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끼적끼적 일상나눔

어느 새벽에 맞은 '삶의 비평'

카잔 2014. 4. 16. 01:28

 

1.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나이를 따지며 찾아오는 건 아닐 것이다. 아직은 젊은 나도 종종 그런 생각을 맞이한다. (내 마음이 강인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다른 이유도 있긴 하다.) 한 해가 저물어갈 때나 여자 친구랑 심하게 다퉜을 때가 그렇다. 이건 예전의 일이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나서도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영화의 제목은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

 

콩가루 집안의 지극히 불행한 모습을 담은 영화에 나는 깊이 공감했다. 우리 집안이 영화 속의 가족과 비슷해서가 아니다. 잘 산다는 것,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의 힘겨움을 고스란히 느꼈기 때문이다. 공기 좋은 산 속에서 심호흡을 하여 산소를 폐 속으로 흠뻑 빨아들인 것처럼, 영화의 메시지가 내 몸 속 깊숙이 들어찬 느낌이다.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나의 감수성 덕분에. 

 

2.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하루동안 모발에 달라붙었을 먼지와 손과 얼굴의 세균들을 뽀득뽀득 씻어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여느 때면 그렇게 잠자리 속으로 개운하게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새벽 1시가 되어갈 무렵인데도, 노트북을 열어 글을 끼적였다.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다. 차분해졌고, 진지해졌다. 말하자면, 내가 글과 강연에서 자주 강조하는 '삶의 비평'이 시작된 것.

 

나는 잘 살아가고 있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무엇 때문일까? 이유야 많지. 불성실과 부도덕이 가장 큰 이유일 듯. 지금 어떤 기분인가? 어떡해야 해결되는지 모르는 과업 앞에서 느껴지는 감정, 답답함과 약간의 두려움 혹은 막연함이 든다. 장애물이 내 앞에 있다. 장애물의 이름은 '인생살이의 만만찮음'. 나는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장애물의 크기와 촉감과 맛을 알아챈 느낌이다.   

 

3.

야밤이라 감상에 빠져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는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이성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다. 책을 읽다가 잠들고 싶다. 『세네카 인생론』의 '행복한 삶에 대하여'를 펼쳤다. 세네카의 영향력인지, 운좋게 맞춤한 내용을 찾아낸 덕분인지, 나는 책을 읽으며 약간의 평온을 느꼈다. 샤워로 몸의 더러움을 씻어내듯이 나는 독서로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싶었다.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일은 책 속에서가 아닌 삶 속에서 실제의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독서가 동기를 일으키긴 하겠지만, 마음 먹은 것을 책을 덮은 뒤에도 지켜가고 실제로 행하면서 비로소 달라질 테니까. 독서가 우리에게 무용한 것은 아니다. 오늘도 몇 줄을 읽으며 얼마간의 위로를 얻었다. 다시 힘을 내기 전, 위로는 그 힘을 회복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오리무중의 상태에 있다. 행복한 삶에 이르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라도 한 걸음만 길을 잘못 들면, 행복한 삶을 찾기는커녕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거기에서 멀어질 따름이다. 행여 반대 방향으로 길을 가기라도 한다면, 서두른 만큼 간격을 더욱 벌리게 된다." - 세네카 <행복한 삶에 대하여> 중에서

 

4.

내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래서 얼마간의 시간을 되돌려 다시 살고 싶을 때, 나는 자주 영화 <박하사탕>을 떠올린다.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영호(설경구 분)의 절규는 언제나 내게 회한과 울림을 안긴다. 스스로 삶을 맺는 사람들을 중에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먼저 가버린 이도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남은 인생이 너무 길게 느껴졌을 테니까. 

 

"인생은 매우 길다."

Life is very long.

- T.S. 엘리엇의 '텅 빈 사람들 The Hollow Men' 中

 

<박하사탕>은 잔인한 영화다. 세월이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무서운 영화. (모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피어오르지만, 결국 삶의 종착역에 이르면 모든 것이 우리 손에서 사라진다. 주먹을 쥔 채 숨을 거두지 않는다. 그때 목숨마저 놓아버리는 것이다.) 주인공 영호는 순수를 잃어버리고 자기 내면의 폭력성을 조우한다. 잃어버린 것과 변해버린 것으로 괴로워하던 그의 마지막 선택이 슬펐다.

 

5.

오직 나에게만 적용되는 조언들. 책 구매를 전폭적으로 줄여라, 더욱 자주 그리고 많이 써라, 네가 자주 완벽주의에 허우적거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생각의 속도로 실행하도록 전력을 기울여라, 최소한 가족과 친구들에게라도 자주 연락해라, 너를 신뢰하는 이들에게 감사를 전해라, 친절과 배려를 처신의 기본으로 삼아라, 전화 연락이 안 되어 답답해 한 분들께 사과하라... (끝이 없지만, 몇 가지만 더!)

 

사소한 일들과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라, 일의 매듭을 지어라,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삶을 살아라, 관계를 가꾸어라, 영화를 자주 관람하라, 사람들과 와인을 즐겨라, 시간을 아껴라, 프로야구 시청을 줄여라, 평생에 일년은 야구에 미쳐 지내라,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을 만나라, 여행을 자주 떠나라, 매주 삶과 집안을 정돈하라, 현재에 몰입하라, 새로운 일에 도전하라,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