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아름다운 명랑인생

삶을 맑게 사유한 날들

카잔 2017. 1. 9. 17:14

힘겨운 연말을 보냈다. 눈물 없이 지낸 날이 없었다. '관계의 상실'로 아프도록 슬펐고, 앞으로 들이닥칠 '상실의 예감'으로 고통스러웠다. 며칠 밤은 불면으로 지새워야 했다. 시공간마저 내 편이 아니었다. 집에 머물면 답답해서 밖으로 나가야 했고, 밖을 나돌면 불안해서 집으로 들어와야 했다. 과거와 미래도 나를 옥죄어왔다. 이별한 연인과 사별한 인연들 그리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또 다른 상실들! 세상 어디에도, 인생을 더 살아도 '탈출구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우울증인가 싶어 관련 책을 뒤적였다.


“인간의 모든 지적 생산물은 ‘생각’의 결과이며, 우울증 환자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생각하는 인간’이다. 그들은 우리가 평소 소홀히 넘겨 버리는 사소한 것들까지도 예민하게 짚어 내고 생각한다. 그들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사람’보다 인생과 운명에 대해 훨씬 많이 생각하며 관계와 감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어떤 화제든 깊이 탐구하고 생각을 거듭하며 자신의 관념과 사상을 돌이켜본다. 반면 바쁘게 살아가느라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며 미뤄둔다.” (구거,『우울증 남자의 30시간』, 유노북스)


헤르만 헤세와 같은 대문호들이 우울증과 신경 쇠약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이유에 대해, 나는 구거처럼 생각해 왔다. 사람과의 대화에서든 책이나 영화에서든, 자신의 생각을 만나면 반가운 법이다. 구거의 말은 그래서 반가웠고, 자가 진단에도 확신을 더해 주었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자주 ‘죽음’을 사유했고 ‘사별’을 좀 더 힘겨워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친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아파했다. 구거의 견해는 나의 일면을 보여주었지만, 책에 등장한 우울증 환자와 나는 차이점이 많았다. 다른 책을 읽어야 했다.


“앞일을 예감한다는 것은 가령 생일, 기념일 휴가 같은 일들에 대해 기대를 더 높여주지만, 불행히도 상실과 관련된 예감의 경우엔 그 가능성과 현실성 또한 더 크게 느끼도록 만든다. 인간은 자신이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유일한 종이다. 우리는 어느 날인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이들도 때가 되면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상실의 예감’이다.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언젠가는 경험해야 할 고통이 미리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상실수업』)


자신을 이해하면 위로를 얻는 걸까. 나는 『상실수업』에서 등장한 ‘상실의 예감’이라는 개념은 나를 깊이 위무했다. 내가 겪는 고통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두 분 부모님과의 사별, 두 선생님과의 사별, 절친한 친구와의 사별을 겪으며 나는 상실을 ‘예감’하게 된 게 아닐까? 아주 섬세하고 세밀한 예감을! ‘상실의 예감’을 설명하는 문장 하나하나가 나를 어루만져, 지금까지 몰랐던 또 하나의 자아를 만난 느낌이었다. 반면 독서는 힘겹게 진행됐다. 매 쪽마다 울었고, 어떤 구절에선 절망했다. 다음은 특히 인상 깊은 구절들!


“상실의 예감에서 오는 슬픔은 앞으로 일어날 상실에 우리를 사로잡히게 만든다.” / “예감이 가져다주는 슬픔은 실제로 일어날 사건만큼이나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모든 사람이 상실을 예감하는 것은 아니며, 예감한다고 해도 똑같은 방식은 아니다.” / “상실의 예감에서 오는 슬픔은 죽음 이후에 느끼는 슬픔과는 별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상실의 예감은 앞으로 마주해야 할 고통스런 과정의 전주곡이며, 치유되어야 할 이중의 슬픔이다.” 전주곡이라는 말이 무서웠다. ‘전주곡이 이렇게 힘든데….’


누군가의 말이 고통을 더하기도 했다. ‘뭘 그런 일로?’, ‘아직도 힘들어 해?’ 라는 식의 말들은 쓸쓸함을 안겼다.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이해받지 못함에서 오는 법이니까. 선의의 조언도 많이 들었지만, 다음의 구절이 나를 더욱 위로했다. “상실을 예감하면서 느끼는 슬픔은 상실 후의 아픔보다 더 조용하다. 말이 없어진다. 슬픔을 자신 안에 간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적극적인 개입도 원하지 않는다.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단지 누군가가 손을 한 번 잡아주거나, 말없이 옆에 앉아 있어줌으로써 위안 받을 수 있는 그런 감정이다.”


돌이켜보면, 세월은 무심했고 자애로웠다. 나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도도하게 지나가 버리는가 하면, 나를 서서히 치유하기도 했다. 상실의 예감으로 인한 이번 고통은 아직 진행 중이다. 세월의 무심함만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고통을 가까스로 견디며 사는데, 별안간에 해가 바뀌었다. 원치 않은 공간으로 떠밀리듯이 2017년을 맞았다. 새해는 이방인에게도 변화의 기운을 건네는 걸까? 1월 3일에는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눈물 없는 하루를 보냈다. 이튿날도 비교적 밝게 보냈지만, 5일부터는 다시 힘겨움이 찾아왔다. 8일에는 책상에 엎드려 몇 분 동안 울어야 했다. 고통은 떠난 게 아니라 잠시 외출했을 뿐이었다.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행복한 시기도 인생이고, 불행을 느끼는 날들도 인생이다. 나는 내 삶의 모든 날들을 사랑하고 싶었다. 정신의 에너지가 바닥나고 눈물에 겨운 시기에도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고통의 날들을 사랑으로 끌어안기란 쉽지 않았다. ‘상실의 예감’을 정성스레 매만지고 싶었지만, 정작 그 ‘예감’이란 놈은 나를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윽박지르지는 않았지만, 인생의 어둡고 무서운 면을 조용히 속삭였다. 이런 녀석을 사랑하진 못할지라도, 언젠가는 받아들여야 함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지난 70여 일을 돌아보니, 인생이 나를 집어 올려 낯선 세계에 내던진 느낌이다. 인간은 새로운 땅에서도 언제나 문명과 발전을 이룩해 왔다. 개척이 힘겨울수록 개척자는 강인해졌다. 성장하고 도전하는 이들이나 진짜 인생을 살려는 이들에게 ‘처음’은 숙명이다. 누구나 단 한 번의 인생을 산다. 처음 겪는 일을 만날 수밖에 없다. 자기 인생을 살면서도 이방인이 되는 때다. ‘처음’은 떨리고 설레며 두렵다. 어떤 처음은 두려움만을 안기기도 한다. 두려움은 ‘이겨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증폭되고, ‘결국엔 견뎌낼 거라고 믿을 때’ 작아진다. 머지않은 미래에, 지금의 시기를 평온하게 돌아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며칠 전에 쓴 메모로 글을 맺으련다.


"내 인생은 새로운 세계로 던져졌다. 나는 온 몸으로 굴러 우아하게 착지했다. 이내 눈에 보이는 길을 묵묵히 걸었다. 내 길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했다. 걷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해가 바뀌어도 내면의 슬픔은 가시지 않았고, 고통도 여전했다. 온전하게 회복되어 새해를 맞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으니 충격은 없었다. 힘겨움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나는 문제를 가진 채로 성장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현재를 살려고 애썼다. 아픔과 상처를 둘러메고 계속 걸어갔다. 걷다 보니 ‘바로 여기야, 이제는 쉬어도 돼’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낯설지만 새로운 기운이 가득한 땅에서 휴식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눈물과 고통이 가득한 시기였지만, 삶과 죽음을 맑게 사유한 날들이었구나!’ 라고." (연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