식당을 고른다. 미흡한 준비는 자유가 되기도 하고, 모험이 되기도 한다. 아직 그렇게 해본 적은 없지만, 계획표를 휴지조각처럼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도 있다.

 

함께 떠나는 여행은 서로 조금씩 배려하고, 사전에 여러 가지가 준비되어야 한다. 영리 목적이 아닌 친교로 떠난 여행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학습 공동체의 리더다. 주로 공부를 하는 모임이지만 함께 여행도 떠난다. 임시 가이드가 되면, 참가자 저마다의 취향과 의견을 최대한 고려하고 싶다. 그리하여 개인들에게 멋진 추억을 선사하고 싶다. 나는 욕심 많은 가이드다.

 

여행은 끝났고, 내게는 두 가지가 아쉬움으로 남았다. 여자들 숙소 세 개의 방 중 하나가 밤에 조금 추웠다고 한다. 살뜰히 챙기지 못해 미안했다. 붙박이장에 가득 쌓여있던 겨울 이불을 여성들이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에 안타까운 마음이 더해졌다. 선생이 여자들 숙소의 장을 일일이 확인하기가 멋쩍긴 하나, 잠자리는 중요하다. 까탈스러워 보이더라도 할 일은 해야 한다.

 

다른 하나의 아쉬움은 소백산 자락길의 동선과 소요 시간을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해 시간을 얼마간 낭비했다. 가이드로서는 치명적인 실수였다. 첫째 날 일정이었던 부석사와 소수서원, 식당 등을 만족스럽게 진행했지만, 여행 마지막 일정을 의도대로 보내지 못해 아쉬웠다. 모두가 소중한 주말을 투자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몸을 숨길 곳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여행 중 한 팀원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이 왜 이 여행을 하시는지 궁금했어요. 너무 많이 신경 쓰시는 게 보여서요.” 십 수 명이 떠난 여행이니 준비할 것도 많고, 여행지에서도 이런저런 노력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나 보다. 한 기수씩 여행 준비를 하는 것이 공동체의 관례였는데, 이번 여행 준비와 진행을 홀로 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셨는지도 모르겠다.

 

“각자가 추억을 만들어 가면 좋지요.” 평소의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함께 여행하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괜찮은 여행 추억 하나를 선물하고 싶은 것이다. 또 다른 이는 내게 이런 말도 했다. “선생님에게 저희랑 떠나는 여행은 자유가 아닌 것 같아요.” 많은 것들을 고려하느라 정작 내가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염려 섞인 말이었다.

 

그가 어떤 맥락에서 건넨 말인지 이해했지만, 나에겐 이번 여행도 자유였다. 조르바는 자신의 주인에게 자유를 설명했다. “이 개자식은 지갑을 꺼내어 터기 놈들에게서 빼앗은 금화를 주르륵 쏟아 내더니 한 주먹씩 공중으로 던지는 겁니다. 두목, 이제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조르바에게 자유는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지금까지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이다.

 

나에게 어떤 여행은 함께한 이들에게 황홀한 여행 추억을 선사하겠다는 꿈을 위해 나의 개인적인 정열, 취향, 편안함을 버리는 여행이다. 풍광 사진 대신 기꺼이 그들의 모습을 담고, 나의 취향 대신 기꺼이 그들의 취향에 맞춘다. 나의 비전에 집중하면, 맛난 먹을거리에 정신을 잃는 일도 없고, 동행들의 불평을 듣는 일도 어렵지 않다. 누구도 자기 욕망을 영원히 소멸시킬 순 없지만, 모든 순간을 욕망에 매여 살 필요도 없다. 

 

나는 분명 높은 이상을 가진 가이드다. 사람들에게 황홀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은 동시에 나 또한 여행자가 되어 여행의 순간순간을 경험하고 향유하고 싶다. 이번 여행에서는 가이드 역할은 해냈지만, 여행자가 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내가 수고하는 모습을 보았고, 나는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여행 이튿날 아침, 나는 샤워를 하면서 다음 여행을 꿈꾸었다.

 

모두가 황홀한 순간들을 경험하는 여행,
가이드도 여행자가 되어 한껏 즐기는 여행,
그리하여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보다는
“행복했습니다”라는 말을 더 많이 듣는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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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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