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어느 봄날의 오후

카잔 2014. 4. 2. 18:39

 

나는 뜻밖의 개인 시간을 사랑한다. 어느 봄날, 오후 일정 하나가 갑작스럽게 취소되어 내게 덩어리 시간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지나가던 행인이 내게 불쑥 5만원을 쥐어준다면, 이런 기분일까? 약속한 이와 함께하지 못함이 아쉽지만, 뜻밖의 자유 시간을 누리는 맛은 무척 달콤하다. 내 마음엔 두 개의 방이 존재한다. 아쉬움은 이곳, 설렘은 저곳, 이렇게 서로 다른 감정을 담아두기에 좋다. 하나의 병 속에 든 물과 기름처럼, 마음 속 두 감정을 모두 느끼면서도, 서로 다른 방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다. 몇 안 되는 내 장점 중 하나다.

 

여느 때 같으면 불쑥 주어진 시간에 연구실로 돌아가거나 인근 카페에 앉아서 일에 빠져든다.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포근한 봄 햇살과 알싸한 꽃내음이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향기 따라 기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안국역 3번 출구 앞 현대건설에서 서울중앙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계동 골목길을 걸었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젊음을 동경하기보다는 젊음과 동행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한 주철환 선생 탓일까, 하교하는 학생들 모습을 부럽게 쳐다보았다. 그네들의 싱그러운 젊음과 삼삼오오 어울려가는 우정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여전히 젊지만 저들의 싱그러움은 지났다. 내게도 단짝 친구가 있지만 저들처럼 매일 만나 떡볶이를 먹거나 어깨를 툭툭 쳐가며 자주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다.

 

계동길은 낭만적인 거리다. 2층 이상의 건물은 드물었다. 서울의 근대 모습을 간직한 집과 상점들이 많았다. 분식집, 백반집, 세탁소, 떡집, 카페 등 작은 상점들이 내 안의 그리움과 추억을 불러냈다. 그리움이 정겨움을, 정겨움이 따뜻함을 만들어내는 선순환 덕분에 나는 계동길을 황홀한 기분으로 걸었다. 매혹적인 카페와 상점도 나타났지만, 추억으로 손님을 유혹하는 가게도 많았다. 계동길이 무지 예뻐서 이 골목길을 매일 드나드는 서울고등학교 학생들이 부러웠다. 여행을 하다가 '아! 이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많지만, '아, 이 학교를 다녔었더라면...' 하는 생각은 처음이었다. 부러울 뿐, 녀석들을 미화할 생각은 없다.

 

5m 앞에 찌그러진 포카리스웨트 캔이 떨어졌다. 앞서 걷던 두 남학생 중 한 명이 길에다 버린 것이다. 나는 캔을 주웠다. 마치 태초부터 녀석이 캔을 버리기로 예정되었고, 뒤따르던 내가 그걸 줍기로 설정된 것 마냥 자연스러웠다. 여전히 느긋했지만 원래 속도보다는 조금 속력을 내어 걸었다. 30초 즈음 후, 나는 그들 곁에 섰다. "얘들아, 침 뱉지 말고", 나는 캔을 그네들에게 내밀었다. "이건 쓰레기통에 버려라." 내가 지닌 가장 부드러운 말투를 발휘했다. 나는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내던 중이었고, 녀석들의 오후 기분을 망칠 생각도 없었다.

 

서울중앙고등학교 정문에 다다랐다. 또 한 명의 학생이 캔을 찌그려 자기 신발 바닥에 덧신처럼 붙여 신고 걷다가 캔이 떨어졌다. 녀석은 줍지 않고 그냥 제 길을 갔는데, 또 포카리스웨트 캔이다.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사건을 목격한 수위 아저씨의 호통이 떨어졌다. "야, 너 이리 와!" 길을 가던 학생들이 뒤돌아섰고, 범인은 분위기에 억눌려 달려가 캔을 주웠다. 수위는 한 두 마디 잔소리를 보탰다. 성깔 있는 아저씨다. 나는 범인의 기분을 위해 마음으로 기도를 보냈다. 부디 기분 나빠하지 말기를! 우리는 살면서 불쾌한 상황을 만나지만 우리의 기분은 상황과는 별개로 결심과 마음에 달려 있음을 기억하시게.

 

중앙고 앞에서 창덕궁 쪽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북촌한옥마을로 가는 길은 내일 다시 와 볼 참이다. 창덕궁 옆길을 따라 걷다가 예쁜 카페에 들어왔다. 카페 마고. 와인 이름(샤토 마고) 같아서 관심을 가졌다가 내부의 단아한 분위기에 이끌렸다. 서른 전후로 보이는 청년이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를 무어라 부를까? 아저씨는 가당찮고 마땅한 언어가 없어서 총각이라 해야겠다.) 사람 좋은 인상의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음악도 내 마음을 춤추게 했다. 처음엔 클래식 선율이 나를 신사답게 만들더니, 지금은 재즈 선율이 나를 자유인으로 만든다. 경쾌한 베이스 소리 위에 기분 좋은 색소폰 소리가 날아다닌다. 졸졸졸, 귀를 즐겁게 하는 시냇가 디딤돌 위를 건너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다. 경쾌하지만 분주하지 않고, 밝지만 화려하지 않게.

 

1시간 동안 행복하게 머물다가 일어섰다. 고맙다, 카페 마고! 감사해요, 총각. 책상에는 노발리스의 『푸른 꽃』이 놓여 있었지만, 책을 읽지는 못했다. 분위기에 취했고, 시간의 매혹에 취했다. 귀갓길, 다시 스타벅스에 들렀다. 퇴근 시간대의 혼잡한 지하철을 피하고자 함이다. 두 시간 동안 일했다. 귀가하는 데에는 한 시간 이십 분이 걸렸다. 이동하는 내내, 노발리스의 『푸른 꽃』을 읽었다. 지하철이 또 하나의 행복한 시간을 선사한 셈이다. ‘멋진 한 시간’이 10개 즈음 모이면 좋은 하루가 되겠구나. 한 시간을 잘 보낸다는 것은 인생의 값비싼 자원인 시간과 주의력 모두를 살뜰히 챙기는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계동길에서 구입한 쑥떡을 마리아주 삼아 어제 먹다 남은 와인 한 잔을 마셨다. 분위기, 시간에 이어 세 번째 취기에 빠지니 ‘이것이 행복’이란 느낌이 들었다. 시간의 소나기를 흠뻑 맞았던 그날, 내 마음은 무지개처럼 빛났다. 소나기는 지나갔지만, 소나기를 맞았던 흥분이 마음에 남았고 초등 5학년 때 학예발표회를 위해 지은 동시가 떠올랐다.

 

소나기

 

구름이 과식해서

쉬야를 한다

 

쏴아 쏴아 후두두 후두두

많이도 한다

 

시원히 하고 나면

기분 좋은 듯

 

일곱가지 고운 얼굴

미소를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