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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없는 삶의 처연함

카잔 2016. 6. 26. 23:28

- 편해영의 단편 「첫 번째 기념일」을 읽고


"집에 있는 휴일이면 늘 십여 통의 이력서를 썼다. 검정색 펜으로 천천히 글씨를 써서 이력서 칸을 메웠다. 고등학교로 끝나는 최종 학력과 여기저기에서의 단기간 경력을 적는 동안, 그는 어쩌자고 이렇게 볼품없이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낚싯줄처럼 그의 가슴 깊숙한 곳으로 던져져 연민을 잡아 끌어냈다. 뒷면을 뗀 증명사진은 고체형 풀을 발라 사진란에 붙였다. 사진은 가급적 우스꽝스럽게 나오도록 찍었다. 불쌍해 보이는 것보다는 우스워 보이는 게 나았다. 다 쓴 이력서는 전부 큰 도시에 있는 사업체로 보냈다. 이력 때문인지 사진 때문인지 대부분은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력서를 작성하는 사내는 도시의 변두리 지역 담당의 택배 기사다. 이 작품은 2007년 제3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우수상으로 실렸다. 선정위원들은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삶"을 그려낸 소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탈출은 서글프다. 실패해서이기도 하지만, 탈출의 과정이 어설퍼서 그렇다. 이력서에 쓰인 구절들은 하나같이 그의 허술하고 답답한 시도를 보여줄 뿐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자필 이력서를 보내는 것부터가 무리일지도 몰랐다." "어떤 날의 이력서에는 그 주에 배송한 품목을 죽 나열했다." 주산이나 타자 같은 "지금은 쓸모없어진 자격증을 적은 날도 있었다." 그는 부단히 시도하지만, 그 시도는 습관처럼 반복될 뿐이었다. 개선되거나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이력만으로 도시에 있는 직장에 취업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이력서를 써 보내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그는 여전히 변두리 구직자로 남을 것이다. 그나마 신도시가 완공되면 그가 사는 곳도 도시의 일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게 위안이 될 때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반지하방을 전전하는 생활이 나아질 리 없다는 생각에 치욕스럽기도 했다. 그게 뭐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치욕이나 위안이 인생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는 철거가 시작된 아파트에 마지막까지 사는 젊은 여자에게 물건들을 배달한다. 남자와 여자는 소설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둘은 모두 변두리에 산다. 도시의 중심에 들지 못했고, 시대의 주역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 작가는 둘의 유사성을 일찌감치 암시했다. "여자에게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물건이 배송되었다. 어떤 날은 김치였고 간장 게장이었고 고추장이었다. 샌들과 웨스턴 스타일의 가죽 부츠, 키높이 운동화도 그가 배송해 주었다. 통기성이 좋은 속옷 세트와 물방울무늬 원피스, 자루가 긴 스팀 청소기 따위의 물건도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중략) 여자는 그가 배송해 준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고 간장 게장으로 밥을 먹은 후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외출할 거였다. 그는 여자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날부터 남자는 여자의 물건을 배달하지 못했다. 여자는 부재 중이었다. 일 년을 배달하는 동안 여자가 부재 중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고, 작가는 썼다. 재택근무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여자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작가는 여자의 직업에 대해서는 쓰지 않았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제 곧 개업할 유원지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보아 번듯한 직업을 가졌을 것 같지는 않다. 여자도 남자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갖지 못했다. 아니, 수입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으리라. 온갖 종류의 택배 물건들은 대부분 음식이나 생필품들이었다. 물건들의 품목 속에서 빠듯한 형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여자에게 물건들을 배달하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자 남자는 무심결에 여자의 집 현관문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은 열렸고 주인은 없었다. 창문 밖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강 건너 유원지의 회전 관람차가 뿜어내는 불빛이었다. 철거가 시작된 아파트를 비추는 유원지의 불빛이라니! 불빛은 '빈부격차'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밝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작가는 여기서 문득 남자의 어린 시절을 그려낸다. "그는 관람차를 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살아 계실 때 부모님은 줄곧 돈을 버느라 고단해했다. 돈과 시간에 여유가 있었더라도 그들이 사는 변두리에는 관람차를 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들 가족은 휴일을 먼 곳의 유원지에서 보낼 만큼 단란하지 못했다." 가난, 고단함, 단란하지 못함은 부모에게서 그에게로 대물림됐다.


여자의 부재가 이어지자, 남자는 택배상자를 집으로 가져와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자에게는 악의가 없었지만, 생각도 없었다. 그 단순하면서도 나이브한 생각으로 발화된 타인의 물건 사용은 곧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여자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둘은 유원지에서 만났다. 여자는 유원지의 정비 관리를 하는 임시직을 맡고 있었다. 앉을 곳도 없고, 한 바퀴 회전하는 시간도 잴 겸 둘은 회전 관람차를 타서 그간 남자가 사용했던 물건 값을 계산했다. 남자는 "여자 친구가 있는 녀석들이 그 안에서 키스와 포옹을, 가끔은 더한 짓까지 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직 좁은 곤돌라에 함께 올라탈 만큼 친밀한 사람을 알지 못했다." 남자와 여자는 친밀하지 않는 데도 물건 값을 치러야 하는 애매한 관계로 함께 회전차를 탔다. "그는 괜히 마른 입술을 만지작"거렸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여자와 헤어져 유원지를 빠져나왔다. 


이제 소설의 결말부다. "그는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면서 관람차를 돌아보았다. 관람차는 불을 밝힌 채, 어느 누구도 태우지 않고 마치 자신이 돌지 않으면 세상이 멈춘다는 듯이 느릿느릿 어두운 밤의 도시를 비추며 회전하고 있었다. (중략)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짐칸에 가득 찬 상자들이 조금 덜컹거렸다. 그는 그 물건들을 배송하기 위해 밤의 도시로 들어갔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은 쓸쓸했다. 관람차는 밝았지만, 탑승자는 아무도 없었다. 자본주의는 발전하지만, 발전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발전은 멈추지 않는다. 밤인데도, 남자의 일감은 가득 차 있다. 남자가 어두운 밤의 도시로 들어가면서 소설은 끝난다. 밤인데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소설이 출간되고 6~7년이 지난 후 민주당 손학규 대통령 경선후보는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 또 4년이 지났다. 이 시대의 청춘들 삶에는 저녁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