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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겸손과 가짜 배려

카잔 2014. 1. 7. 08:02

 

 

가짜 겸손과 가짜 배려

 

- 김승옥의 단편 <차나 한 잔>를 읽고 

 

 

친구의 헤어스타일이 별로인 날, 그걸 콕 집어 말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친구가 무안해할 테니 아무말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누가 친구를 배려한 것일까요? 방금 말씀드린 정보만으로는 어느 쪽이 배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도와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이 배려이니, 배려라면 그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도움이 되려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여 그것을 주어야 합니다.

 

친구가 무엇을 원하는가에 진짜 배려인지의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옷매무새나 스타일이 어색할 때, 그것을 고칠 수 있도록 말해 주기를 원하는 친구라면 슬쩍 귀띔해 주면 되고, 모른 척 해 주기를 원하는 친구라면 넘어가 주어야 배려입니다. 친구의 원함보다는 자기 마음이 불편해질까 하여, 옳은 소리를 못하는 것은 사실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지요. 상대는 자신이 고칠 수 있도록 말해 주기를 바란다면 말이죠.

 

진짜 배려는 초점이 나의 '마음 편함'에 있지 않고, '상대의 유익'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듯 하지만 결국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가짜 배려입니다. 사람들은 공감이나 해법 중 둘 중 하나를 먼저 원하는데, 가짜 배려는 사람들이 무얼 원하는 지에는 무관심하고 그저 자신의 기질대로 혹은 자기 편한대로 행동하고서 그걸 상대방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가짜 배려가 있는가 하면, 가짜 겸손도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예의를 갖춘다는 명목으로 겉으로만 "제가 어떻게 그걸! 저는 못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가짜 겸손입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인데, 어떤 이들은 존중하지는 않으면서 자기만 내세우지 않으면 겸손인 줄 압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지요.

 

김승옥의 단편 <차나 한 잔>은 가짜 배려와 가짜 겸손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한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일간신문 네 컷짜리 시사만화를 그리며 삽니다. "어쩌다가"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만화를 아주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만화를 몇 군데로 보내고 있으니 그리 숙맥도 아닌 남자입니다.

 

남자의 만화가 신문에 실리지 않는 날이 많아지면서, 남자는 일자리를 잃을까 불안해 합니다. 어느 날, 신문사 문화부장이 만화를 건네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차나 한 잔 하러 가실까요?" 그리고 둘은 다방으로 향합니다. 이날, 남자는 신문사에서 잘립니다. 하지만 문화부장은 "이런저런 사유로 더 이상 만화를 부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정공법 대신 남자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저는 이 형을 두둔했습니다만...... 국장님도 이 형의 만화에는 항상 칭찬을 하셨댔는네...... 그...... 독자들이 자꾸 투서를......"

"아니 사실 재미가 없었지요. 저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독자인 나도 문화부장의 친절과 배려가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김승옥 선생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섬세하면서도 확실하게 전합니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문화부장이 남자를 얼마나 겉으로만 배려하는지, 속으로는 남자를 얼마나 무시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제게는 이 단편의 백미라고 여겨지는 대목이라 좀 길지만 옮겨 보겠습니다.

 

<"사람을 웃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이 형 무슨 비결 같은 게 없습니까? 만화를 그리는데 말예요. 말하자면 만화 그리는 걸 배울 때 이렇게 하면 사람이 웃는다, 라는 법칙 같은 게 있어요?" 문화부장은 마치 아주 무식한 사람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남자는 문화부장이 지금 무식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이쪽을 무식한 자로 취급하고 나서 자기가 이 무식한 자의 수준만큼 내려가 주겠다는 의도임이 틀림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는 문화부장이 괘씸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문화부장에게 거뜬히 대답할 요량으로, "아시겠지만"이라는 말로 운을 띄고서 사람이 웃게 되는 과정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말하려 했지만, 문화부장은 "도대체 누굴 보고 무슨 강의를 시작할 작정이냐는 듯이 얼른 그의 말을 가로채" 버립니다. 그리고 괘씸하다는 투로 가르치는 듯이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문화부장의 가짜 겸손, 가짜 배려가 절묘하게 탄로나는 대목입니다.

 

다방에서 나와 남자는 길을 걷다 바쁘게 지나가는 카메라맨을 만납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서, 남자에게 "다음에 좀 봅시다"라는 말을 건네며 지나갑니다. 작가는 남자의 내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남자는 그네들의 말투를 알고 있었다. 저 도회지의 어법을, 그리고 그는 항상 그 어법에 잘 속았었다. 방금 카메라맨이 말한 "다음에 좀 봅시다"는, 그 뜻을 따라서 정확히 표기하자면 "그럼 다음에 또 만납시다. 안녕히 가십시오"이다.>

 

남자는 계단에서 또 다른 이를 만납니다. 그는 방금 해고당한 남자에게 "요즘 재미가 좋으시다더군요"라고 인사합니다. 상대의 내막을 모르면서도 반갑게 인사하다 생긴 헤프닝입니다. 우리네 모습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그 사람은 지금의 남자에게는 터무니없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남자는 이런 서울식의 인사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제가 보기에, <차나 한 잔>은 한 가장의 고단한 삶을 다룬 이야기도, 예술인들의 힘겨운 실존을 다룬 것도 아닙니다. 관계의 피상성과 그것이 주는 폐해를 담은 소설입니다. 작가는 '차나 한 잔', "다음에 좀 봅시다" 라는 말 속에 담긴 진정성을 캐묻습니다. 그런 말들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고당한 날 밤 남자는 선배 작가 '김 선생'과 술을 마시면서, 배려는 추파라고 토로합니다.

 

"차나 한 잔, 그것은 일종의 추파다, 아시겠습니까, 김 선생님?" 남자는 이미 혀가 잘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셨습니다. "차나 한 잔, 그것은 이 회색빛 도시의 따뜻한 비극이다, 아시겠습니까? 김 선생님, 해고시키면서 차라도 한 잔 나누는 이 인정,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미담...... 말입니다."

 

'따뜻한 비극'이란 표현이 가슴을 칩니다.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따뜻함'의 중요성일까요, 그런 말들이 초래하는 '비극'적 결과일까요? 나는 '따뜻한 비극'의 방점은 비.극.에 있다고 봅니다. 따뜻하지만 우리는 헷갈리게 만드는 가짜 배려보다는, 차갑지만 분명하게 표현하는 사무적 어법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를 진정 배려할 때가 있으니까요.

 

2012년은 김승옥 작가의 등단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작가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천만 명의 서울 사람과 어울려 사는 최선의 미덕은 싫은 때는 싫다고 말하는 것"이라며 "서울에서의 선(善)이란 자기 의견을 솔직히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솔직한 싫음'을 표현할 때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는 일흔이 넘은 작가가 건강을 더욱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솔직한 NO'을 말할 때에 생겨나는 역학관계와 그것을 헤쳐 가는 지혜를 또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주면 좋겠습니다.

 

김승옥 선생의 단편을 읽다보면, 산업화된 도시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고 빼앗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에게서 관계의 진정성을 빼앗아가는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이기도 하고, 또한 공동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시대 탓이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개인들의 선한 의지가 어느 정도인가에도 달려 있겠지요.

 

<차나 한 잔>이 출간되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의 인간관계는 어떠할까요? '차나 한 잔'이 "커피나 한 잔"으로 바뀌었을 뿐, 관계의 피상성은 여전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게 뭐 어때서?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냐? 라고, 누군가가 반문한다면... 나는 슬플 것 같습니다. 관계란, 이렇게 얇고 임시적인 것에서 얼마든지 깊고 진한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는, 피상적인 관계들이, 언제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 '김승옥 읽기'가 피상적일까 염려하는,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