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 6

심장의 두근거림을 듣는 독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책만큼은 읽으며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매년 독서 목록이 쌓여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수상자의 작품을 다 읽을 수도, 읽을 필요도 없지만) 수상자들이 100명을 넘어선 데다 다작하는 작가도 많다. 반면 나는 1인 독서가이고, 읽는 속도도 느려 터졌다. 이것은 자기비하나 체념이 아니다. 정확한 현실 인식이다. 독서 목록이 쌓여가는 원인은 또 있다. 나의 문학 사랑이 스스로 기대하는 만큼 깊지 않을 가능성! 나의 일상을 돌아보면 문학보다 사랑하는 것들이 많음이 분명하다. 문학보다 더 많은 시간을 주고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문학을 제외하고서도 명저들의 목록은 끝이 없다. 문학만을 사랑하기에는 독서 욕심이 너무 많다. 나의 문학 사랑의 깊이 역시 현실 인식이다..

해결

[짧은 소설] K는 중고 믹서기를 2만원에 팔았다. 물건을 건네며 K가 말했다. “날이 여전히 날카로워서 어떤 과일이나 채소도 곱게 잘 갈려요.” 물건을 구매한 사람은 자신의 기대만큼 날이 날카롭지는 않음을, 이튿날 당근을 갈면서 알았다. 갈리긴 갈렸고, 불편하진 않았다. 아쉬움이 찾아든 것은 뚜껑이었다. 흘림 방지용 고무패킹이 조금 헐거웠다. 믹서기 용기를 거꾸로 뒤집으니 내용물의 수분이 약간씩 새어나왔다. 믹서기를 뒤집어 사용할 일은 없지만, 조금은 불만족스러웠다. 환불을 요구하거나 불만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세하고 정확한 공지의 중요성을 느꼈다. 다른 중고 매매자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로 전화하는 일은 없었다. 상대에게 폐를 끼치거나 갈등이 일어날 만한 일은 모..

어기적거리며 걷고 있다면

“두목 당신은 말이오. 당신 나름대로 먹는 걸 하느님께 돌리려고 애를 쓰는 것 같소만 그게 잘 되지 않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까마귀에게 일어났던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까마귀에게 일어난 일이라니, 그게 뭡니까, 조르바?” “말씀드리지요.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거지요. 그날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어기적거릴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오.” - 『그리스인 조르바』(p.100) 조르바가 자기다움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까마귀가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렸다”에서 중요한 대목은 ‘거들먹거림’이 아니다. 거..

비즈니스 석을 예매했다

크레타행 에게항공(Aegean Airlines)은 본의 아니게 비즈니스 좌석으로 예매했다. 이코노미 석이 없었고, 비즈니스와 이코노미의 가격이 비슷했다(3만 5천원 차이). 비즈니스 탑승권을 살펴보았다. 이름부터 달랐다. ‘탑승권(Boarding Pass)’이 아니라 ‘탑승/ 라운지 이용권(Boarding / Lounge Pass)’이었다. 이런 문구도 보였다. “We are pleased to invite you to our lounge prior to the departure of flight." 나를 라운지로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라운지가 어디에 있지? 단 한 번도 비즈니스 석을 구입한 적은 없다. 누군가가 나를 비즈니스 석이나 일등석의 세계로 초대한 적도 없다. 이왕이면 라운지에서 탑승 시..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여행 0일차, 10월 15일(토). 1.열흘 동안 함께 그리스를 여행했던 일행과 헤어졌다. 그들은 서울로 갔다. 나는 아테나 공항에 남았다. 지금 시각은 저녁 7시 30분. 일행과 헤어진 시간이 정오니까 일곱 시간 반이 지났다. 렌트카를 예약하고 다시 취소하고, 여행지를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크레타 섬으로 바꾸는 등 네댓 시간 동안 혼자서 소동을 치렀다. 신용카드를 챙겨 오지 못한 결과들이다. 신용카드를 지참하지 못한 사연은 길다(기회가 온다면 그 사연을 풀어내고 싶지만, 지금은 ‘허락된 지면이 짧다’라는 말로 간단히 넘어가련다). 신용카드만 있었더라면 차 렌트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테고, 나는 폭스바겐 골프를 몰고서 코린토스의 어느 호텔에서 쉬고 있으리라. 지금쯤이면 에게해의 밤하늘을 보면서 식..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견한 것

고대 그리스 세계를 조금은 안다. 머릿속에는 수세기에 걸친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황금빛 아테네의 지적 유산들을 꿰어 찬 지식 꾸러미가 있다. 최근 수년 동안 호메로스와 비극 작가(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읽었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어설프게나마 공부했다. 고대 그리스는 내 독서 인생의 중요한 경유지다. (어쩌면 최종 목적지나 지적 고향이 될는지도….) 아테네 여행을 하다 보니, 첫 문장을 다시 써야겠다. “고대 그리스를 조금은 안다고 착각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모른 채로 그리스에 왔음을 여행 둘째 날부터 절감했다. 헬라어는 알파벳조차 몰랐고, 굿모닝에 해당하는 아침 인사 ‘칼리메라’조차 이곳에 와서야 외웠다. 지역어를 모르고 여행지에 관한 지식이 없어도 여행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