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fe is Travel/낭만 유럽여행 70

정리 정돈에 대한 단상

- 여행 둘째날. 8월 14일(금) 류블랴나에서 빈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정리는 버리는 것이고, 정돈은 남은 것들을 잘 관리하는 것이다. 오늘은 정리 정돈에 대한 생각이 정리 정돈되었다. 1. 일행과 헤어지면서 가방이 두 개 더 생겨났다. 몸을 힘들게 할 만큼 짐이 무거워졌다. 더해진 가방 안에 든 것들은 먹을거리 혹은 소모품이기에 며칠만 고생하자는 생각으로 들고 다니는 중이다. 짐을 하루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류블랴나 역으로 향하는 길에서였다. 몸이 힘든 것은 견디면 그만이지만, (꽤 힘들긴 했다) 무게를 감당하느라 풍광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이 뻐근한 어깨보다 더욱 속상했다. 류블랴나 역으로 10여 분 동안 걸으면서 본 것은 신호등과 멀리 보이는 기차역 ..

Live 여행이 시작되다

- 여덟째날 (8월 13일 목요일) 홀로 남겨진 류블랴나에서. 일행들과 헤어진 나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에 내렸다. 아마도 스탕코(운전기사)가 다운타운에 내려 주었으리라. 그러니 시내 중심 어딘가라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 도로에는 BUS 전용 차로를 알리는 글자가 쓰여 있다. 알 수 있는 문자라서 반갑다. 건물에 쓰인, 이정표에 쓰인 다른 모든 글자는 낯설다. 'Ljubljana(류블랴나)'라는 글자만이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텍스트다. 건물에 그려진 여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매혹적이고 고독하다. 매혹과 고독은 내 여행을 설명하는 좋은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으로 귀환한 그들에게, 혹은 일상의 여행자들에게는 나의 유럽 여행은 매혹적일지도 모르겠다. 내게도 많은 부분 매혹적이다. 허나, 그것이..

한가로운 여유 만큼이나 좋은 것들

"한가한 때란 존재하지 않는다네. 내 경우 일을 하지 않으면 많은 책을 읽지. 확실한 계획을 세워서 집중적으로 말이야." - 피터 드러커 『나의 이력서』 p.16 마음이 급해진다. 해야 할 일은 많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짧다. 오늘 둘러보아야 할 명소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역사와 번영의 자취가 남아 있는 '호프부르크'이다. 나는 3~4시간 동안 넉넉하게 둘러보고 싶었기에 오늘 하루를 아주 일찍 시작하려 했다. 호프부르크와 카푸치너 교회, 쇤부른 궁전까지 둘러보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허나, 이 계획은 변경되었다. 나는 어젯밤을 빈의 어느 '호이리게'에서 만난 Halek 부부의 집에서 묵었고, Kerin Halek과 이야기하느라 오전을 몽땅 보냈기 때문이다. (호이리게 : 자체 소유의 포..

일행들과 헤어지다

일행들이 한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 10시. 일급(!) 호텔에서 나와 잠시 서성였다. 이제 몇 분 후면, 일행은 떠나고 나는 남을 것이다. 묘한 기분이다. 내일부터는 저렴한 여행이 시작될 것이다. 덤덤한 기분이다. 아마도 외로울 때가 있을 것이다. 한국이 그리울 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예상이 다 빗나가는 날이 더욱 많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 나는 여행자니까. 낯선 이곳에서 느끼고 성장할 테지만, 9일 동안 함께 했던 이들이 가면 한동안 허전할 것 같다. 처음 나의 생각은 호텔에서 헤어지는 것이었다. 공항까지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건 조금 유난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나 한 사람 빠지는 것이니 일행들과 자연스럽게 헤어지고 싶었다. 머리 속에는 브라질 이과수 폭포에서 만났던 가이드..

옛사랑을 추억하다

오파티야에서의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호텔 레스토랑에서 When a man loves a woman이 흘러나왔다. 영화 의 테마곡이었던 노래. 잔잔히 깊어지는 러브 스토리가 참 아름다웠던, 그래서 눈물 한 방울 툭 떨어뜨리며 보았던 영화. 나에게도 맥 라이언과 같은 귀여운 그녀가 있었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쁜 그녀와는 2년 동안 사귀었다. 다투기도, 추억도, 즐거움, 배움도 많았다. 그녀는 나의 걸음걸이를 보면 신이 난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감에 넘치는 걸음걸이라고. 여행의 닷새 째 저녁에는 이렇게 옛사랑이 생각났다. 오빠티야에서의 밤은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며 홀로 해변 상점가를 걸었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이기에 또 한 번 뒤늦게 아파한다.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을 추억하며 잠시 슬픔을 느껴..

모자 세탁하기

어젯밤 세탁한 모자는 밤 사이 불어 준 바람 덕분에 잘 말랐다. 깨끗한 모자를 보니, 그 모자를 쓰고 여행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상쾌해진다.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는 시간은 이른 새벽이 아니라 전날 밤부터 시작된다. 잠들기 전의 시간이 중요한 까닭은 새 날을 열기 직전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작은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무리이지만, 시작 없이는 마무리도 없기에 그렇다.) 어젯밤 모자를 세탁한 것은 오늘 즐거운 여행을 위한 좋은 준비였다. 잠들기 전, 누군가를 향한 분노나 세상의 어두운 면을 향한 우울함을 떨쳐 내고 잠드는 것은 새로운 하루를 맞기 위한 좋은 준비다. 분노나 나쁜 생각을 품은 채 잠들어서는 안 된다. 다시 생각하자. 다르게 생각하자. 그리하여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자. 밝은 면을 보..

삶은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다

여행 넷째 날이 되니 빨랫감이 하나 둘 생겼다. 볼(BOL) 해수욕장에서 입어 소금에 절은 수영복을 얼른 빨아야 했다. 게다가 수영 가방 안에 들었던 맥주캔이 찢어지는 바람에 수영복과 수건 등이 몽땅 맥주에 젖기도 했다. 조금 피곤했지만, 호텔 욕실에서 빨래를 했다. 여행은 관광과는 다르다. 해야 할 일이 생겨나고 스스로 해내야 한다. 4박 5일 정도의 짧은 일정이라면 집으로 돌아가서 빨래해도 될 테지만, 50일이 넘는 긴 여행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빨래를 해야 쾌적한 여행을 지속할 수 있다.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삶은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기에, 짧지 않은 여행이기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꼭 해야 하는 일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생의 지혜다. 어떤..

스승과 함께 수영하다

여행 넷째 날 새벽 여섯시 삼십 분. 아드리아의 해변에서 책을 읽고 싶어 책 한 권, 노트 하나를 들고 나갔다. 바다의 고요한 아침은 책 읽고 사색하기에 최적이었다. 햇살이 뜨겁기 전의 해변이라 시원하기까지 했다. '스플리트'는 크로아티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유명한 '디오크레시아'의 궁전이 있는 곳이다. 로마의 중요한 유적지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렇게 오후에 방문할 곳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는 중, 선생님이 오셨다. "굿 모닝! 너 여기 계속 있을 거지?" 나의 짧은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옷을 하나 둘 벗으셨다. 잠시 후, 선생님은 아드리아 해를 가르며 바다로 향했다. 나도 선생님을 따라 함께 수영을 하고 싶어졌다. 또 샤워를 해야 하고, 젖은 옷을 세척해야 하는 수고 때문에 오늘 아침에는 수영을..

첫인상 in 자그레브

시차 때문인지 비행기 안에서 잠을 자 둔 덕분인지 새벽 4시 30분에 깼다. 좀 더 잘까 하다가 주섬주섬 옷을 입고 책과 노트북을 들고 호텔 로비에 나갔다. 책을 읽고 싶었고, 혹 뭔가 정리해 둘 것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동유럽에 관한 책에서 크로아티아에 대한 부분만 찢어 온 부분을 읽었다. 열장 남짓 되는 페이지를 읽었다. 정말 아름다운 나라, 크로아티아. 이것이 책이 말하는 요지였다. 5시 30분, 호텔 밖으로 나왔다. 자그레브 시의 새벽 거리는 조용했다. 아직은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움이 어떠할지 상상할 수도 없고, 자그레브 시의 새벽 거리를 걸으면서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크로아티아는 1996년까지 격렬한 내전을 겪은 나라다. 유고 연방이었다가 종교와 인종 갈등으로 1991년 독립을 선언했다. 독..

여행은 자세히 보는 것이다

비행기는 독일 영공을 날아간다. 까마득히 높은 하늘에서 바라본 독일은 대한민국의 그것과 똑.같.았.다. 빛나는 태양, 두둥실 떠 있는 구름. 프랑크푸르트에 가까워지자 비행기의 고도가 좀 더 낮아졌다. 2.5Km의 하늘에서 바라본 독일은 대한민국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넓은 논밭, 그리고 숲과 들. 착륙하게 될 공항에 가까워지자 집이며 자동차며 도로가 장난감처럼 보였다. 이것 역시 대한민국과 비.슷.했.다. 현실감은 없었고, 세심히 바라볼 수도 없었다. 공항에 내려 사람들을 보니 이제야 현실감이 느껴지고 대한민국과 무엇이 다.른.지. 알.게. 된.다. 사람들의 눈동자 색깔이 다르고 공항의 이정표가 다르다. 이정표에 쓰인 언어도 확연히 다르다. EXIT 라는 문자 위에는 'Ausgang'이라는 독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