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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 두번째 강독회 후기

1. 강독회 둘째 시간에는 열 페이지를 읽었다. 강의실 앞에 선 선생으로서 내가 할 일은 중용의 도를 찾아가는 일이다. 진도를 나가야 한다는 압박으로 설명 없이 읽어나갈 수는 없고, 너무 많은 설명으로 진도가 지나치게 느려서도 안 된다. 설명이 부실하면 강독회에 참석하는 의미가 희석될 테고, 진도나 너무 느리면 자칫 지칠 수가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감수성과 목표의식! 청중이 고개를 갸우뚱 한다 싶으면 쉽게 설명하고 모두들 이해한다 싶으면 머릿속에 설명이 떠올라도 생략하는 감수성과 수많은 지식과 정보 중 우리 텍스트의 이해를 돕는 지식에 집중하는 목표의식, 이 두 가지를 항상 염두하자. 2. 강독회는 즐겁다. 이미 읽었던 텍스트인데, 강독회에서 읽으면 미리 생각하지 못했고 준비하지도 않았던 설명들이 떠..

메르스

[짧은 소설] 메르스 감염자가 25명으로 늘었다. SNS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예방 대책이 나돌았다. “코에 바세린을 바르면 괜찮아.” “사람들 많은 곳에 가지 마. 마스크 꼭 쓰고.” “손을 열심히 씻어야 합니다.” 세화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남자 친구 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야, 메르스가 호흡기 질환이라 바이러스가 코 속으로 들어와 감염될 수 있는데 바세린을 발라놓으면 이 녀석이 메르스 바이러스를 몸 속으로 안들어가게 딱 잡아 준대. 지용성이라. ^^ 나는 바르고 나왔어.” 곧장 답변이 왔다. “우리나라 감염자가 지금까지 20명(?)이라는데, 5천만이 넘는 우리나라 인구에 비하면 극히 소수야. 차라리 나는 오늘 밤 움직일 때 교통사고를 걱정할래.” 영수의 머릿속에는 어제 강변북로를 달리다가 ..

손택에 대해 묻고 답하다

다큐멘터리 리뷰 (2/2)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같은 인물을 좋아하는 이들끼리의 정서적 공감대가 느껴졌지만(신형철의 책 제목이기도 한 ‘느낌의 공동체’라는 말이 어울렸다), 관객들끼리 활발하게 여담을 나누기에는 형식과 공간이 주는 무게감이 컸다. (콘서트나 상영회에 적합한 의자 배열도 정중한 분위기에 한몫 했으리라.) '관객들과의 대화' 시간은 주로 관객이 질문하고 사회자(사회학자 노명우 교수)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두 권의 손택 책을 옮긴이(김선형 교수)가 간간히 유익한 설명을 덧붙였다. 사회자와 생각이 다른 일부 독자들은 넌지시 자기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여러 의견이 어우러져 손택 이해에 도움을 준 시간이었다. 나 역시 사회자와 다른 생각을 가진 대목이 많아 마음속으로..

카테고리 없음 2015.06.02

다큐멘터리, 손택에 관하여

다큐멘터리 리뷰 (1/2) 1. 마음산책, 참 고마운 출판사다. 손택의 인터뷰 집 『수잔 손택의 말』을 출간하더니 이번에는 출간을 기념한 다큐멘터리 상영회라니! 손택에 관한 다큐멘터리이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미국 아마존에서도 DVD 판매는 없어서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던 터라(Audio CD만 있어서 구입을 미루고 있었다), 상영회 소식은 무척 반가웠다. 한글 자막으로 이번 상영회를 준비했으니, 반갑고 고마울 수밖에. (참고로, 마음산책 출판사는 ‘마음산’과 ‘책’으로 떼어 읽는 게 설립 취지에 맞지만, 마음 + 산책으로 생각하는 독자들도 많을 터이고, 나는 두 표현이 모두 마음에 든다.) 다큐멘터리를 본 직후에는 소감이 여러 가지였지만, 열흘 남짓 지나니 증발한 생각들이 많다. 조금이라도 더 기억을 ..

카테고리 없음 2015.06.01

계승

[짧은 소설] 세탁소에 여인이 들어왔다. 하얀색 이불을 테이블에 무성의하게 올려두면서 세탁소 주인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금방 하나 더 가져올게요.” 잠시 후 여인은 커다란 검은색 천을 한 손에 들고 돌아왔다. 세탁소 주인이 받더니 “천이네요?” 라고 물었다. “네, 여기 어디 한쪽에 브랜드가 있는데” 하면서 여인은 족히 5m가 넘는 천을 이리저리 펼쳤다. 곧 “Westcock"라고 크게 쓰인 문구가 드러났다. “(브랜드를 가리키며) 페인트로 찍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이거 손상 될까요? 그러면 안 되는데.” 주인은 브랜드를 손으로 만지더니, 문제 될 것 같다며 “집에서 솔로 지저분한 부분만 살살 문지르는 게 낫겠는데요”라고 말했다. “싫어요, 회사 거란 말예요.” 그렇잖아도 부드러운 주인의 말투인데 ..

내면일기

[짧은 소설] 그녀는 자주 자신의 내면을 성찰했다. 마음을 살피어 반성했고 신경 쓰이는 일들은 며칠에 걸쳐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아 발견한 것들을 날마다 기록했다. 내면일기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그 기록물들은 꼼꼼하고 상세했다. 찬찬히 살피면 그녀 기분의 부침이 그래프로 드러날 정도였다. 기록은 사실이나 논리를 체계적으로 따르기보다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같은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작성되었다. 때로는 자신의 실망스러운 행동에 짜증을 냈고, 왜 그리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마음의 심연 속을 헤매고 다녔다. 때로는 반복되는 패턴에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말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나에 대한 다른 이들의 오해는 불가피한 인생의 일면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의 평가가 조금이라도..

독서, 짧은 소설 & 5.18

1. 어제는 5월 18일 35주년 기념일이었다. 나는 궁금하다. 매년 5월 18일이 되면,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지. (호기심이기도 하고, 역사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대학생이었을 때에는 매년 이 날을 기념했다. 5월 18일 전날부터 덩어리 시간을 내어 5.18 자료를 찾기도 했고, 관련 영상을 보기도 했다. (기억이 맞다면) 강준만 선생의 『리영희』에서 기술된 설명이 내가 읽은 가장 충격적인 묘사들이었다. 언젠가부터 5월 18일이 되어도 나는 다른 일들로 바빴다. 홀로 묵념하는 것으로 간.단.히. 지나치고 만다. 이것이 나만의 모습이면 좋겠다. 지금도 여전히 대학생들과 시민적 지식인들은 이 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불러들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

어느 날 문득 꽃이 피었다

[짧은 소설] 오래 전, 집 앞 꽃집에 갔다. 작은 꽃이 든 화분을 하나 사 왔다. 나는 꽃 이름을 잊었고, 화분이 놓인 곳은 어지러웠다. 가지각색의 화분이 나란히 놓인 것도 아니고, 화분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지도 못했다. 책과 종이 자료가 쌓인 데다 필기구와 메모지가 흩어져 있는 책상 위에, 화분을 놓아둔 것이다. 일상에 작은 생기를 더하기 위함일 뿐, 꽃이 자라날 만한 환경이나 책상 정돈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무심했다. 어머니께서 보시고서 “이렇게 책상이 지저분한데 화분이 있다고 뭐가 달라지긴 하니?”라고 물으셨다. 핀잔이 아닌 호기심이었다. 22년 동안 키웠다는 이유로, 아들을 다 안다고 여기지 않는 점이 어머니의 훌륭함이다. 변화를 궁금해 하시고 작은 노력에도 기대를 가지신다. “꽃처럼 아름답게 살..

국사와 세계사 공부 순서

내 나라 역사인 한국사를 먼저 공부하고 나서 세계사 공부를 이어가는 게 올바른 순서지.” N이 말했다. 애국주의자나 민족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일견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세계사를 먼저 공부하고 나면 내 나라 역사를 보다 객관적으로 알게 되고, 세계 역사의 교훈을 새기며 한국사를 공부하는 동안 나라의 미래상을 모색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의견이 옳은가? 이리 물을 필요는 없다. 저마다 나름의 유익이 있고 모두 나름의 이치에 맞으니까. 이런 경우엔 지속성과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한국사를 먼저 공부하든, 세계사를 먼저 공부하든 어느 것 하나를 마치고서 공부를 끝낼 게 아니라 다음 공부를 이어가는 지속성 그리고 자신이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

Introduction 2015.05.14

[reverse] 성찰일지 (1)

1. 5월 2일, 번개처럼 내 독서에 전환점이 일어난 날! 나는 이 날을 계기로 내 인생에 반전(reverse)을 만들고 싶었다. 단박에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마도 2014년~2015년을 내 인생의 침체기로 회상할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긴 하지만 - 나는 그 어떤 충격에도 삶을 탕진하거나 우울함의 구덩이에 빠지는 말아야 한다고 언젠가 굳건하게 생각했었다 - 좀처럼 열정적인 모습을 내 하루하루에 분출하지는 못하면서 8개월여를 지냈다.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내가 달라진다면,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rebirth) 새로운 기운으로 살아간다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 작은 것 하나부터 확실히 잡자고 생각했다. 간단하면서도 작은 일, 이를테면 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