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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41명의 작가를 말하다

카잔 2013. 11. 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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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41명의 작가를 말하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작가의 얼굴>을 읽고

 

 

거의 모든 국민들이 이름을 아는 비평가가, 한국에도 있을까요? 독일인 98%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라는 문학평론가의 이름을 안다고 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을 아는 비율이 저리도 높다니요! 우리의 경우엔 문화비평, 예술비평을 모두 합쳐 김현, 김우창, 진중권, 고종석, 강준만 등이 떠오르지만 그에 견줄 만한 스타성은 아니겠지요.

 

그의 명성은 긴 생애 덕분이기도 하지만(1920년생이거든요), 오랫동안 주요 매체에 문학평론을 기고함으로 입지를 굳혀왔고(1960~88), 무엇보다 독일 공영방송국에서 14년 동안이나 <문학 4중주>라는 최장수 서평 프로그램을 진행(1988~2001)한 결실입니다. 그 방송을 통해 폭넓은 시청자들을 문학 시장에 끌어들엿거든요.

 

스타평론가를 넘어 ‘문학의 교황’이라고 불리는 그의 성공을, 역자는 비평가로서의 탄탄한 기본 실력과 정직함으로 설명합니다.

 

“라이히라니츠키는 ‘평론가의 첫째 의무는 정직함’이며, ‘명료함은 예의’라고 정리한다. 그가 어느 작가에 대해 말한다면, 사랑하거나 싫어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 중립적인 평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중용은 아마도 그와 가장 거리가 먼 덕목이리라. 세련된 전문용어나 사려 깊은 미사여구로 애매모호하게 포장하는 법도 없다. 어떤 작가, 어떤 작품에 대해서건 자신이 판단하는 것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표현한다.”

 

지나친 대중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비난도 많았습니다. 교황의 말을 직접 들어보시죠.

 

“<문학 4중주>에는 비난도 많이 쏟아졌다.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이 방송이 진부하고 대중에 영합하며 늘 피상적이어서, 무엇 하나 제대로 규명하기는커녕 너무 단순화한다는 것이었다. 전부 다 지당한 비난들이었다. 75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매회 다섯 권씩 거론했으니, 각 권당 평균 14분 내지 15분이 할당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한때 저자와 친했던 작가 귄터 그라스도 이러한 비난을 던지는 인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선택이 불가피했음을 역설합니다.

 

“귄터 그라스는 우리가 문예비평을 통속화했다며 나를 비난했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는 비평을 상당히 대중화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많은 것들은 통속화하지 않고는 대중화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는 문예비평가로서 우리의 포부를 전부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그의 이력이 <문학 4중주>라는 방송 프로그램뿐이었다면, 나는 이러한 주장을 변명이라 여길 겁니다. 그는 스타이기 이전에 성실한 전문가였습니다. 방송을 맡기 전까지는 저서와 칼럼으로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꾸준히 쌓았으니까요. 스스로도 이런 당부를 했더군요.

 

“이 프로그램 덕분에 내 인생의 한 단락이 많은 경험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나의 직업적 성과를 단지 <문학 4중주>만 가지고 판단하려는 분이 있다면, 내겐 너무나 부당한 처사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여전히 나의 문학 이야기들을 신문이나 잡지, 그리고 내 책들에게서 찾아주시길 당부한다.”

 

국내에는 그의 책이 자서전 <사로잡힌 영혼>과 <작가의 얼굴>만이 번역되었다는 게 아쉽지만, 문학을 좋아한다면 특히나 문학비평을 즐겨 읽는다면 그가 쓴 <작가의 얼굴>은 구미가 당기는 책이겠지요. <작가의 얼굴>은 출판사 ‘씨앗을뿌리는사람’에서 2004년에 출간한 <내가 읽은 책과 그림>을 손보아 재출간한 책입니다.

 

내용은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라는 부제대로 솔직해서 통쾌한, 예리해서 명료한 작가론을 담았습니다. 대부분이 독일 작가들인데, 리온 포이히트방거, 프란츠 베르펠, 리카르다 후흐, 에두아르트 폰 카이절링 등은 낯선 작가였습니다. 한국에 번역 안 된 작가들도 있지만, 교황의 설명을 읽는 것만으로도 유익하다는 게 책의 장점입니다.

 

저자가 좋아하는 작가라면, 안톤 체호프처럼 비유럽권의 작가를 다루기도 합니다. 그의 취향은 맹목적으로 보이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유를 덧붙입니다. 덕분에 신뢰가 느끼며 읽었고요.

 

“체호프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처럼- 이 땅에 살았던 위대한 작가들 축에도 끼지 못한다. 하지만 무척이나 따뜻하고 호감 가는 작가로 꼽힐지는 모르겠다. 나는 체호프를 사랑하고, 아주 오래 전부터 그에 대한 흠모를 쌓아왔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겠다. (중략) 그에겐 피조물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고골이 사회 고발자였다면 톨스토이는 재판관이었고, 도스토옙스키가 스스로 피고인의 자리에 섰다면 체호프는 그저 증인의 역할을 맡았다. 그는 결코 작중인물 위에 군림한 적이 없으며, 다만 항상 그들 곁에 서 있었다. 러시아의 다른 작가들이 목청 높여 신음하고 절규할 때, 그는 그저 나직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지구의 절반이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혹시 비평가의 존재 이유 하나를 발견하셨는지요? 문학 작품을 읽고 나면, 아마추어 독자인 우리에게도 두어 가지 소견이 떠오르는데, 그걸 나눌 만한 벗이 문학비평가입니다. 그들은 문학을, 특히 순수문학을 꾸준히 읽어가는 사람들이지만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들의 전문성에 휘둘릴 필요 없이 그저 의견을 나눈다고 생각하면 되고요.

 

개인적으로 제게 <작가의 얼굴>은 ‘알프레트 폴가’와 같은 비평가를 알게 되어 반가운 책이었습니다. 그에 관한 서술은 제가 갖고 싶은 비평적 역량이거든요.

 

“폴가는 그는 투사나 논객이기보다는 관찰자였다. 집요함과 공격성 대신 온유와 진심이 발휘하는 힘에 기댔다. 급진주의를 불신했고, 극단적인 것에는 의심을 가졌다. 세상을 변화시키려하기보다는 다만 기술하고자 했다. 삶에 대한 수굿한 긍정과 신랄함, 매력적인 상냥함과 우수가 오스트리아인 특유의 절충을 이루고 있다. 독자에게 친절하게 다가가기를 의무로 여기고 모호하고 불명확한 표현은 예의가 아니라 여겼다. 그는 구체적인 것에 대해 논하기를 선호해서 개별 작품과 연출, 배우들과 감독들을 개별 분석하는데 집중했다.”

 

제목에 대한 설명으로 글을 맺으렵니다. 마르셀은 1967년부터 작가의 초상화를 모아왔고, 지금은 그 양이 꽤나 많아졌나 봅니다. 책에 언급한 작가 마흔 한 명의 초상화를 모두 책에 실어 둘 정도니까요. 문학의 교황이 써낸 작가론 뿐만 아니라 여러 화가들이 그린 작가들의 초상화를 살펴보는 재미까지 맛보는 책입니다. 작가의 얼굴! 책 제목, 잘 지었지요?

 

- 문학의 참모,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