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ook Story/책을 이야기하는 졸바

슬프고 외로운 어느 황혼

카잔 2013. 12. 10.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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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외로운 어느 황혼

- 필립 로스 <에브리맨> 문학동네

   

두 개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서며 손에 책 한 권을 들었습니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입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들었다가 빨간색 책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 작은 책을 고른 겁니다. 이미 절반 남짓을 읽은 터였기에 주요 내용은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나(every man) 죽는다는 불멸의 사실을 다룬 소설입니다.

 

결혼식에 어울리지 않는 주제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정작 나는 스스로의 선택에 만족하며 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런 글귀를 떠올리고 있었거든요. “많은 결혼식에 가서 춤을 추면 많은 장례식에 가서 울게 된다.” <인생수업>에 나오는 말인데, 이어지는 글마저 읽으시면, 비관의 메시지가 아닌 현실적인 위로로 읽힐 겁니다.

 

“많은 시작의 순간에 있었다면 그것들이 끝나는 순간에도 있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친구가 많다면 그만큼의 헤어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많은 실수를 했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산 것보다 좋은 것이다. 별에 이를 수 없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불행한 것은 이를 수 없는 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모두가 죽음을 맞는다는 경각심으로 시작한 글귀가 마지막 대목에서는 위로를 줍니다. <에브리맨>은 다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섬뜩하리만큼 적나라하게 한 남성의 쓸쓸한 죽음을 묘사합니다. 주인공의 장례식 장면으로부터 시작된 서사는 과거를 거슬러 올랐다가 다시 죽음으로 회귀합니다. 현실, 회상, 이야기가 절묘히 어우러진 구성입니다.

 

묘사는 에두르지 않습니다. 직설적입니다. 이를 테면,

 

매주 동지적인 명랑한 분위기에서 만났음에도, 대화는 어김없이 병과 건강 문제로 흘러갔다. 그 나이가 되면 그들의 개인 이력이란 의학적 이력과 똑같은 것이 되었으며, 의학적 정보교환이 다른 모든 일을 밀쳐냈다. "당은 어떤가요?" "혈압은 어때요?" "의사는 뭐래요?" "내 이웃 얘기는 들었나요? 간으로 퍼졌다는군요." (85)

 

육신은 녹아 없어지지만, 뼈는 지속된다. 내세를 믿지 않고, 신은 허구이며, 지금 이것이 자신의 유일한 삶이라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믿고 있는 사람에게 뼈는 유일한 위로였다. (176)

 

무덤으로 들어가는 흙이 바로 아버지의 몸 위에 쌓이는 것 같았다. 입을 메우고, 눈을 가리고, 콧구멍을 틀어막고, 귀를 닫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더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그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덮고, 아버지가 생명을 빨아들이는 통로를 차단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저 얼굴을 보아왔어. 내 아버지의 얼굴을 흙 속에 묻지 마! 그러나 그들은, 그 튼튼한 청년들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66)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니 한번쯤 죽음에 대해 생각한 중년 이상의 독자나 감수성이 뛰어나 죽음을 상상하기 쉬운 독자들에게, 섬뜩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책입니다. 위대한 순수문학의 힘입니다. 인류 보편의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우리에게 인생의 단면이나 실체를 보여주는 힘!

 

주인공은 마음에 들진 않지만, 미워하긴 힘듭니다. 그는 두 번이나 이혼했습니다. 특히 젊은 여인들과 놀아나느라 두 번째 아내이자 현명한 내조자였던 피비를 실망시킨 대목에선 화가 났습니다. 피비가 싫어져서 헤어진 게 아니라, 무절제한 욕망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가는 장면을 묘사한 작가의 통찰에 놀라면서도, 그의 어리석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인과응보입니다. 그의 만년은 외롭고 쓸쓸합니다. 첫 번째 아내로부터 낳은 두 명의 아들은 여전히 그를 미워하기에, 그는 자신이 아픈 데도 전화 연락조차 못합니다. 아들들이 고소해할까 두렵거든요. (그도 싫지만, 용서와 이해와는 담을 쌓은 그의 두 아들은 더 싫습니다.) 이혼이 주는 삶의 고통을 그려낸 장면(98~99쪽)에선 마음이 아팠습니다.

 

두 아들의 입장에서 읊어대는 가족사에 저항하려면 상당한 전투성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이제 그의 무기고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전투성은 거대한 슬픔으로 바뀌었다. 긴 저녁의 외로움 때문에 아들에게 전화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고 나면, 그 뒤에는 늘 슬픔이 찾아왔다. 슬프고 기진맥진했다. (98쪽)

 

필립 로스는 미국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 코맥 매카시와 함께 필립 로스를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꼽았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노벨문학상에 근접해 있다는 생각이고요. 삶의 진실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2003년도 수상자인 ‘존 쿳시’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가입니다.

 

책의 원제는 ‘every man 모든 사람’이 아니라 ‘Everyman 보통 사람’입니다. 소설 속에서도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적 성실함에선 그와 비슷하지만, 자녀들을 사랑하고 가정을 지켰다는 점에서는 아버지가 주인공보다 훨씬 훌륭합니다. 아버지는 보석상을 운영하셨는데, 띄어쓰기를 하고 안 하고에서 오는 중의적 표현이 묘한 울림을 남깁니다.

 

“그는 사업체를 자기 이름이 아닌 ‘에브리맨(everyman) 보석상’이라고 불렀다. 이 가게는 그가 일흔셋의 나이에 도매상에 재고를 팔고 은퇴할 때까지 그의 충실한 고객이 된 유니언 카운티 전역의 보통 사람 무리에게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63)

 

불륜을 일삼았던 주인공이 보통사람인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불륜 없는 세상’을 믿을 만큼 순진해서가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보낸 이들도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은퇴하지만 않았더라면, 필립 로스가 아름다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도 써 주길 바랄 겁니다. 평생 한 여인과 살아왔고, 아버지를 존경하는 아들을 둔 주인공의 친형 ‘하위’를 모델 삼아도 좋겠네요.

 

<에브리맨>의 주인공은 젊은 날에 발산한 욕정으로 인해 쓸쓸한 노년을 보냅니다. (여성편력으로 유명한 작가의 경험도 영향을 미쳤겠지요.) 두 번째 부인과 헤어질 때,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낸시가 슬픔에 잠겼을 때, 그는 딸을 위로합니다.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83쪽)” 훗날 그가 죽고서, 낸시가 울먹이며 아버지에게 그 말을 돌려주지요.

 

“현실을 다시 만들 수는 없어요.” (13쪽)

 

만회 가능한 실수도 있지만,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잘못도 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이기심과 욕정을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경각심만 갖기에는, <에브리맨>은 그보다 ‘큰 소설’입니다. 이기심과 여성편력보다 열 배는 더 보편적인 주제, ‘죽음’을 다뤘으니까요. 핵심 메시지를 하나만 고른다면, 아래의 문장이 아닐까요?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162쪽)

 

두 문장만 달랑 덜어오니, 너무 과격하고 비약적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부가 설명이 될 만한 문장을 적어 봅니다. 위의 말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 대목입니다.

 

모두들 한 번쯤은 백년이 지나면 지구상에 살아있을 사람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엄청난 힘이 이곳을 깨끗이 휩쓸어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백년이 아니라 며칠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암살의 표적이 된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174쪽)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겠지요? 잠깐 왔다 가는 게 인생이고, 누구나 결국 잊혀간다는 메시지일 거라 생각하면 비약일까요?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내가 잊은 건지도 모르겠군요. 그의 이름은 몰라도 됩니다. 젊은 날의 불찰들이 모여 노년의 회한을 만들어낸 장면들 역시 잊어도 됩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죽는다는 사실을, 명.랑.하게 기억한다면!

 

- ‘언젠가’가 아주 더디 오기를,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