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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주의 시대,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카잔 2014. 3. 6. 09:14

허무주의 시대,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 휴버트 드레이퍼스 <모든 것은 빛난다> 사월의책

 

 

1.

책의 부제는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 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다. 부제엔 진단과 처방이 모두 담겼다. 책을 함께 쓴 휴버트 드레이퍼스와 숀 켈리는 이 시대의 특징을 ‘허무주의’로 진단하고서 “삶의 의미를 되찾아라”는 처방을 내렸다. 처방전의 제조는 ‘서양 고전의 세계’에서 이뤄졌다.

 

저자들이 다룬 ‘서양 고전’이란 문학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이아>. 단테의 <신곡> 그리고 허먼 멜빌의 <모비 딕> 등의 고전 문학!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세 부류의 사람들, 고대 그리스인, 중세인, 근대인들이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았는지 조사하기 위해 문학을 살핀다. 왜 문학인가? 문학에게 그럴 힘이 있는가?

 

르네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세르반테스, 스탕달, 플로베르,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을 탐구하여 인간의 욕망 체계를 설명한 책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욕망하는 게 아니라, 어떤 대상을 통해 욕망을 발견한다. 주체와 욕망 사이에 욕망의 중개자가 있는 셈이다.)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는 호메로스에서 버지니아 울프에 이르는 3천년 서양 문학의 역사를 일갈하고서 문학의 역사는 리얼리즘(현실 모방)의 발전사임을 역설한 책이다. 그리스 최고(崔古)의 고전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이고, 그리스 최고(最高)의 지성 플라톤의 저술은 문학의 형식을 빌어 소크라테스의 지혜를 담아냈다.

 

인생의 본질을 다룬 저서들과 인류 문명의 역사를 다룬 명저들이 고금의 문학 작품을 탐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학이 현실의 재현을 추구하는 예술이고, 현실을 반영하기에 적합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당대의 현실이 어떠했는지를 문학이 보여준다는 말이다. 요컨대, 문학은 인류 지성의 보고요, 인문학의 중심이다.

 

2.

저자들은 허무주의의 해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제대로 알았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문제도 정확히 인식했다. 저들의 문제의식은 ‘허무주의’다. 고전 문학을 탐구한 목적도 허무주의 시대에 접어들며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함이다. 저자들은 현대, 중세, 고대에 쓰인 문학 작품을 통해 그 세계가 어떻게 삶의 의미를 누렸는지 살핀다.

 

중세는 태어나면서부터 종교가 결정되는 유일신의 세계다.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중세인이라면 경험하지 않았을 힘겨움을 겪는다. 현대는 어떤 신을 믿을 것인지에 대한 자유, 아니 신을 믿지 않을 자유까지 부여했다. 현대인들은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서 진리와 의미를 찾기 위해 방황한다. 자유의 확대가 불러온 선택의 어려움, 이것이 근대인들의 딜레마다.

 

“인간을 떠받쳐주는 신의 신성한 계획이 없다면, 도대체 어떤 기초 위에서 실존적 선택을 내린단 말인가?”

 

자유의지는 또 다른 종류의 해악도 불렀다. 근대인들은 개인의 의지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의지를 지나치게 신뢰한 예로, 저자들은 <끝없는 농담>의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를 들었다. 개인의 의지력을 지나치게 신뢰했다는 점에서 그는 니체의 후예다. 니체는 우리가 스스로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다.

 

니체가 실제로 강인한 영혼을 지녔다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니체와 월러스의 제안은 매력적이지만, 달성하기 힘든 수준의 조언이다. 불가능한 수준의 조언인데도, 당연하거나 쉽사리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살아가면 허무주의와 무기력에 빠지기 십상이다. 선택의 힘겨움과 무기력감을 느낀다는 것이 현대인들의 고뇌다.

 

3.

저자들은 독자를 호메로스의 시대로 데려간다. (그들이 타임머신의 조종수가 아닌 이상 어찌 우리를 과거로 데려가겠는가. 그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탐구하여 그리스인들이 어떠한 세계관을 지니고 살았는지, 그 세계관은 그리스인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데 무엇을 공헌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다.)

 

호메로스가 살았던 세계는 ‘신들로 가득한 세상’ 즉 다신주의를 믿던 세계였다. 그들은 모든 상황을 신들의 보호나 처벌로 해석했다. <오뒷세이아>의 결말 부분인 22권에는 페넬로페에게 구혼한 남자들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오디세우스에게 무더기로 창을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창은 빗나갔고 오디세우스는 목숨을 건졌다. 호메로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여섯 명의 구혼자들이 맞히기를 열망하며 창을 힘껏 던졌다. 그러나 모두 목표물을 벗어났다. 아테네가 창들을 다 빗나가게 했다.” - <오뒷세이아> 제22권 255행

 

오디세우스의 생존은 행운인가, 신의 보살핌인가? 호메로스는 신의 은총으로 여겼다. 무신론자들은 호메로스와는 다르게 생각할 것이다. (운이 좋았다거나 혹은 저들의 실력이 형편없다거나.) 반면 기독교도를 비롯한 유신론자들은 신의 보호하심을 거론할 것이다. 저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운이 좋다는 것과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현상이다.”

 

인간 실존에는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통제 불가능한 어떤 사건이 나에게 바람직하게 돌아갔을 때, 행운이라 여기며 무심하게 반응하는 것이 나을까? 전능한 존재의 보호라 여기며 자발적인 감사를 느끼는 것이 적절한 반응일까? 저자들의 입장은 분명하다. “우리는 감사가 더 나은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이 서양문학사 속에서 찾아낸 감사의 달인들이 고대 그리스인이다. 그들은 경이로움과 감사에 사로잡혀 일상을 살았다. 그리스인들은 지속적인 경이감 속에서 세계를 붙잡고 있었다. 그들은 삶 속에서 어떤 바람직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놀라워하고 감사했다. 다음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호메로스의 세계에서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 인물에게 결함이 있다는 가장 확실한 표식이다.” (p.133)

 

그리스인들은 많은 신을 섬겼다. 일상 곳곳에 신이 존재했고 사물마다 관장하는 신이 있었다. 다양한 신들의 존재는 삶의 모순된 상황에서도 의미를 부여하고 감사를 느끼도록 도왔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오늘날에는 허무주의가 만연한 반면, 그리스인들은 행복한 다신주의자였다.

 

“눈먼 행운이 우리 삶의 과정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곧바로 우리 삶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허무주의적 생각으로 귀결된다.” (p.122)

 

4.

저자들은 단테의 『신곡』을 통해 중세 시대도 살핀다. 일신교가 삶의 의미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이어서 한 챕터를 할애하여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다. 멜빌의 세계관은 단테보다는 호메로스에 가깝다. 결국 저자들의 메시지는 다신주의를 통한 경이와 감사의 회복이고, 그것을 잘 구현한 작품이 『모비 딕』이다.

 

“우리는 모든 다신적 진리들을 당신 스스로 발견하도록 놓아둔다. 그런 진리들 속에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모든 즐거움과 슬픔을 맛보도록 하자.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의미를 선산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그 즐거움과 슬픔 속에 만족스럽게 머무르자.” (p.326)

 

마지막 챕터인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은 책의 실천적인 결론이다. 책의 메시지를 현대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법을 다뤘다. 일상 속에서 경이와 감사를 느끼는 ‘성스러운 순간’을 창조하는 비결을 제시했다. 실용서처럼 몇 가지의 팁을 제안한 것은 아니고 이론적 토대를 놓아주었다. ‘퓌시스, 포이에시스, 메타 포이에시스’라는 그리스어로.

 

퓌시스는 자연 내지 자연에 실재하는 것들을 부르는 그리스어다. (물리학 physics의 어원) 하지만 우리말의 자연(自然)과는 다른 개념이다. “퓌시스를 번역한다는 ‘반짝임’이라는 단어가 가장 가까울 것이다.” 성스러움은 일상 속에 반짝이듯이 등장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퓌시스다. 성스러운 순간은 갑자기 등장해서 우리를 사로잡고 다시 놓아준다는 말이다.

 

‘포이에시스’는 그리스어로 ‘창작’을 뜻한다. 저자에 따르면, 장인적인 창작 활동은 19세기까지 살아있었지만, 현대의 테크놀로지 시대에는 공격을 받고 있다. GPS를 예로 들어보자. GPS는 항해의 어려움을 덜어준다. 길 잃을 염려도 없다. 하지만 GPS는 내비게이션의 본래 뜻, 즉 항해라는 고귀한 기술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저자들은 이렇게 썼다.

 

“GPS가 우리 대신 운행을 하는 동안, 주변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최소한으로 줄어든다. 우리는 ‘여기서 우회전해야겠군’ 하는 정도만 알면 된다. (중략) 항로를 찾기 위한 분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곧 항해술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의미심장한 구별들에 대한 감각을 잃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무를 손수 톱으로 자르는 목수는 전기톱을 사용하는 목수보다 나무의 특성을 훨씬 잘 이해하며 나무를 경박한 마음으로 다루지 않는다. 저자들이 소개한 장인 목수 조지 스터트는 전통적인 기예가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나무는 기계의 먹잇감이 아니요, 무력한 희생물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무는 그것을 잘 달랠 줄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미묘한 덕을 허락하곤 했다. 마치 이해심 많은 친구와 함께 일하듯이 그런 장인과 협력해서 일했다.” (p.358)

 

저자들은 테크놀로지를 배척하지는 않았다. 다만 테크놀로지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래서 ‘메타 포이에시스’를 제안했다. 퓌시스, 포이에시스, 테크놀로지 가운데 하나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상황마다 필요한 것을 선택하여 발휘하라는 것이다. 무신론과 일신론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발휘하여 다신론적 접근을 하라고 제안했듯이.

 

5.

이 책이 내게 준 의미를 3가지만 정리해 본다. 첫째, 문학의 힘을 맛보았다.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문학은 인생의 의미와 인간의 본성 탐구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귀중한 보고다. 다신론, 일신론, 무신론의 세계가 어떠한지를 조사하기 위해 훌륭한 철학자인 저자가 문학의 세계를 연구했다는 점은 문학 예찬론자인 나로선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 니체의 한계를 다시 확인했다는 점도 의미 깊다. 버트런드 러셀은 니체의 사상이 “다윈이즘적 신조를 개인 간의 차이에만 적용”했다고 비판했다. <모든 것은 빛난다>를 통해 이해한 니체의 한계는, 니체는 우리가 그의 기획을 성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니체의 권면은 보통의 사람들에겐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점.

 

셋째, 가장 인상적인 점은 포이에시스의 의미다. “가치 있는 분야의 일들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의미심장한 차이를 구분할 줄 아는 기예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테크놀로지적인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길이다.” 허무주의 시대,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저자들은 감사와 경이의 회복, 즉 성스러움을 찾아내기 위해 장인적 태도로 기예를 개발하기를 제안한다.

 

와인에 관심을 갖고 맛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한 두 권의 책을 읽었더니, 입맛에 맞는 와인 한 잔으로도 진한 기쁨에 취할 수 있었다. GPS의 편리함을 취하면서도 운전 항해술이 녹슬지 않도록 애쓰기 시작하니 거리와 풍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커피에 관심을 가졌더니 카페에서의 차 한 잔의 여유에도 향기로운 즐거움이 깃들었다.

 

전문가는 디테일에 강한 사람이고, 마니아는 작은 차이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무감각했던 디테일에 눈뜨고, 작은 차이를 구분하여 감사할 줄 아는 힘이 성스러운 순간을 창조하는 비결이란 생각이 들었다. 와인이든, 나무든, 사랑하면 작은 차이를 구별하여 감동하게 될 테니! 일급의 전문가적 마니아 감각을 가지면 이렇게 말하게 될까? “모든 것은 빛난다.”

 

- 책을 분별하는 기예인, 조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