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 1466

배고프다 님이 입장하셨습니다

1998년이었던가. 친구와 함께 유니텔 아이디를 만들던 때가 기억난다. PC통신 채팅을 통해 여자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는 말에 둘의 마음이 통했던 것. 접속 화면에 들어서니 아이디를 만들란다. 친구의 아이디는 ‘옥계추억’으로 정해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함께 여행을 다녀왔던 장소다. 우리 모임의 이름 ‘인스펙션’이 정해지기도 했던 곳. 내가 문제였다. 수많은 단어를 넣어도 이미 존재하는 아이디란다. 20~30분이 흐른 뒤 우리는 지쳤다. 배가 고팠다. 무심결에 “배고프다”라고 쓰고서, 나도 모르게 덜컥 엔터키를 눌렀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등록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뜸과 동시에 나의 유니텔 아이디는 ‘배고프다’가 되었다. 친구와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20대의 풋풋함과 웃음 그..

반복이 전문성의 비결이다

유투브로 음악을 듣다가, 우연히 김광석 편을 봤다. 2라운드 미션곡은 였다. 말린 대추를 씹으면서도 몇 번이 김광석의 노래인지 쉽게 맞췄다. 1번부터 4번까지 첫 소절만 듣고서도 확신했다. 다음 소절의 노래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너무 뻔했다. 이 노랠 백번은 들었을 테니 당연지사였다. 4라운드의 역시 김광석 찾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3라운드 는 너무 달라서 차마 끝까지 들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구나, 듣고 듣고 또 들으면 익숙해지고 잘 알게 되는구나. 내가 공부할 책도 읽고 읽고 또 읽으면 그리 되겠구나. 어려운 책들도 반복적으로 다가서면 다르게 읽히겠구나.'

비라도 그치면 길을 나서야지

오늘 아침의 기분은 괜찮다. 며칠 동안 힘들었는데, 오늘은 나아졌다. 잠깐이더라도 고맙다. 장마철에도 하루 이틀은 맑게 갠다. 주부들이 분주해진다. 이불도 널어야 하고, 신발도 내다 말린다. 오늘은 나도 바쁘다. 정신의 장마철을 보내다가 마음이 갠 날이다. 고개 내민 영혼의 햇살에 화답하고 싶어진다. 일감 바구니를 들여다 본다. 언제 다시 비가 내릴지 모르니 약간은 서두르게 된다. 생산성을 높이는 적당한 긴장감이라, 이마저 기분이 좋다. 바구니를 비우려면 몇 시간으로는 어림 없어 보인다. 아! 일하고 싶다. 새로운 글도 쓰고 싶다. 내일도 맑았으면 좋겠다. 화창하지는 않더라도, 비라도 그치면 길을 나서야지.

다시, 태백산행

태백산행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성실하고도 매몰찬 세월이다. 365일 동안을 쉼없이 흐르더니 얄짤없이 내게 한 살을 얹어 놓았다. 나이 들어서 맞는 새해는 희망과 서글픔이 손을 맞잡고 오는 걸까? 서글픔에는 해학이 제격이다...

유익한 즐거움을 누리기

즐거움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책읽기나 소중한 이와의 대화에도 즐거움이 존재하지만, 게임이나 흡연에도 즐거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즐거움의 양면적인 모습 때문에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을 뜻하는 ’쾌락‘이란 단어가 종종 오해를 받습니다. 쾌락, 참 달콤한 단어인데 말이죠. 저도 즐거움을 좋아합니다. 다만 즐거움이란 녀석이 분별력을 갖고 있지 않음을 주의합니다. 즐거움은 종종 내일을 생각하지 못하더군요. 타인을 배려하지 못할 때도 있고요. 결국 나의 자기경영은 즐거우면서도 유익한 활동을 찾아내어 힘써 행하는 노력입니다. 플라톤이 말이 기막히게 옳습니다. "교육의 중요한 목적은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도록 가르치는 데에 있다." 올바른 것으로 즐거워할 수 있다면, ‘달콤한 과정과 유익한 결실’이라..

고통은 힘이 세다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기면, 환자는 깨어나 몸에 삽입했던 관을 제거하고 퇴원한다. 이렇게 병원을 떠난 환자와 가족은 계속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 (p.198) - 『숨결이 바람될 때』 중 지금의 상황은 감기 바이러스가 물러난 게 아니다. 위기(!)의 순간을 넘긴 것이다. 완치가 아니라는 말이다. 생명의 위기가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위기의 주소는 저 멀리 우주가 아니다. 환자의 일상이다. 이어지는 글에서 저자(폴 칼라니티)는 이렇게 말했다. "의사의 말은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불확실성과 병적 상태는 환자 본인이 계속 씨름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암으로 죽어가는 상황에 비하겠냐마는, 살다보면 결코 예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더 힘을 내는 게 중요해요

"에마, 다음엔 뭘 해야 하죠?""폴, 더 힘을 내세요. 그게 중요해요."- 말기 암 환자 폴과 담당의(에마)의 대화,『숨결이 바람될 때』 중에서 『숨결이 바람될 때』(폴 칼라니티 저)는 아름답고 탁월한 책이다. 무엇이 그러한가? 폴의 필력이 아름답다.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자신과 마주하는 폴의 용기와 의지가 탁월하다. 과학과 문학이라는 진리 탐구의 양날을 사용하여 벼리어낸 삶과 죽음에 관한 통찰 역시 놀랍다. 이러한 장점들은 내게는 슬픔이자 고통으로 작용했다. 2년 전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를 끊임없이 떠올리게 했으니까. 슬픔을 마주하리란 걸 예상하고서 읽었다. 아니, 마주해야 했다. 마주하고 싶기도 했다. 나에게는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희망을 창조하는 영혼의 성소에 머물기도 해야..

정리에 관한 3가지 단상

윤선현 정리컨설턴트의 '정리'에 관한 강연을 들었다. 올해 처음으로 내의를 입는 바람에 실내가 더워, 혼자 들락날락하느라 강연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타이밍 좋게 주워 들은 세 가지가 인상에 남았다. 1) 강사는 요즘 유행하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은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미니멀리즘에 관한 나의 문제인식과 맞닿은 얘기라 솔깃했다. 인터넷에서 '미니멀리즘'이라고 검색하면 환상적인 사진, 하지만 따라하기에는 만만찮은 이미지를 만난다. 실제 구글에서 검색해 보니, 위 사진이 상단에 올랐다. 저러한 공간에 머물고 싶긴 해도, 좁은 집에서 실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단순한 삶이 주는 에너지를 경험하고, 미니멀리즘이 선사하는 미적 즐거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미니멀리즘에 무관심하기도 싫다. 강사..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절망도 고통도 끝이 아니다. 죽음만이 끝이다. 살아 있다면 끝이 아닌 것이다. 냇물 앞에 섰으면 뛰어 건너라. 옷이 젖을까 염려하거나 머뭇거리지 마라. 오늘의 바람과 내일의 햇빛이 옷을 말린다. 산이 가로막으면 오르고 올라 봉우리에 서라. 산마루에 서서 이마의 땀을 씻어내며 다음 봉우리의 손짓을 바라보라. 어제가 갔으니 오늘이 왔다. 살아 있으니 시작이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어제의 문은 닫혔지만, 오늘의 문이 열리리라. 지금도 새로운 문이 열린다. 그곳이 어디든지 또 하나의 출발점이다. 비가 오는 날에도, 태풍이 몰아닥친 후에도 삶은 또 다시 시작된다. 내가 이곳에 있다.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새로운 시작을 맞으며. "아무도 과거로 돌아가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

미루지 말고 타협도 말고

친구는 그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사소한 약속이었다. 길거리에서 나를 세워 둔 것도 아니고,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인해 내 일에 차질을 받은 것도 아니다. 내게 보내기로 한 자료를 보내지 않았을 뿐이다. 단언컨대, 실망은 없었다. (그는 평소에도 시간 약속을 거의 지키지 못한다. 이것은 불만의 토로가 아니다. 오히려 변호다. 대부분의 실망은, 실망한 이의 비합리적인 기대에서 비롯되는 법.) 아쉬움과 서운함도 없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은 허언'의 한 사례를 명징하게 인식했을 뿐이다. 친구에게서 나의 부족함을 발견했을 뿐이다. 게으름과 타협하는 바람에 오늘 하기로 생각한 일을 내일로 미루었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작은 약속이라고 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적은 또 얼마나 잦았나! 특히 나 자신과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