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감을 배우고 싶거나 공감 때문에 괴로움을 느꼈던 분들에게 공감에 대한 최고의 현자를 소개합니다.



스티븐 코비는 20대 초반의 제게 '공감'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 가르침을 최대한 간결하고 정확하게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래 글과 영상으로 '공감'에 대한 코비의 지혜에 접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상에서는 코비 박사가 공감이 잘 이뤄진 베스트 사례를 시연하는데, 공감에 대한 개념과 워스트 사례부터 접하고 난 뒤에 보시면 시청 효과가 더욱 크실 겁니다. 


1.

코비는 기막힌 비유로 '공감'의 의미와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한 고객이 안경을 깨뜨려 안경점을 찾았습니다. 주인은 고객의 이야기를 간단히 듣고 시력 검진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쓰던 안경을 건넸습니다. "자, 이걸 껴 보세요. 10년 동안 썼는데 정말 잘 보입니다." 고객에게 맞을 리가 없죠. "제겐 도수가 너무 높아요." 주인과 고객의 대화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주인 : 이상하네, 제겐 잘 맞았는데... 다시 한 번 써 봐요.

고객 : 흐릿할 뿐예요.

주인 : 마음을 열고 보다 적극적으로 사고해 보세요.

고객 : 그래도 사물이 잘 안 보여요.

주인 : 참 답답하네요. 나는 당신을 도와주는 중인데...


2.

안경 비유가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고민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고 그를 이해하려는 시간은 갖지 않은 채 자신의 관점에서만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p.337)


먼저 공감해야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코비는 말합니다. "훌륭한 판단을 위한 열쇠는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판단부터 하는 사람은 결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미 공감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의 주인공도 이렇게 당부합니다. “남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기도 전에, 자신이 겪어보지도 않고 겉만 보고 남을 미워하는 자는 보아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는 법이지요.”


상대에게 진실로 필요한 말을 가졌더라도 우리는 먼저 그를 공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시죠. "당신이 하는 말이 좋고 훌륭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설사 나의 내면에서 당신의 조언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 그 조언을 받아들이기에는 나의 마음이 너무 감정적이고 방어적이며, 어쩌면 죄의식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p.339)



3.

공감은 어떤 것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게 아니죠. 문제 해결이나 개선도 아닙니다. 상대방의 관점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공감입니다. 코비는 우리가 대화를 들을 때 네 가지 유형(판단, 탐색, 충고, 해석)으로 반응한다고 말합니다. 공감을 방해하는 4가지 태도입니다.


"판단은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탐색은 자신이 가진 관점과 호기심을 따라 질문하는 것이다. 충고는 자기 경험에 의거해 조언하는 것이다. 해석은 자신의 동기와 행동에 근거하여 상대의 동기와 행동을 유추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코비는 네 가지 유형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실례로 보여줍니다.


"아빠 난 지쳤어요. 학교는 지루하고 따분해요."

"무슨 일이 있니?" (탐색)

"학교는 도대체 실용적이지 않다고요. 난 거기서 얻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글쎄, 넌 아직 학교의 좋은 점을 몰라서 그런 거야. 나도 너만할 때는 그렇게 생각했단다. 몇몇 과목들을 쓸데 없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 과목들이 내게 큰 도움을 주었음을 알게 됐지. 꾹 참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렴." (충고)

"저는 제 인생의 10년을 학교에 바쳤어요. 학교 공부가 앞으로 자동차 정비공이 되려는 제게 무슨 도움이 되나요?"

"자동차 정비사라고? 농담이지?" (판단)

"아뇨. 농담이 아녜요. 조를 보세요. 그 애는 학교를 그만 두고 자동차를 수리하고 있어요. 돈도 많이 벌고 있다고요. 그게 실용적인 거죠."

"지금은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단다. 하지만 조는 공부를 계속 했었으면 하고 나중에 후회하게 될 거야. 너는 자동차 정비공이 되고 싶지 않을 테고. 그것보다 더 나은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 교육이 필요해." (충고)

"난 모르겠어요. 조는 아주 잘 살고 있어요."

"얘야, 너 정말로 공부에 집중해 보았니?" (탐색, 판단)


아래에 소개할 스티븐 코비가 시연한 공감의 베스트 사례와 함께, 이 대화는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일상 속에서 숱하게 만나는 모습이니까요. 스티븐 코비로부터 공감적 경청을 배웠던 것은 20대의 가장 큰 자산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공감적 경청을 하려면, 상대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서 그 말의 '내용을 재구성하고 감정을 반영하면(rephrase content and reflect feeling)' 됩니다. 코비의 예를 들어볼게요.


"아빠, 난 지쳤어요. 학교는 지루하고 따분해요."

"너 정말 학교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고 있구나."

(여기서 학교가 내용이고, 좌절감이 감정입니다.)


이제 영상을 보시죠. 판단, 해석, 탐색, 충고가 없는 감동적인 대화가 나옵니다. 공감적 경청의 정수인 셈입니다. 제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콘텐츠인데, 여러분께도 영감, 깨달음, 자극을 만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중 습관 5번(공감적 경청)의 핵심을 담은 영상입니다.



공감! 이 매혹적인 단어는 제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 인생의 고통은 크게 두 가지 영역에서 발생하더군요. 하나는 자기경영에서의 실패입니다. 나 자신을 원하는 대로 이끌지 못하는 겁니다. 그 결과는 불만족과 자괴감입니다. 다른 하나는 대인관계에서의 실패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해, 다툼, 갈등, 불신을 만나는 일은 자기경영의 실패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공감을 깨닫고 실천할수록 사람들과의 관계가 깊고 부드러워집니다. 저는 평생 공감을 연구하고 배워갈 겁니다. (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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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필요해 우린 대화가 부족해
서로 사랑하면서도 사소한 오해
맘에 없는 말들로 서로 힘들게 해 (너를 너무 사랑해)
대화가 필요해." - 자두 <대화가 필요해> 中 

1.
나는 어제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식사를 하면서 여섯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에 대한 서로의 느낌을 공유했다. 다소 민감한 주제(이를 테면 섹스와 같은 주제나 서로에 대한 아쉬운 점 등)에 관해서도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나 역시 의견이 다르면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하면서 편안하게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내가 최근에 쓴 글을 읽은 후 그에 대한 느낌을 공유할 때에는 서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대화 도중 간간이 진심 어린 조언이 오갔다. 우리는 손을 붙잡고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2.
이처럼 대화는 사람을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 받는 교감 활동이다. 나는 SNS 활동은 대화만큼의 인간적인 교감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대니얼 골먼은 『포커스』에서 디지털 세대가 대화에 서툴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디지털 세상의 새로운 세대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에는 대단히 익숙하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행동을 읽어내는 데에는 서툴다. 그들은 대화 도중에 갑자기 문자를 확인하고, 상대방의 얼굴에 비친 실망감을 감지하지 못한다."

3.
대화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다툰 연인들은 대화를 통해 오해를 푼다. 사이 좋은 연인들은 대화를 통해 더욱 깊은 사랑에 이른다. 남자들의 우정은 같은 활동을 하면서 시작되곤 하지만, 대화를 통한 교감이 우정을 더욱 깊게 만든다.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에게도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가 없으면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사이도 건조해지고 만다. 친구든 연인이든 부부든 대화가 통하면 마음이 충만해지고, 대화가 안 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대화가 갈등의 벽을 녹이고 친밀함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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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최승자 시인의 시 <삼 십 세>의 도입부다. 나는 '서른 살' 대신 '마흔 살'을 넣으며 읽어야 하는 나이가 됐다. 서른이든, 마흔이든, 쉰이든 최승자 선생의 시 두 행에 공감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서른 살을 맞지만, 아무나 서른 살이라는 평범한 소재로 울림을 주는 시를 짓지는 못한다. 시인의 존재 이유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도 존재 이유가 있다. 시인이 아니니까 시는 짓지 않아도 된다. 원했던 삶이 아니라면, 시작(詩作)을 하는 대신 스스로를 물음 앞에 정직하게 세울 필요는 있으리라. 어떻게 살 것인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첫 구절이다. 평생 자기실현을 탐구하고 도전했던 대문호도 어려워했던 '자기다움'이다. 나 답게 살지 못한 날들을 자책하지 말자는 말이다. 자기다움이나 인생의 비전은 포획이 아닌 추구의 대상이다. 이룰 때까지 구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마흔을 444일 앞둔 오늘, 나는 다시 꿈을 꾸었고, 실현 계획을 세웠다. 지난날의 이루지 못한 꿈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서 자괴감이 들었지만(이같은 일에 Ctrl+V 키는 사용할 필요가 없어야 하는데), 뻔뻔해지기로 했다. 나는 마치 목표를 처음 세우는 것처럼 문서 파일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꿈꾸는 마흔"이다.


"마흔 살이란 하나의 큰 전환점이어서,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엇인가를 뒤에 남겨두고 가는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사실 마흔을 생각하면 아쉬움부터 몰려온다. '쓴다'는 행위를 나의 근원적인 존재 이유라고 느끼면서도, 그 존재 이유를 충분히 실현하지 못했다. 삼십 대의 출발은 황홀했다. 서른 살에 첫 책을 출간했다. 이후 몇 년간 출판사에서의 러브콜이 잦았지만, 더 이상의 출간은 없었다(두 권의 공저가 있고, 원고 유실 후에도 세 편의 원고를 완성했지만, 결국 출간은 아니었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나는 줄곧 썼지만, 출간은 뜸했다. 작가의 이력으로서는, 30대 전체가 ‘상실의 시대’였다. 달랑 한 권 출간이라니! 원고를 잃었던 일과 출간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린 결과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게 두려웠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의 프롤로그(본문은 시간 때우기용으로는 괜찮지만, 유익을 얻자면 프롤로그만 읽을 만한 책)에서 한 말이다. 나 또한 인생의 특정 시기에 하면 좋을 법한 일들을 해내지 못한 채로 그 시기를 보내긴 싫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때도 많지만, 많은 경우 나이는 숫자 이상이기도 하다. 중년의 사랑은 대학생들의 사랑과는 다르다. 좋아하는 순수한 감정만으로 사랑하기엔 아무래도 10~20대가 유리하다. 우리네 인생에는 분명 꿈과 이상 그리고 희망이 필요하지만, 넘쳐나는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 체 게바라


20대에는 "나는 꿈꾸는 청년입니다" 류의 패기 넘치고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글을 썼다. 지금은 노력해도 20대의 나처럼 글을 쓰기는 힘들다.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해도 대안은 있다. 다음과 같이 쓸 수는 있으니까. "나는 다시 꿈을 꿉니다. 패기가 시들해 보인다고요? 그러게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도 패기가 싫은 건 아닙니다. '현실'과 맞닿아 살다보니 잠시 움츠러들었을 뿐입니다. 여전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가깝게는 황홀한 기쁨으로 마흔을 맞겠다는 꿈, 멀게는 '작가 연지원'이 되겠다는 꿈이." 


지난주에는 두 개의 도전을 감행했다. 탈고 직전의 원고를 투고했다. 다음의 메시지와 함께. "관심 있는 출판사와 마무리 작업을 함께 하고 싶어서 저자 기준에서 90% 완성된 원고를 보냅니다." 이러한 방식의 투고는 완벽주의가 심한 내게는 변화였고 용기였다. 존경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고 쓴 비평 에세이를 그 작가에게 보내기도 했다. 응답이 없고 실패를 겪더라도 계속 도전할 것이다. 오늘 종이에 적고 가슴에 품은 꿈을 모두 이룰 때까지! 스물 아홉의 나는, 서른이 불청객처럼 느껴졌었다. 서른 여덟의 나는 마흔을 꽤나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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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문학비평가 이명원 선생의 책 제목이다. 마음이 엄청 짜다는 말인가, 무슨 의미지? 도서관과는 어떤 관계고? 의문은 <내 안의 소금밭>이라는 글을 읽으며 풀렸다. 두 페이지짜리 짧은 글(책에 실린 상당수의 글이 두 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은 이렇게 시작된다.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서가에 꽂힌 오래된 책을 보면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안심'이라는 단어와 글의 말미에 "마음이 소금밭"인데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을 "고통으로 속이 꽉 찬 개그맨이 사람을 웃겨야 된다는 아이러니"에 빗댄 걸 보면, 고통스러운 내면을 뜻하는 것 같다. 그리고서 이렇게 글을 맺었다. "내 안의 소금밭을 부지런히 갈기 위해서라도, 그 짜디짠 인생에 정직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나는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허균의 말을 약간 비틀어 말하자면, 붓두껍을 닫는다고 문인이 죽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글을 쓸 당시에 이 걸출할 비평가의 개인사는 고통이 짙게 드리웠나 보다고 생각했다.그는 광대놀음 같은 글쓰기를 잠시 쉬고 싶었나 보다. 고통에 집중하고, 자기 인생에 정직하기 위해서라고 밝히면서. 그런데도 책은 계속 읽었을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가지 않던 도서관에 오랜만에 들른 까닭도 기분이 내키거나, 책을 읽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마음이 소금밭'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독서는 그에게 일종의 안정제였던 것!


염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의 소금밭 비유는 제대로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만약 '마음이 소금밭이어서(또는 이기 때문에)'라고 표현했다면 보다 직접적이고 의미 전달도 명확해진다. 반면 덜 문학적이 된다. "마음이 소금밭인데"는 다양한 해석을 부른다. '소금밭'이라는 현실과 도서관에 간 사건의 연관성을 다양하게 모색하게 된다. 소금밭임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다, 라는 의지의 발현으로까지 해석하면 과장일까.


말이 조금 엇나갔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책을 읽는 행위가 독자에게 안심, 치유,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독서할 때, 그의 내면을 단정짓기가 어려워진다. 어떤 이는 한가로운 시간을 맞이하여 여가 생활이나 무위도식한 취미로 책을 읽겠지만, 누군가는 절절한 자기 극복의 의지로 책을 집어들었거나 또는 처절한 자기 위로의 일환으로 책을 읽기도 할 테니까.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 선생의 말을 보자.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는가 하면, 독서가 가진 위로의 힘을 주장한다. "누군가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 이는 나만의 이유가 아니다. 누구나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상할 때 혹은 고통으로 인한 죽음 직전에도 책을 읽으면 위로 받는다. 기분이 전환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픈 상황에서 딴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덜 아프게 된다."


정말 누구나 독서를 통해 위로를 얻는지는 모르겠다. 책을 전혀 읽지 않던 이들도 그러한지 궁금하다는 말이다. 나는 늘 생애 처음으로 독서하는 이들이 첫 독서 경험을 통해 영감, 위로, 에너지를 얻으려면 적합한 책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비독서인들이 삶의 괴로움을 만났을 때 자신에게 도움 될 책을 만날 확률이 늘 책을 읽어온 독서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 적합한 한 권을 만나기야 한다면, 독서의 위로 능력을 의심치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다양하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고, 서로 다른 것에서 위로를 얻는다. 누군가는 옷을 사면서 고통을 경감시키고, 누군가는 여행으로 자신을 달랜다. 어떤 학생은 음악을 끄고 공부하고, 어떤 학생은 공부할 때마다 음악을 켠다. 이러한 인간의 다양성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삶이 힘들 때에는 서점이나 도서관에 어슬렁거려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럴 마음이 아니다, 나는 지금 힘들다'고 말한다면, 나도 이렇게 말할 것만 가다. 저도 삶이 잘 굴러가서가 아니라, 힘들고 아파서 책을 읽습니다, 라고.


몸이 아프면 약을 먹기 위해서라도 밥 한 술을 입에 넣어야 할 때가 있다. 나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삶이 힘들 때, 아픔을 견디고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면서 힘을 얻는다. 책 한 권으로 문제를 극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문제를 가진 채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있다. 책이 상처가 없던 원래의 삶으로 되돌려주지는 못하지만, 상처를 싸매는 법과 상처를 안고 앞으로 걸어갈 힘을 얻을 수는 있다. 문학비평계의 황제들을 비판한 도서 『타는 혀』로 의미 깊은 논쟁을 촉발시켰던 걸출한 비평가도, 삶의 방식에 관한 주관이 또렷한 여성학 연구자도, 안심을 얻거나 아파서 책을 읽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위로다.


덧#1. 독서를 해 왔다면, 자신을 위로할 만한 책을 찾아낼 촉이 있으리라. 그러니 책을 읽지 않던 분들을 위한 글을 덧붙인다. 첫 책에서 기대할 만한 위로를 얻지 못하더라도 "첫 술에 배부르랴"는 속담을 기억하면서 두번째, 세번째 책까지는 읽어 가시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에 맞는 책을 주변의 독서가나 전문가로부터 추천 받으면 그나마 선택의 범위를 좁힐 수 있다.  


덧#2. 이명원 선생은 소금밭이어서 당분간 글쓰기를 쉬었다. 글쓰기가 위로를 주지 못해서가 아닐 것이다. 고통스러울 때, 매문이나 기고를 위한 글쓰기를 하기는 힘들다. 치유나 성찰을 위한 일기쓰기처럼 자신을 위한 글쓰기는 독서만큼이나 안심과 위로를 준다. 어떠한 고통이냐에 따라 글쓰기를 잠시 그만 두고 싶을 때도 있으리라. (개인적인 경우겠지만, 나는 하드디스크의 자료를 유실했을 때 한 달 이상 동안 노트북을 켜지 않고 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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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비늘로 나를 반겨준 공천포 앞바다


무작정 제주에 왔다. 편도 항공편으로, 숙소 예약도 없이. 불안한 마음은 없었다. 성수기가 아니니 숙소는 수두룩했고 렌터카 하루 이용료는 백반 값보다 저렴했다. 이번 여행은 첫째 날 점심 약속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 일정도 없다. 계획된 일정이 없을 뿐이지, 어딘가가 나를 부를 테고, 나는 무언가를 하면서 지낼 것이다.

 

서귀포시와 남원읍 사이에 위치한 공천포 식당에서 모듬물회를 먹었다. 소라와 전복이 들어간 물회는 상큼하면서도 신맛을 잘 먹지 못하는 내게도 맛났다. 식사는 세 명의 여인과 함께했다. 제주에 사는 와우팀원, 그녀를 찾아온 인도네시아에 사는 또 다른 와우팀원 그리고 엄마를 따라 하늘을 날아온 예쁜 아이였다.

 

우리는 창밖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멋진 남자 사장님이 친절하기도 하셔서 인상에 남는 곳이다.) 두 시간 후, 제주도민이 된 와우팀원은 신랑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일어나야 했다. 그 집에서 묵고 있는 인도네시아 아낙도 함께 나섰다. 햇살 좋은 오후 세 시를 향하여 가는 시각에 우리는 헤어졌다.

 

떠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시야에서 사라진 후 마음에 들었던 카페를 찾아갔지만, 오늘은 급한 일이 생겨 문을 닫는단다. 아쉬움을 안고 차에 올라탔다. 식당을 찾으려고 지도를 검색했을 때, ‘쇠소깍’과 ‘남원큰엉해안경승지’가 가까이 있음을 확인했었다. 가보았던 여행지라 목적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해안경승지 방면의 남원읍을 향해 해안도로를 달렸다.

 

드라이브를 즐기다 보면 이내 카페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건축학 개론>에 등장했던 카페 <서연의 집>이 근처에 있음을 알았지만 마음 끌리는 대로 드라이빙하는 방식으로는 찾을 수는 없었다. 결국 30~40분을 달리다가 해안가에 정차했다. ‘남원 카페’라는 키워드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상위에 3개의 카페가 떴다. 서연의 집, 와랑와랑, 소년감성 카페샐리!


 

세 카페 중 동선이 좋은 곳을 선택했다. 이름도 예쁘고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 보이는 <와랑와랑>이 5분 거리였다. 도착했더니 예상보다 더욱 마음에 들었다. 오래 머물기는 미안한 아담한 공간이고, 사람도 많으리라 예상하여 일부러 큰엉해안경승지를 들렀다 오는 바람에 한 시간 남짓 밖에 앉지 못했다. 아쉬웠다. 카페를 좋아하는 내겐 다시 찾고픈 명소다.

 

평범하고 사소한 일화지만, 불현 듯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정확한 목적지가 없었다. 이 방향으로 가면 마음에 드는 카페가 나오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으로 출발했다. 결과는 시간 낭비였다. 바람과 낙관만으로는 <와랑와랑>처럼 외진 명소를 찾을 확률이 낮다. 어쩌면 많은 날들을 이렇게 살아온 건 아닐까? 명확한 비전이나 목표 없이 시간을 낭비하면서….’

 

내 인생살이의 일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느꼈다. 긍정적이고 용기 있는 출발이 파라다이스 발견으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확률적으로는 방황에 그치는 경우가 더 많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생에도 고스란히 적용될 오늘의 배움을 잊지 말자. 내가 어떤 곳에서 행복한가를 알고 여러 명소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목적지를 정한다면, 비전과 목표의 유익을 만끽하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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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이나 목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카페에서 커피잔을 들며 옛 직장 선배가 물었다. 얼마 전 이 질문을 주제로 50분짜리 특강을 했었다. 자신 있는 주제였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의견을 나누어야 할 여러 주제가 있었다. 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계획이 존재했지만, 질문을 던지는 선배의 표정이 진지했다. 나는 장광설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정성을 다해 짧게 답변했다.

 

“비전과 목표의 장점은 분명하죠.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집중할 수 있고 낭비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잖아요. 하지만 목표 지향적인 삶은 환경 변화에 둔감하고 외부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어요. 헨리 민츠버그는 의도적 전략(Deliberate Strategy)과 창발적 전략(Emergent Strategy)이란 개념으로 ‘계획적인 삶’과 외부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삶’의 균형을 강조했어요. 한 마디로, 비전과 목표를 세우되 외부 환경을 관찰하라 정도가 되겠네요.”

 

어디에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무엇이 균형인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이다. 치우치면 그르친다. 목표 수립은 삶을 돕지만 목표에만 치우치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 삶의 어느 한 시점에서 세운 목표가 인생 전체를 고려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조화란 서로 다른 것들의 어우러짐이다. 의도적 전략(비전, 목표 수립)과 창발적 전략(환경 관찰과 기회 포착) 모두를 구사한다면 멋진 삶을 이룰 것이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균형은 언제나 필요하다. 앞서 선배가 던진 질문을 다룰 때에도 마찬가지다. 친한 사이라 편안한 분위기였지만, 대화 주제는 분명했다. 효율적인 의견 나눔을 위해 유인물까지 준비한 만남이었다. 질문은 주제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곧 가치를 주제로 한 모임을 이끌어야 했던 선배에겐 중요했다. 준비된 의제를 잠시 밀쳐 두고 창발적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의외에 대화에는 고작 2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진솔하고 생산적인 대화는 관계가 빚어내는 선물이다. 미리 계획한 주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차단해서도 안 되고, 준비된 회의 안건이 있는데 무조건적으로 즉흥적 대화로만 빠져서도 곤란하다. 두 가지 전략을 유연하게 활용해야 한다. 삶을 돕는 도구도 마찬가지다. 성실한 독서는 삶을 돕지만 능동적인 행동도 삶을 빛낸다. 사유 없는 행동은 위험하고, 행동 없는 사유는 허망하다. 생각과 행동 중 무엇을 앞세워야 할까는 사람마다 다르다. 무엇이 앞서나가든 다른 하나를 얼른 뒤따르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탁월함의 관건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는 이론가를, 조르바는 행동가를 대표한다. 어느 날 조르바가 말했다.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니까…… 우리가 당신을 제대로 만들어 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나는 속으로 나 자신에게 소리쳤다. ‘조르바 말이 옳아! 옳고말고.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어.’ (p.139)

 

두목은 이미 지금까지의 삶의 양식을 바꾸기로 결심한 터였다. 더 이상 책벌레이고 싶지 않았다. 행동하는 삶을 열망했다. 책을 쉽사리 버리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양식을 권하는 조르바의 조언이 중요함을 인식했다. 지금까지의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새로운 양식으로 더욱 균형 있는 인생 식단을 구성하겠다는 고귀한 의식이다. 계획적인 준비나 그때그때의 상황 판단이나 모두 우리 삶을 돕는다. 균형이 서로를 보완한다. 균형 감각, 다시 말해 모순적 가치의 추구야말로 지혜다.

 

“이 세상의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라.” - 조셉 캠벨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 누가복음 6:26

“영적인 것을 사랑하면 세속적인 것을 얕보지 않으리라.” - 조셉 캠벨

“우리는 동시에 좌측과 우측으로 움직일 것이다.” - 제리 브라운

 

비전과 목표만이 아니라, 모든 미덕이 중요하다. 모든 미덕으로의 개별적인 몰입! 그것이 균형이다. 비전과 목표 수립은 중요하다. 균형이라는 지혜의 반쪽을 차지하니까! 균형은 획득하기 어려운 가치지만,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삶을 빛낸다. 균형의 획득은 두 다리를 얻는 것과 같다. 한 발로는 껑충껑충 뛰어야 하지만, 두 발로는 보다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달려갈 수 있다. (연지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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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지연 2016.11.15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꿈만 꾸는 사람이 아닌,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자고
    마음속으로 외쳐봅니다. ^^

“두목 당신은 말이오. 당신 나름대로 먹는 걸 하느님께 돌리려고 애를 쓰는 것 같소만 그게 잘 되지 않으니까 괴로운 거예요. 까마귀에게 일어났던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까마귀에게 일어난 일이라니, 그게 뭡니까, 조르바?” “말씀드리지요.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에게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 보겠다는 생각이 난거지요. 그날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보법을 몽땅 까먹어 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기껏해야 어기적거릴 수밖에는 없었으니까 말이오.” - 『그리스인 조르바』(p.100)

 

조르바가 자기다움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까마귀가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렸다”에서 중요한 대목은 ‘거들먹거림’이 아니다. 거들먹거리든, 겸손을 떨든 그것은 핵심이 아니다. ‘비둘기처럼’이 관건이다. 까마귀는 자신이 아닌 존재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조르바에게 삶이란 자신의 내면세계와 일치해야 했다. 삶은 자기다워야 했다. 다른 사람처럼 사는 것은 ‘뒤죽박죽’ 인생이 되고 만다. 자기답게 걸으며 당당하게 살아야 했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고 해서 인격적 삶이 된다거나 고상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다움의 영역이 아니라 인격, 태도, 사고방식의 문제다. 자기답게 살아도 욕을 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자기답게 살아야 할까?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어기적거림, 삐걱거림, 뒤죽박죽이 사라진다. 그래야 어기적거리지 않고 곧게 걸을 수 있다. 삐걱거림이 없어야 오래 걷는다. 오래 걸어야 많이 보고 느낀다. 곧게 걷는 자들이 자기를 직시하는 법이다. 반성과 교정은 걸어본 자들의 전유물이다. 인생은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변화와 성장의 여정이다.

 

선의를 갖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도 어기적거림이 찾아들 수 있다. 스무 살의 나는 의욕이 충천했고 높은 이상을 품었다. 멋진 인생을 살고자 내가 추구할 가치를 세웠다. 한 성공철학서의 제안을 쫓아 14가지의 지배가치(자신의 행동을 지배할 가치)를 수립했다. 자의식이 강한 천성을 타고나 나의 내면과 모조리 불일치한 가치들은 아니었지만, 나의 본질에 가깝기보다는 멋진 말들의 향연이었다.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끌어온 언어의 조합에 더 공을 들였다. 결과는 어기적거림이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로 뒤죽박죽 인생은 모면했지만, 까마귀 같은 모습도 연출됐다. 2~3년 후, 나는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이번에는 미국의 교육 사상가 파커 파머가 나를 이끌었다. 그의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라는 책이 스물다섯 살 청년을 번개처럼 일깨웠다.

 

“세상에는 극단적으로 단순한 도덕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인 삶이란 베스트셀러 처세서의 차례를 뒤적여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을 일일이 체크해 가며 교양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쯤으로 여긴다. 살다보면 우리가 너무나 미숙한 나머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어떤 가치를 버팀목처럼 세우고 그것에 의지해야 하는 순간이 있긴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런 순간들이 자주 되풀이 된다면 잘못된 것이다. 남의 인생을 살려고 하거나 추상적인 규범에 의존해서 살려는 사람은 십중팔구 실패하게 마련이다. 나아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p.15)

 

극단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단순한 도덕주의자’였다. 남의 인생을 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나는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살지는 못했다. 생각은 이상적이었고, 꿈은 추상적이었다. 추상적인 가치를 힘써 추구하는 일은 제법 대견한 일이지만, 달려갈 푯대가 모호해서인지 종종 실패했다. 파커 파머는 ‘까마귀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한 법을 태양이 어둠을 몰아내듯이 밝혀 주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아무리 숭고한 비전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걸러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부여된 것이라면 그것은 심각한 폭력이다. 우리 안의 자아는 침범을 당하면 우리에게 저항할 것이다. 진실을 인정할 때까지 때로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우리 인생을 방해할 것이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 데서 출발한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자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제는 나의 두 발로 나에게 걸맞은 보폭과 모양새로 걷게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어기적거릴 때가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 감을 때까지 어기적거리는 실수를 하게 될 테니까. 어기적거림에서 벗어나 얼른 당당함을 회복하면 그만이다. 파커 파머의 교훈들은 언제나 내게 위로와 방향을 건넨다. 그는 말한다. “소명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선물”이라고! “우리는 내면의 소리만 빼고 그 밖의 곳에서 들리는 말에는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고. (연지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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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효진 2016.10.28 13: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팀장님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몇년전 읽은 책이지만 다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인 것 같네요.
    감사히 글 잘 읽고 갑니다. 추워진 날씨에 건강 유의하세요^^

    • 보보 2016.11.08 1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참 좋더라.
      올해만 두 번을 읽으며 이 책을 향유하는 중~ ^^

      효진이도 늦가을을 건강하고 재밌게 즐기기를! ^^

스무 살을 넘겼다고 해서 모두 어른이 되지는 않는다. 신체적인 어른들도 정서적, 사회적, 정신적 성장이 없다면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천 번을 흔들려도’ 어른이 되지 않는가 하면, ‘열 번의 흔들림’으로도 단단해지기도 한다. 해마다 똑같이 나이를 먹지만, 성숙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이는 무엇으로 어른이 될까?


얼마 전, 친구와 그의 30개월 된 아들과 함께 베이커리 카페에 갔다. 아이는 상황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짜증을 냈다. 먹을 때에는 조용했고, 만화를 볼 때에는 즐거워했지만, 원하는 상황이 아니면 참지 못했다. 아이는 참을성이 없다. 우리 주변에는 점잖다가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짜증을 내고 절제력을 잃는 어른들이 많다.


귀여운 아들 녀석이 빵을 먹다가 크림을 흘렸다. 아빠가 아이를 안고 있었으니, 나도 모르게 달려가 물티슈와 냅킨을 가져왔다. 아이가 흘렸지만, 어른이 닦았다. 아이의 실수나 잘못은 관대하게 받아들여진다. 심지어 범죄도 성인범죄자와 다르게 처벌 받는다. 아이에게는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책임지기를 회피하는 어른들도 많다.


아이는 순수하다. 다른 이들의 상황을 헤아리거나 배려하지 못한 채 인간의 타고난 본성대로 산다는 말이다. 아이는 이기적이다. 교육 받지 못하면, 아이는 자기 먹거리를 나누지 않는다. 부모가 나눠먹는 행위를 칭찬하지 않거나, 이기적인 행동마저 귀여워만 한다면, 배려할 줄 모르는 어른으로 자라난다. 이타적 행위와는 거리가 먼 어른들이 부지기수다. 아쉬운 일이다.


1) 어른은 참을 줄 안다. 덥거나 배고프다고 짜증을 입에 담는다면, 참을성이 없는 것이다. 순간적인 충동에 지갑을 열었다가 이튿날에 후회한다면 신중함과 더불어 참을성을 키워야 한다. 새로 시작한 일이 힘들다고 하루 만에 관둔다면 둘 중 하나다. 참을성이 없거나 그 일이 정말 맞지 않거나.


애인이 헤어지자고 했다고 집에다 불을 지른다면, 참을성 여부를 떠난 미친 짓이지만, 핵심 원인은 참을성의 부재다. 핸드폰을 잠시도 내려놓지 못하는 어른들이 많은데, 앞으로 참을성이 더욱 희소해질까 걱정이다. 부모가 되면 그나마 좀 더 어른이 된다. 아이 앞에서 “왜 이렇게 더워, 짜증 나”라고 말하는 20대는 있어도, 그런 엄마들은 드물다.   


2) 어른은 책임질 줄 안다. 성숙한 어른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의식하고, 소임을 완수하려고 애쓴다. 지각 없는 부모, 능력 없는 상사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지만, 책임감이 없는 부모와 상사는 용납하기 힘들다. 모두에게 불행을 부르기 때문이다.


책임지기는 일상에서 연습할 수 있다. 주도적으로 선택하기는 좋은 연습이다. 연인과의 데이트 코스를 계획하고 선택하는 일, 하다못해 함께 관람할 영화를 선택하는 일도 책임을 지는 훈련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상대방의 원성을 살 위험과 실수할 가능성에 직면할 용기가 선택을 이끈다. 이러한 과정 자체가 어른이 되려는 노력이다.


3) 어른은 남들을 배려할 줄 안다. 다른 이들의 형편에 무감한 채로 자신의 기쁨과 고통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어른이 아니다. 감정 표현이 덤덤한 어른은 있어도 타자에 무관심한 채로 성숙하기란 힘들다. 성숙한 사람들은 많이 듣고, 적게 말한다. 말을 하더라도 타인의 관심사에 맞춘다. 배려는 성숙의 가장 확실한 표지다.


순수한 선의 만으로는 진정한 배려가 될 수 없다. 성숙한 배려는 (나의 마음 편함이 아니라) 상대의 원함에 맞출 줄 아는 인간이해로부터 나온다!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가 즐거워하면서 또는 기꺼워하면서 대답할 질문 하나를 묻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이타심이나 배려심이 있는가를 자문해야 한다는 표지다.


어른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하소연을 한다. “어른 되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에게 의지나 열망이 엿보이면 이렇게 대답한다. “맞습니다. 성숙은 손쉽게 얻어지지 않아요. 지름길은 없지만, 희소식도 있습니다. 어른 되기의 힘겨움은 어른이 되지 않은 채로 지내면서 만나는 고통보다는 덜할 거예요. 지금 당신이 겪는 많은 고통들이 미성숙에서 비롯된 문제들이니까요.”


인생살이는 종종 기쁨도 선사하지만, 만만치 않은 순간도 많다. 아이와 같은 태도로는 행복을 구가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어른이기를 바란다. 해마다 성숙하기를 꿈꾼다. 노력을 해야 하고,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숙하고 싶다. 미성숙한 사람들의 눈빛에는 종종 불안감이 깃든다. 자신감이 없어서 행동이나 선택이 오락가락 한다. 기본적인 배려조차 못할 때가 많아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반면, 성숙한 어른들은 고상하고 그윽하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어른들만이 진정한 자유와 공헌의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이 나를 추동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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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성과와 행복을 높이는 비결


1.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일은 가능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시에 책을 읽기는 불가능하다. 멀티태스킹은 신체적 활동과 정신의 작용 사이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의력을 요구하는 두 가지 일은 동시에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업무는 정신적 사고나 주의력을 요한다. 지식근로자들이 자신의 업무를 멀티태스킹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컴퓨터의 멀티태스킹 기능도 여러 창을 띄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 작업을 하려면 해당 창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그때 다른 창은 비활성화된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멀티태스킹이 아니라 스위칭(재빠른 바꾸기)이라 불러야 한다. 나는 삶의 질을 높이고 싶을 때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한다. 멀티태스킹이든 스위칭이든, 세 가지를 놓치기 때문이다. 집중력, 친밀함 그리고 행복!


2.
멀티태스킹은 우리를 기만한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기에 자칫 생산적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착각이다. 생산적인 방식이 아니라 산만한 방식일 뿐! 드러커를 비롯한 수많은 전문가들이 ‘집중’이야말로 생산력을 높이는 핵심 역량이라고 강조했다. 멀티태스킹은 효율을 넘어 효과성과 삶의 질을 추구하려는 이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집중력을 앗아가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집중력을 익히지 못한 이들에게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두 가지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생산성이 정말 시시하다는 사실과 생산성이 엄청나게 높아질 가능성이 남았다는 사실!


3.
한가위 연휴 마지막 날, 다섯 명의 가족이 카페에 왔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정면으로 이는 테이블에 앉은 덕분에 자연스레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남자와 아이 그리고 여자 셋이었다. 여자는 장모님, 아내, 처제였다. 아이는 남자 품안에 엎드린 채로 잠을 잤다. 성인 어른 넷은 한동안 자신의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대화는 없었다. 10분쯤 지나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몸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머물렀다. 물을 마시러 오가는 사이에 슬쩍 장모님의 핸드폰을 보았다. 화면에는 포털사이트의 프로야구 순위 목록이 있었다. 요즘에는 같은 사무실에서도 카톡으로 업무를 주고받는다는데, 이들이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지는 않았다. 카페에 머무는 동안 핸드폰을 보는 시간이 8할이었고, 대화는 2할 정도였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함(잦은 스위칭)은 대화를 방해한다. 


깊은 관계가 선사하는 친밀함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여러 카톡창을 잽싸게 들락거리며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친밀함인 줄 안다. 매튜 켈리는 친밀함의 7단계를 제시하면서 날씨를 묻는 진부한 관계를 1단계, 사실을 공유하는 관계를 2단계로 보았다. 반면,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는 관계는 3단계다. 사실의 교환은 안전하지만, 의견의 교환은 위험할 수 있다. 의견이란 서로 다르기 마련이니까. 의견 교환 없이는 친밀함도 요원하다.


단계를 뛰어넘어 친밀함의 7단계를 살펴보자.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소원을 이해하여, 상대가 소원을 이뤄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격려하고 돕는 관계가 7단계다. 스위칭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면, 격려하고 돕기는커녕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기조차 힘들다. 공감하고 지지하는 일은 위대한 관계다. 그만큼 관심과 주의 그리고 노력을 요한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에 휘둘리기 십상이고, 정보화 시대는 점점 더 우리의 집중력을 앗아가고 있으니.


4.
행복이란, 한 번에 하나의 일에만 몰입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다시 말하건대, 행복은 ‘지금 무슨 일을 하는가’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느냐’에 좌우된다. 최근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들이 이를 증명하는 연구 결과도 내놓았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만 붙들고 산다면, 당신의 인생 앞에 방황과 모색이 펼쳐질 것이다. (방황과 모색은 필요하고 어떤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방황과 모색만 있는 인생은 괴롭고 힘들다.)


‘지금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답하고, 그 일에 집중하라. 이것이 성과와 기쁨을 얻는 최고의 비결이다. 마치 다른 비결은 필요 없다는 듯이 한 번에 하나의 일만 수행하라. 정신이 산만해져도 괜찮다. 누구나 자연스럽게 집중하는 사람은 없다. 저만치 주의력이 달아나는 게 보인다면, 다시 주의를 불러들이면 그만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책상에서의 명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체험하다가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 집중의 삶을 산다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분별하는 감각도 키워진다.


5.

나는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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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은 커피 맛이 준수하다. 빵도 맛나다. 오늘도 마늘빵과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빵 접시는 비워졌고, 커피는 남았다. 식어도 맛난 커피다. 아껴마시던 중 날파리 한 마리가 커피 잔 안으로 날아들어갔다. 얼른 잔을 들었지만, 날파리가 커피에 빠졌다. 이미 젖은 날개의 안간힘으로 작은 동심원을 그리는 모습이 처량하기도 괘씸하기도 했다. 이런...!! 커피는 포기해야 했다.


아쉬움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럴 시간에 책 한 자라도 더 읽거나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었다. 하루를 오롯이 생산적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카페에 앉아 일하는 시간만큼은 불처럼 일하는 나다. 집중하여 일하다가 나도 모르게 커피를 마셨다. 두 모금째 마시다가 불현듯 날파리가 떠올랐다. '으악 날파리!' 나는 두 모금째 마셔 입 안에 머물던 커피를 잔에다 뱉어냈다. 두 눈 뜨고 초파리를 찾았지만, 녀석은 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치워야지'라고 생각했다가 벌어진 참사다. 우연이 빚어낸 소소한 일상이지만, 카페에서 초파리를 마신 남자는 의미심장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점심 약속 장소가 종로이기에, '오늘 반디앤루니스에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미 영업 종료일이 지났구나!'


남자는 9월 13일에 영업이 종료된다는 얘길 지난 달에 들었다. 남자에겐 아련한 추억이 있는 장소였기에 '시간 되면 가 봐야지' 했었다. 시간이 나지는 않았고 꼭 가야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남자는 자신의 미루는 습관을 바꾸고 싶었다. 유사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주가 추석 명절이었다. 고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차' 싶은 순간이 있었다. 명절 직전에 날아온 신문에서 "답답한 고속도로, 우회도로 안내" 기사를 가위로 오려두었는데, 가져오지 않은 게다. '나중에 읽자'는 생각으로 훑어보지도 않았다. 길지는 않다고 해도, 기사를 오려내고 챙겨둔 시간이 무용지물이 됐다. 다행하게도 막히지 않은 시간대를 선택하여 달렸기에 정체 구간은 없었지만, 실행력 제로의 이 남자에게는 이 또한 교훈이었다. 휴게소에서 몇 마디를 기록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미뤄왔던가. 무언가를 지금 당장 한다면, 내 삶이 바뀔 것이다. '언젠가' 읽을 거리를 위해 '현재'를 투자해 스크랩을 했는데, 정작 읽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그 때 투자한 '현재'의 시간이 아깝다. 미래를 대비한 시간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저 내가 놓쳐버린 시간이 되고 말았다. 준비는 중요하지만, 그 준비 역시 지금 당장 해야 한다.


좋은 결실을 위한 준비는 필요하지만, 준비가 미루기를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 나처럼 '아직은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준비만 하거나, 언젠가 좋은 때를 기약하며 미루기에 빠져들고 마는 이들에게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리스트 같은 것들도 지금 당장 해야 할 리스트로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닐까?"


반디앤루니스 방문이야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고, 우회도로 기사 스크랩을 챙기지 않았다고 해서 낭패를 본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교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일도 지금 당장 하지 않고, 미루고 미루다가 기회를 놓치곤 했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나부터가 달라져야 했다. 지혜가 '타이밍'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 적시에 하지 않으면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경우도 많다. 


무엇보다 결국 시간 부족으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못하게 될 때도 있다. 언젠가 나의 버킷 리스트를 보면서, 내 능력의 한계를 아쉬워할지언정 '진작에 시도했어야 했는데' 라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초파리, 스크랩한 우회도로 기사, 이미 문을 닫은 반디앤루니스 종로점이 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한다. "무언가 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하라!"


"나는 무슨 일이든 당장 하는 걸 좋아했다." 괴테의 말이다.

괴테처럼 빠른 실행력의 소유자로 살고 싶다.

이것만큼은 해내고야 말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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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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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도 2016.09.20 22: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당장하는 빠른 실행력의 소유자로 살기, 화이팅 입니다!

  2. 2016.09.23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