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 8

운명이다

운명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후 자서전 제목이다. 서거 1주기를 맞아 고인이 남긴 저서, 미발표 원고, 메모, 편지, 인터뷰, 구술 기록을 토대로 유시민 선생이 정리한 책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틋한 느낌이 드는 밤이지만, 그 분에 관한 글을 쓰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 수업을 준비하다가 문득 그가 떠올랐고, 그 분의 뜨거운 삶이 그리워졌다. 잇달아 내 그리운 사람들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결국 자서전 제목을 읊조림으로 마음을 달랜다. 『운명이다』를 뒤적이다가 밑줄 그은 문장들을 만났다. 30쪽에 나오는 "나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이하의 문장들을 읽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오늘은 7월 31일이다. 한 달의 마지막 날 밤에 울고 싶지는 않아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8월에 다시 자서전을 들..

깊은 지성의 3가지 특징

1. 지성이 얄팍한 사람들은 책을 많이 산다. 책을 많이 읽으면 깊어지리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 여러 가지 시시한 책들을 읽느라 훌륭한 책을 진득하게 파고들 시간이 없다. 시간을 들이지 못해 사유하는 힘을 키우지 못한다. 사유의 힘이 느슨하니 고전의 단단한 지성 세계로 침투해 들어가지 못한다. 결국 이런저런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타협한다. 빈약한 지적 생활의 악순환이다. 반면 깊은 지성을 갖춘 사람들은 소수의 고전을 독파하면서 최고의 인식을 만난다. 2. 지성이 얄팍한 사람들은 자주 안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같은 주제의 강연을 두 번 듣지 않고, 중요한 텍스트도 두 번 읽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자신이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발터 벤야민의 을 읽..

오랜만의 성찰을 하고서

금토일 3일이 폭풍처럼 지나간 느낌이다. 드센 바람이 불어 나의 일상이 힘들었다는 뜻이 아닌데도 ‘폭풍’이라는 단어를 쓴 까닭은 홀로 있을 시간이 희소해졌을 때의 내 느낌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그래서 “폭풍처럼 지나갔다”가 아니라 “폭풍처럼 지나간 느낌이다”고 썼다. 첫 문장을 쓰기 전 나는 ‘살다 보면 정말 폭풍처럼 지나갔다고 표현할 만한 힘든 일이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는 작년에 친구를 떠난 보낸 직후의 날들이 떠다니고 있었고. 지금은 월요일 늦은 오후다. 최근 며칠을 되돌아본다. 금요일은 점심식사부터 와우 10기와 함께 하기 시작하여 파주 여행을 함께 했다. 헤이리 예술마을을 둘러보고 출판단지 내 지혜의숲도서관까지, 우리는 다소 지적인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 서가를 다니며 와우들과 이..

변신

[짧은 소설]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나는 한 마리의 개가 되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머리맡에 있던 안경을 집으려는데 내 손이 안경을 잡지 못하고 툭툭 건드려 안경을 미끄러뜨릴 뿐이었다. 왜 이러지? 잠이 덜 깼나, 싶었는데 평소와 달랐다. 안경을 쓰지 않았는데도 사위가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였다. 그 순간 어디선가 축축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슨 냄새일까?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냄새였음을 눈치 채자, 이상했다. 나는 냄새에 민감한 편이 아니었다. 시큼한 반찬 냄새도 느껴졌다. 주방으로부터 전해지는 냄새의 성분 하나하나를 맡으며, 무슨 음식인지도 구분해냈다. 이때부터 나의 개 됨을 어렴풋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네 발로 일어섰다. 내 방인데도 시야가 낮..

우정

[짧은 소설] 여고생 진이, 경숙, 주희는 단짝이었다.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점심시간을 항상 함께 했다. 화장실도 같이 다녔고, 시험 때면 같이 밤을 새며 공부했다. 주말에도 만나 만화책을 보거나 가끔씩은 사소한 쇼핑도 함께 다녔다. 어느 날, 진이가 윤리 선생님의 말을 전했다. “어제 윤리가 그러더라. 고등학교 친구들이 평생 변함없는 우정으로 남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은 안 그렇다고.” “야, 그건 대부분이 그렇다는 거고, 우리는 아니지.” “당연하지. 대학 가도, 결혼을 해도 우리는 변치 않을 거야.” 셋은 우정반지를 맞췄다. 반지를 깜빡한 날에는 두 사람의 핀잔을 들어야 했다. 경숙과 주희는 서울의 대학교에 입학했다. 진이는 경기도로 대학을 다녔다. 새로운 문화와 대학 생활에 적응하느라 자주..

하늘

[짧은 소설] 김씨는 이상적인 목표를 추구하며 평생을 열렬히 살았다. 이십 대부터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아 날마다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최근에는 새롭게 착수한 프로젝트에 열정을 느꼈다. 겉보기엔 괜찮은 삶이었지만 내면의 힘겨움도 컸다. 일련의 불행이 그를 덮쳤던 것이다. 처음으로 승진에서 누락됐고, 단짝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로젝트를 둘러싼 부하 직원과도 갈등도 생겼다. 친구를 잃은 슬픔과 삶의 무상함이 몇 달간 지속되었다. 김씨는 강인했지만, 삶의 고뇌는 김씨보다 막강했다. 삶의 힘겨움과 무상함이 교대로 김씨를 찾아왔다. 격랑의 벌판에서도 그는 정신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일을 지켜 나갔다. 때때로 놀라운 집중력으로 일에 몰두하기도 했다. 시련은 더욱 모질어졌다. 정신적 스승이었던 어머니마저 세..

삼백 육십 오일이 지나도

친구가 세상을 떠난 지 삼백 육십 오일이 지났다. 친구 형님께도, 친구 아내에게도 전화 한 통 없이 오늘을 보냈다. 형님이 괜찮냐고 물으면 나는 "네 괜찮아요."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괜찮지 않으니까. 형님은 어떻게 오늘을 보내셨을까. 제수씨는 무얼 하며 지냈을까. 음력 기일을 지내는지 만이라도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지금 나에게는 '꼭 한 번 만'이라는 말이 절절하다. 식사 한 번 하고 싶다. 단 한 시간 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마음이 아무리 절절해도 그럴 수가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으니, 소원은 목 메는 애통함이 되고 만다. 눈물이 흐른다. 요즘 내내 몸무게가 조금씩 늘어나던 참인데, 어제 오늘 1kg이 줄었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죽은 이들 저마다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있..

천재

[짧은 소설] 성인 연주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놀라운 실력을 소유한 꼬마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 아이는 국제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모두들 아이의 재능에 감탄했지만, 경이로운 실력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법이 없었다. 아이는 이제 겨우 열 두 살의 나이지만 두 돌이 지난 이후부터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니 십년 동안 많은 시간을 연습했다. 실로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는데, '일만 시간의 법칙'의 2배는 족히 달성했다. 아이에겐 생계를 꾸려야 할 일도 없었고, 매일 끝없이 쏟아지는 집안일도 없었기에, 아이의 1년 몰입은 성인에 비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는 연습이 실력을 만든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지만, 뛰어난 실력을 본 어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얘는 천재네." 그 말이 떨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