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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손택 강독회 안내

2015년 5~6월, 다섯 번에 걸쳐 '수잔 손택 강독회'를 진행합니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20세기 최고의 비평가'는 수잔 손택, 롤랑 바르트 그리고 발터 벤야민입니다. 정치나 사회 영역까지 넓히면 에드워드 사이드를 빼놓을 수 없지만, 제 공부의 일차적 단계는 문학과 예술이기에, 문예비평가로 저 세 사람의 글을 좋아합니다. (문예비평가라는 말은 쓰이지 않는 말이나 손택은 영화와 연극을, 벤야민은 사진까지 다뤘으니 문학비평가라고 하엔 부족합니다. 롤랑 바르트는 프로레슬링까지 다뤘으니 문화비평의 모델을 보여 주었고요.) 손택의 글은 쉽게 읽힙니다. 비평가들의 현학적 표현을 생각하면 가독성은 엄청난 능력이고 매력입니다. 손택의 글은 문학, 연극, 영화, 사진을 넘나들기에, 그녀를 따라가다보면, 문학을 ..

돌연한 출발이 필요할 때

누구나 기회를 만나지만, 모든 이가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다. 특히 준비되지 못한 이들에게 기회는 그림의 떡이다. 그렇기에 어떤 기회는 (기회가 아니라) 그저 유혹이다. 준비가 기회를 만나는 것이야말로 멋진 일이다. 준비가 기회를 붙잡을 테니까. 준비가 완벽을 예비하고, 준비가 여정을 즐기게 함을, 나는 명심하고 있다.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한다. 완벽이든 즐거움이든 길 위에서 완성되는 것임을. 그러니 때로는 돌연하게 출발해야 한다. 나는 ‘세심이 잉태한 돌연’을 찬양하지만, 인생의 변화와 도약을 위해서는 때때로 돌연히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오래 정체한 이들은 결국 떠날 때를 만난다. 목표를 모르고 일용의 양식을 준비하지 못했더라도, 떠나야 할 때를! 떠남 자체가 목표인 여행인데 목적지를 몰라 당황하는..

세월과 한 평의 공간

시간은 사람을 바꾼다. 어떤 이에게 아침은 생기를 준다. 어떤 이에게는 저녁이 그렇다. 월초에 힘이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월말이면 열정적으로 변하는 사람도 있다. 월초와 월말 모두 삶의 기운을 내는 이들도 있다. 내가 그렇다. 한 달의 시작 시기나 마무리할 즈음에 나는 삶을 돌아보고 힘을 내고, 이런저런 시간마다 긍정적 영향을 받는다. 2015년 5월 2일 새벽이 그랬다. 나는 새벽 2시에 일어나 오전 10시까지 공부했다. 오롯이 한 작가의 책을 읽었다. (수잔 손택의 에세이 다섯 편이다.) 시간은 나를 매혹했다. 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2시간, 3시간씩 지났다.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지난해를(2014년) 힘들게 보냈다. 우정, 성취, 사랑을 상실했고, 그때 충격이 현재진행형이다. 처음에는 유실한 노..

저물어가는 햇살은

저물어가는 햇살은 반년 만에 친구를 만나니 6개월 전 내 모습이 보였다 반년 동안 이룰 것을 다짐하던 지금보다 조금은 젊었던 나 미루고 또 미루는 고질병에 세월이 끝없으리라는 착각까지 뜨거움도 결실도 없는 삶으로 친구 앞에 뻔지르하게 섰다 세월은 구름처럼 흘렀건만 웅덩이에 고여 있었던 나 다짐은 바람처럼 사라졌고 4월 햇살이 밝아 민망했다 그 누굴, 그 무엇을 탓하리 처음엔 친구에게만 부끄럽더니 이내 만물을 쳐다보기 힘들더라 저물어가는 햇살이, 빛났다 *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기뻤다. 우리는 밝은 햇살처럼 웃었고, 맛난 식사만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눴다. 나는 이번 만남 때까지 해내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부끄러웠지만 자괴감에 빠지지 않았다. 눈 앞에 선 친구와 생각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수양을 추구하는 사람들

1. 주말에 안동 옥연정사에 다녀왔다. 서애 선생은 임진왜란의 기록을 담은 제132호 국보『징비록』을 '옥연정사'에서 썼다. 정사 출입문 앞에 서면 낙동강과 하회마을이 보인다. 부용대와 함께 하회마을 전경을 즐기기에 맞춤한 장소다. 정사에 들어서기 전 낙동강을 내다보니, 잠시 휴식하면서 강 너머 고향 마을을 바라보는 서애 선생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아름다운 고향과 전란의 비참함이 대비되면서, 『징비록』 집필에 박차를 가하셨으리라. '다시는 이런 전란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야.' ('징비'는『시경』 소비편 "나는 지난 날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基懲而毖後患)"에서 따온 구절이다.) 2. 퇴계 선생은 61세가 되어서야 도산서당을 완공했다. 학문을 연마하고 자연을 감상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퇴계 뿐..

법칙 만능주의 벗어나기

믿고 따를 만한 법칙이 생겼다면 반가운 일이나, 법칙을 따르는 동안에도 높은 자각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법칙 하나를 준수하고 있다고 해서 인생이 잘 풀릴 거라고 자신을 기만하지 않아야 한다.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법칙은 인생의 만능 해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깨어있음은 잠을 못 자서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신경증이다. 무신경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기민하게 반응하는 상태가 깨어있음이다. 이것은 고양된 의식이다. 그러니 법칙 준수와 함께 필요한 것은 인생길을 꾸준히 헤쳐나갈 힘을 연마하는 일이다. 관찰력과 애정력부터 키워야 한다. 법칙은 고체와 같다. 뻣뻣하여 난관을 돌파하긴 하지만,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지는 못한다. 힘은 물과 같다. 상황에 적합한 반응으로 인생의 복잡한 ..

성공 법칙을 찾는 이에게

여기 행복과 의미 있는 성공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는 법칙을 찾으려고 애썼다. 삶을 행복하게 만들 법칙을! 따를 법칙만 찾아내면 힘써 실천할, 열정적인 사람이다. 잘 살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던 터라, 무엇이라도 빨리 실천하고 싶었다. 그는 책에서 법칙을 찾았고, 그것대로 살았다. 열심히 노력했고, 헌신의 결과로 인생의 한 영역을 바꾸었다. 해피엔딩인가? 아직은 모른다. 지속적으로 법칙이 주효한지 살펴보기 전에는. 법칙의 효과는 일시적이었고, 부분적이었다. 법칙이 삶의 어느 영역을 한 단계 발전시키셨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두 단계 퇴보시켰다. 직업적 일에서는 성취를 이뤘지만, 배우자와 자녀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 법칙을 맹신하면, 행복과 성패를 좌우하는 다른 요인들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인생은 불..

카프카다운 이야기 두 편

20세기를 빛낸 작가 목록은 길 테지만, 20세기다운 작가라고 제한하면 목록은 짧아진다. 토마스 만이나 존 스타인벡처럼 리얼리즘이 빛나는 소설은 19세기에도 존재했으니까. 반면 제임스 조이스나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며 쓴 소설이나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처럼 시대의 불안을 복합적인 알레고리로 포착한 시는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작품이었다. 카프카는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와 함께 20세기를 빛냈으면서도 20세기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가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 카프카가 1904년 문학 친구 오스카 폴라크(Oskar Pollak)에게 보낸 편지에서 문학에 대해 한 말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문학적 이상을 실현했다. 무턱대고 단정한 것은 ..

칸트의 식사 시간은 길다

“칸트는 오후 1시에 그가 초대한 손님을 맞았습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식당으로 안내되었는데 식당에서는 평균 4시까지, 손님이 많은 때는 6시까지도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뒤 약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합니다. 처음에는 ‘철학자의 길’을 산책하다가 아무데고 앉아 사색을 하고 때로는 중요한 착상을 수첩에 적기도 했습니다. 산책은 항상 혼자 했습니다. 산책한 후 나머지 시간을 독서로 보냈는데 그 시간에 또 친구가 찾아오면 그 친구랑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칸트는 정확히 10시에 취침하면서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칸트의 제자 제자 야하만의 전언인데, 칼같이 정확하게 생활했던 칸트에게도 지적 교류를 위해서는 융통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칸트는 3시간 동안이나 식사를 했다. 통상적으로 세 시간,..

봄날의 경리단길 투어

경리단길 투어의 핵심 키워드는 크래프트 비어와 장진우 거리 그리고 글로벌한 이국적 맛집이다. 하나를 덧붙이자면 근사한 카페 이나 (일명 조인성 카페)에서 즐기는 작은 호사다. 시래기 맛집 이나 스테이크 전문점 에서의 호젓한 식사를 끼워넣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경리단길은 핫한 지역이다. 연예인 부동산 고수 길용우 씨가 건물을 사들였다는 뉴스가 하나의 반증이 되겠다. 나에게 경리단길은 무엇보다 대한민국 로컬 문화의 중심지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