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 1466

상업과비평사

[짧은 소설] 우신경은 국내 굴지의 문학상은 물론 해외 문학상까지 수상한 일급의 소설가다. 그녀의 대표작 『문학을 부탁해』는 15개 언어로 번역됐고 국내에서는 문단을 대표하는 출판사 ‘상업과비평사’에서 출간됐다. 찬란한 인생에 변고가 생겼다. 우신경의 소설에 표절이 의심되는 대목을 조목조목 밝힌 T의 글이 세상에 알려졌다. 표절 시비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문예지가 아닌 온라인 매체를 통해 발표된 글이라는 점과 대상이 문단의 대표 주자라는 점 탓인지 논란은 삽시간에 번졌다. 우신경은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문제되는 작품을 모른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은 작가에겐 상처만 남는 일이라 대응하지 않겠다.” 표절을 전면 부인했다. 상업과비평사도 우신경을 옹호했다. “문제가 된 부분은 일상적 소재이고..

전문가처럼 마니아처럼

점점 애착이 사라진다. 물건 하나를 더 가지면 무엇 하나, 성취 하나를 더 이룬들 무엇 하나 정도였던 무상함이 최근 더욱 짙어져서 사랑 한들 무엇 하나, 행복하면 무엇 하나 정도의 감정에 이르렀다. 누군가의 염려나 조언 없이 자가진단만으로도 내 마음의 건강이 나빠졌음을 느낀다. 나의 상태를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정도는 아니나, 모든 정신이 방향성을 갖고 발전한다는 점에서는 주의해야 한다. * 나는 이제, 애착과 초연의 변증법까지 배우려나 보다. (많은 이들은 애착이 많아 초연을 익혀야겠지만, 나는 반대 상태가 되었다.) * 10기가 마지막일 것 같은 불길한 느낌, 잠시라도 떠날 것만 같은 묘한 예감, 이 모든 것을 떨쳐내고, 애착을 가져야 한다. 사람, 일상, 사물에게. * 생각할 거리도 많고,..

연못

[짧은 소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상수는 과장스럽고 성급하게 반응한다. 모든 이에게, 재빨리, 화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라도 지닌 듯이. 어떤 이가 “미처 일을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달에 바빴습니다.”라고 말하면, 상수는 그의 바빴다는 말이 끝맺기도 전에 “바쁘셨으니까”라고 메아리처럼 화답한다. 어느 날, 상수는 고객과 부동산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누가 보아도 60대 중반으로 볼만한 노인이었다. 대화 도중 노인의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끊은 노인이 “아까 말한 그 친구예요”라고 말하자, 상수는 노인의 말을 쫓았다. “아! 양평에 계신 분이요?” “아니 화곡동 친구.” “아! 골프장에 같이 가셨다는.” “그래요.” 상수의 퀴즈 맞추기식 대화가 아니었다면 불필요한 대화들이었다. “..

사랑의 사생아

[짧은 소설] 경숙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인교습을 하는 첼리스트다. 아이들의 재능을 발견하여 맞춤 교육을 잘 하기로 유명했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를 인내심으로 지켜볼 줄도 알았다. 그래서인지 자녀 양육에 있어서도 이웃집 엄마들보다 현명했다. 앞집 엄마는 딸을 학원에 보냈다. 행여 자신이 다른 엄마들보다 뒤처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옆집 엄마도 딸을 학원에 보냈다. 엄마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고 믿었고, 학원을 보내는 일은 그 중 하나였다. 경숙 역시 딸을 학원에 보냈다. 딸이 원했기 때문이다. 경숙의 딸 지영은 학원 수업을 즐거워했고 곧잘 배웠다. 엄마의 직감으로 딸의 열심을 느끼고 있던 경숙에게 학원 선생님이 지영의 남다른 재능을 전하자, 경숙은 욕심이 생겼다. 딸의 필요로 시작된 학원 수업..

진정성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시인 김남주는 단 두 편의 시로 나를 사로잡았다. 주말에 도서관에 왔다. 창비시선집을 쭈욱 살핀 것은 김남주 시인을 읽기 위함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모르는 바도 아니고, 상세히 아는 바도 아니다. 노동과 투쟁의 살려고 애썼던 저항시인임을, 그의 시들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었음을,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그의 작품들을 살뜰히 모아 전집으로 간행했다는 사실 정도를 알고 있던 터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김남주를 읽을 것인가를 가늠하기 위해 『사상의 거처』를 뽑아 들었다. 창비시선 100번째 시집이었다. 시집에 실린 첫번째, 두번째 시의 제목이 반갑다. 어쩌면 두 편의 시로 이 시인과 나와의 궁합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제목은 '시에 대하여' 그리고 '예술 지상주의'! 여기 한 시인이 있다. 그에게 시란..

메르스

[짧은 소설] 메르스 감염자가 25명으로 늘었다. SNS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예방 대책이 나돌았다. “코에 바세린을 바르면 괜찮아.” “사람들 많은 곳에 가지 마. 마스크 꼭 쓰고.” “손을 열심히 씻어야 합니다.” 세화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남자 친구 영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야, 메르스가 호흡기 질환이라 바이러스가 코 속으로 들어와 감염될 수 있는데 바세린을 발라놓으면 이 녀석이 메르스 바이러스를 몸 속으로 안들어가게 딱 잡아 준대. 지용성이라. ^^ 나는 바르고 나왔어.” 곧장 답변이 왔다. “우리나라 감염자가 지금까지 20명(?)이라는데, 5천만이 넘는 우리나라 인구에 비하면 극히 소수야. 차라리 나는 오늘 밤 움직일 때 교통사고를 걱정할래.” 영수의 머릿속에는 어제 강변북로를 달리다가 ..

계승

[짧은 소설] 세탁소에 여인이 들어왔다. 하얀색 이불을 테이블에 무성의하게 올려두면서 세탁소 주인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금방 하나 더 가져올게요.” 잠시 후 여인은 커다란 검은색 천을 한 손에 들고 돌아왔다. 세탁소 주인이 받더니 “천이네요?” 라고 물었다. “네, 여기 어디 한쪽에 브랜드가 있는데” 하면서 여인은 족히 5m가 넘는 천을 이리저리 펼쳤다. 곧 “Westcock"라고 크게 쓰인 문구가 드러났다. “(브랜드를 가리키며) 페인트로 찍은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이거 손상 될까요? 그러면 안 되는데.” 주인은 브랜드를 손으로 만지더니, 문제 될 것 같다며 “집에서 솔로 지저분한 부분만 살살 문지르는 게 낫겠는데요”라고 말했다. “싫어요, 회사 거란 말예요.” 그렇잖아도 부드러운 주인의 말투인데 ..

내면일기

[짧은 소설] 그녀는 자주 자신의 내면을 성찰했다. 마음을 살피어 반성했고 신경 쓰이는 일들은 며칠에 걸쳐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아 발견한 것들을 날마다 기록했다. 내면일기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그 기록물들은 꼼꼼하고 상세했다. 찬찬히 살피면 그녀 기분의 부침이 그래프로 드러날 정도였다. 기록은 사실이나 논리를 체계적으로 따르기보다는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같은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작성되었다. 때로는 자신의 실망스러운 행동에 짜증을 냈고, 왜 그리 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마음의 심연 속을 헤매고 다녔다. 때로는 반복되는 패턴에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말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나에 대한 다른 이들의 오해는 불가피한 인생의 일면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의 평가가 조금이라도..

독서, 짧은 소설 & 5.18

1. 어제는 5월 18일 35주년 기념일이었다. 나는 궁금하다. 매년 5월 18일이 되면,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지. (호기심이기도 하고, 역사의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대학생이었을 때에는 매년 이 날을 기념했다. 5월 18일 전날부터 덩어리 시간을 내어 5.18 자료를 찾기도 했고, 관련 영상을 보기도 했다. (기억이 맞다면) 강준만 선생의 『리영희』에서 기술된 설명이 내가 읽은 가장 충격적인 묘사들이었다. 언젠가부터 5월 18일이 되어도 나는 다른 일들로 바빴다. 홀로 묵념하는 것으로 간.단.히. 지나치고 만다. 이것이 나만의 모습이면 좋겠다. 지금도 여전히 대학생들과 시민적 지식인들은 이 나라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불러들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이들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

어느 날 문득 꽃이 피었다

[짧은 소설] 오래 전, 집 앞 꽃집에 갔다. 작은 꽃이 든 화분을 하나 사 왔다. 나는 꽃 이름을 잊었고, 화분이 놓인 곳은 어지러웠다. 가지각색의 화분이 나란히 놓인 것도 아니고, 화분 주변을 깨끗이 정돈하지도 못했다. 책과 종이 자료가 쌓인 데다 필기구와 메모지가 흩어져 있는 책상 위에, 화분을 놓아둔 것이다. 일상에 작은 생기를 더하기 위함일 뿐, 꽃이 자라날 만한 환경이나 책상 정돈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무심했다. 어머니께서 보시고서 “이렇게 책상이 지저분한데 화분이 있다고 뭐가 달라지긴 하니?”라고 물으셨다. 핀잔이 아닌 호기심이었다. 22년 동안 키웠다는 이유로, 아들을 다 안다고 여기지 않는 점이 어머니의 훌륭함이다. 변화를 궁금해 하시고 작은 노력에도 기대를 가지신다. “꽃처럼 아름답게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