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오전이 다 지나갔다

카잔 2015. 11. 17. 11:44

1.

적당한 포만감으로 마시는 진한 커피를 좋아한다는 글을 썼더니, 친구가 자기도 그렇단다. 그 이후로 카페에서 홀로 '적포진피'를 마실 때면, 종종 녀석이 떠오른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향도 맛도 좋네. 날씨마저 진한 가을이고. 일정이 많은 이번 주다. 가을을 누릴 여유가 없어 아쉬워하다가, 이 순간을 아쉬움에게 내어주기는 싫었다. 밖으로 나가 딱 5분 동안 하늘을 보았고 낙엽을 만졌네. 하루 5분의 여유는 언제든지 낼 수 있음이 느껴지면서 행복하더라. 연말에는 한 번 보자." 이런 메시지를 보내려고 적었다가, 오글거려서 관두었다.

 

2.

외출하는 길에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끊어야 했다. "아, 네. OO님. 제가 지금 엘리베이터 안인데, 잠시 후에 전화 드릴게요." 불과 1분 후인데도, 나는 방금 통화한 사실을 잊어버렸다. 카페에 앉아 있다가 '아차' 싶어 얼른 전화했다. 안부를 묻다 보니 사심 없이 별 뜻도 없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논문 쓰실 때 만난 이후로 못 뵈었네요."

"네, 제가 아쉬울 때에만 만났다가 어찌하다보니 이리 되었네요."

나는 얼른 끼어들었다.

"어휴! 별 말씀을! 그렇게라도 만나서 저도 고마웠지요."

머릿속에는 '그렇게라도 만나야 더 친해지지요'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내 말의 속도는 생각을 쫓아가지 못했다.

"사실 전화가 연결이 안 된 적도 있고, 제가 미룬 것도 있고 그러다 보니 이제 연락 드려요." 

 

우리는 다음 주에 만나 식사를 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통화였다. 모든 이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고 그럴 수도 없겠지만, 이렇게 잊지 않고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아는 분께는 마음이 간다. 오늘 전화를 받아서가 아니다. 이미 이 분은 10년 전부터 당신의 삶으로 인격을 보여주었다. 그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딸 아이와 아내의 얼굴도 스쳐간다.) 그 답례로 내가 밥을 사겠다고 했는데, 잘 될런지 모르겠다. (통화시간을 확인해 보니, '잠시 후에 전화 드릴게요'라는 말을 한지 '22분'이 지난 뒤였다.)

 

3.

짧게나마 책도 읽고, 저녁에 만날 R&D 미팅 준비도 할 계획이었지만, 어느 것 하나 손도 대지 못한 채로... 오전 시간이 다 지나갔다. 노트북 옆에 놓인 책『공항에서 일주일을』이 나를 보고 미소 짓는 것만 같다. 덕담도 건넨다. "자네, 어디 시간의 속도를 몰랐던가. 무어 그리 아쉬워하나."

 

잠시 눈을 감고, 귓 속에서 울려퍼지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Eddie Higgins Quartet 의 재즈 선율에 나의 시간을 내어준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선사한 것이다. 마악 한 곡이 끝났다. 이 뮤지션들... 제 법이다. 지금의 내 마음에 쏘옥 드는 곡을 답례로 건넨다. 경쾌하고 우아하다. 제목을 확인해 보니 <By Myself>란다. 홀로, 라니! 제목마저 마음에 드네. 나 또한 답례로 간단한 시 한 수.

 

인생

 

크로노스가 활을 쏘았다.

슝, 

오전 시간이 떠나갔다.

 

훌쩍,

젊음마저 떠날까 저어하며

화살통 안을 들여다본다.

 

에게게.

이건 많은 건가

적은 건가.

 

에라이,

모르겠구나.

과녁이나 만들자.

 

크로노스가

일을

거두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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