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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 육십 오일이 지나도

친구가 세상을 떠난 지 삼백 육십 오일이 지났다. 친구 형님께도, 친구 아내에게도 전화 한 통 없이 오늘을 보냈다. 형님이 괜찮냐고 물으면 나는 "네 괜찮아요."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괜찮지 않으니까. 형님은 어떻게 오늘을 보내셨을까. 제수씨는 무얼 하며 지냈을까. 음력 기일을 지내는지 만이라도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지금 나에게는 '꼭 한 번 만'이라는 말이 절절하다. 식사 한 번 하고 싶다. 단 한 시간 만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마음이 아무리 절절해도 그럴 수가 없다. 절대로 그럴 수 없으니, 소원은 목 메는 애통함이 되고 만다. 눈물이 흐른다. 요즘 내내 몸무게가 조금씩 늘어나던 참인데, 어제 오늘 1kg이 줄었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죽은 이들 저마다에게는 절친한 친구가 있..

천재

[짧은 소설] 성인 연주자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놀라운 실력을 소유한 꼬마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 아이는 국제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모두들 아이의 재능에 감탄했지만, 경이로운 실력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법이 없었다. 아이는 이제 겨우 열 두 살의 나이지만 두 돌이 지난 이후부터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니 십년 동안 많은 시간을 연습했다. 실로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는데, '일만 시간의 법칙'의 2배는 족히 달성했다. 아이에겐 생계를 꾸려야 할 일도 없었고, 매일 끝없이 쏟아지는 집안일도 없었기에, 아이의 1년 몰입은 성인에 비할 수준이 아니었다. 아이는 연습이 실력을 만든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었지만, 뛰어난 실력을 본 어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얘는 천재네." 그 말이 떨어지..

GLA 7월 세계사 수업 안내

여름을 맞아(^^) Great Legacy Academy 역사 강좌가 시작됩니다. 세계사와 한국현대사를 주제로 각각 4주 동안 역사 공부의 얼개를 잡고 기본 지식을 익히는 수업입니다. 일정 : 7월 09일, 16일, 23일, 30일 (목요일) 19:30~22:00 장소 : 토즈 홍대점 (홍대입구역 2번 출구, 도보 1분) 신청 : 입금 후 댓글로 성함/ 이메일/ 전화번호 기재 (기신청자는 성함만) 수업료 : 12만원 / 원격수업은 6만원 (신한 801-04-851616) 수업내용 Great Legacy Academy (세계사) 1주차 7월 09일 세계사 공부를 위한 기본소양 2주차 7월 16일 고대 그리스의 역사 3주차 7월 23일 세계 혁명의 역사 4주차 7월 30일 21세기의 결정적 장면 * 강좌는 ..

에듀케이션

[짧은 소설] 아이는 엄마와의 약속을 기억했다. “아들, 두 시간만 놀다가 학원 시간 맞춰서 가야 해.” 명령조였지만 따뜻함과 친절함이 가득 담긴 말에서 아이는 엄마의 애정을 느꼈다. 아이는 엄마의 말을 따르고 싶었다. 엄마를 좋아했다. 친구 집에서는 게임을 하나 한 후 만화 영화를 봤다. 재밌는 만화에 친구들과 빠져들었지만, 아이는 10분마다 시간을 확인했다. 만화를 다 보고 일어서면 학원 시간에 늦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을 좀 더 빨리 끝냈어야 했는데...’ 아이는 친구를 졸라 1.2배속으로 만화를 끝까지 시청했다. 아이의 예상대로, 뛰어가면 학원에 늦지 않을 시각이었다. 아이는 내달렸다. 기분이 좋았고 얼굴에 맞는 바람이 시원했다.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아들, 왜 이렇게 숨이..

호기심

[짧은 소설] 나는 스스로 배웠다. 훌륭한 선생님이 계셨더라면 배움이 한결 깊어졌을 테고, 부모님이 다양한 체험으로 이끌어 주셨더라면 정신의 지경이 더욱 넓혀졌을 테지만, 내게 그러한 행운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엔 태권도나 컴퓨터 학원조차 다니지 못했고, 중고등학생일 때에도 과외는 내게 딴 세계 이야기였다. 좋은 환경이 아니어도 학습은 이뤄졌다. 때로는 무지가 도움이 되는 법!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 행불행의 감정을 느낄 뿐,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었을 무렵, 나는 기본적인 지성을 갖추었다. 호기심 덕분이었다. 내면의 호기심이 나를 가르쳤고 지력을 키웠다. 어린 시절 눈에 비친 세상은 모르는 것, 궁금한 것들이 가득했다. 궁금한 것들에 대해 엄마..

상업과비평사

[짧은 소설] 우신경은 국내 굴지의 문학상은 물론 해외 문학상까지 수상한 일급의 소설가다. 그녀의 대표작 『문학을 부탁해』는 15개 언어로 번역됐고 국내에서는 문단을 대표하는 출판사 ‘상업과비평사’에서 출간됐다. 찬란한 인생에 변고가 생겼다. 우신경의 소설에 표절이 의심되는 대목을 조목조목 밝힌 T의 글이 세상에 알려졌다. 표절 시비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문예지가 아닌 온라인 매체를 통해 발표된 글이라는 점과 대상이 문단의 대표 주자라는 점 탓인지 논란은 삽시간에 번졌다. 우신경은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문제되는 작품을 모른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 표절을 전면 부인했다. 상업과비평사도 우신경을 옹호했다. “문제가 된 부분은 일상적 소재이고..

전문가처럼 마니아처럼

점점 애착이 사라진다. 물건 하나를 더 가지면 무엇 하나, 성취 하나를 더 이룬들 무엇 하나 정도였던 무상함이 최근 더욱 짙어져서 사랑 한들 무엇 하나, 행복하면 무엇 하나 정도의 감정에 이르렀다. 누군가의 염려나 조언 없이 자가진단만으로도 내 마음의 건강이 나빠졌음을 느낀다. 나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정도는 아니나, 모든 정신이 방향성을 갖고 발전한다는 점에서는 주의해야 한다. * 나는 이제, 애착과 초연의 변증법까지 배우려나 보다. (많은 이들은 애착이 많아 초연을 익혀야겠지만, 나는 반대 상태가 되었다.) * 10기가 마지막일 것 같은 불길한 느낌, 잠시라도 떠날 것만 같은 묘한 예감, 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애착을 가져야 한다. 사람, 일상, 사물에게. * 생각할 거리도 많고,..

연못

[짧은 소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상수는 과장스럽고 성급하게 반응한다. 모든 이에게, 재빨리, 화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지닌 듯이. 어떤 이가 “미처 일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달에 바빴습니다.”라고 말하면, 상수는 그의 바빴다는 말이 끝맺기도 전에 “바쁘셨으니까”라고 메아리처럼 화답한다. 어느 날, 상수는 고객과 부동산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누가 보아도 60대 중반으로 볼만한 노인이었다. 대화 도중 노인의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끊은 노인이 “아까 말한 그 친구예요”라고 말하자, 상수는 노인의 말을 쫓았다. “아! 양평에 계신 분이요?” “아니 화곡동 친구.” “아! 골프장에 같이 가셨다는.” “그래요.” 상수의 퀴즈 맞추기식 대화가 아니었다면 불필요한 대화들이었다. “..

사랑의 사생아

[짧은 소설] 경숙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인교습을 하는 첼리스트다. 아이들의 재능을 발견하여 맞춤 교육을 잘 하기로 유명했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를 인내심으로 지켜볼 줄도 알았다. 그래서인지 자녀 양육에 있어서도 이웃집 엄마들보다 현명했다. 앞집 엄마는 딸을 학원에 보냈다. 행여 자신이 다른 엄마들보다 뒤처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옆집 엄마도 딸을 학원에 보냈다. 엄마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고 믿었고, 학원을 보내는 일은 그 중 하나였다. 경숙 역시 딸을 학원에 보냈다. 딸이 원했기 때문이다. 경숙의 딸 지영은 학원 수업을 즐거워했고 곧잘 배웠다. 엄마의 직감으로 딸의 열심을 느끼고 있던 경숙에게 학원 선생님이 지영의 남다른 재능을 전하자, 경숙은 욕심이 생겼다. 딸의 필요로 시작된 학원 수업..

진정성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시인 김남주는 단 두 편의 시로 나를 사로잡았다. 주말에 도서관에 왔다. 창비시선집을 쭈욱 살핀 것은 김남주 시인을 읽기 위함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모르는 바도 아니고, 상세히 아는 바도 아니다. 노동과 투쟁의 살려고 애썼던 저항시인임을, 그의 시들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었음을,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그의 작품들을 살뜰히 모아 전집으로 간행했다는 사실 정도를 알고 있던 터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김남주를 읽을 것인가를 가늠하기 위해 『사상의 거처』를 뽑아 들었다. 창비시선 100번째 시집이었다. 시집에 실린 첫번째, 두번째 시의 제목이 반갑다. 어쩌면 두 편의 시로 이 시인과 나와의 궁합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제목은 '시에 대하여' 그리고 '예술 지상주의'! 여기 한 시인이 있다. 그에게 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