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 1466

새벽 기차

철컥 철컥 두근 두근 새벽 기차가 달린다 나를 품고 약속 향해 어둠 속을 질주한다 해가 솟아 하늘이 밝았고 빵을 먹으니 정신이 깬다 구름인지 물안개인지 분간 못한 차창 밖 신비로움 끼이 끼익 멈춰선 기차가 숨 고르는 어느 시골역 승객을 기다리다 지체없이 떠난다 기다림과 지체의 다름이여, "우리 기차는 잠시 후 창원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정시에 목적지라니! 방향을 알고 달릴 속도를 알아 그리도 편안히 달렸구나 * 기다림은 때가 오기를 바람이다. 목적과 기대를 품은 충만함이거나 간절함이 기다림이다. 지체는 때를 늦추거나 목적도 없이 용기도 없이 질질 끎이다. 기차는 기다림과 지체의 차이를 안다. 승객을 기다리다 이내 지체 없이 달리는 새벽 기차의 행진을 본다. 기차가 뿜어낸 질주하는 에너지는 기다림과 지체를 ..

정말로 거저먹기의 글쓰기

1. 소설과 에세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문학의 두 양식.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과 에세이를 모두 잘 쓴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아니, 아주 가끔 읽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 앉아 책장에 꽂힌 하루키의 에세이집 『더 스크랩』을 꺼내 들었다. 하루키의 에세이, 2년 만이다. 『더 스크랩』은 제목 그대로의 책이다. 하루키가 1980년대에 , 일요판 등을 ‘스크랩’하여 일본 잡지 에 연재했던 글을 엮었다. 하루키는 책을 여는 글에서 독자들에게 당부했다. “미리 말해두고 싶은 것은 내가 스크랩한 글은 대부분이 아무 상관없는 사소한 화제뿐이다. 다 읽고 나면 시야가 넓어진다거나 인간성이 좋아진다거나 그런 유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삿짐을 싸다 벽장에서 나온 오래된..

겨울을 맞는 일상들

1. 겨울이 성큼 다가섰다. 나는 두터운 머플러를 꺼내어 목에 둘렀고, 올 겨울 들어 첫 난방을 가동했다. 기온은 영하로까지 떨어졌다. 이번 주부터는 캐롤을 듣고 있다. 어제가 크리스마스 한 달 전이었고, 매년 이맘 때 즈음이면 캐롤과 연말이 다가온다는 설렘이 찾아든다. 한 해를 살면서 개인의 에너지도 부침을 거듭할 텐데, 나는 12월에 기운이 솟는다. 얼마간의 긴장 덕분인 것 같다. 한 해를 잘 갈무리하고 싶다는 건설적인 의지 말이다. 오늘 친구가 나를 보더니 묻는다. "좋은 일 있어?" 별일이 없었다. 그래서 대답도 "아니"였다. 녀석의 화답, "뭔가 밝아 보이는데..." 그런가 보다. 뭔가 생기가 도나 보다. 2. 겨울의 스타벅스는 특별하다. 여느 때도 좋지만, 스타벅스가 들려주는 겨울 음악은 더욱..

첫 눈 내린 날

첫눈 오늘 첫눈이 왔다 아주, 희미하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쉽게도, 금새 그래도 눈이었다 분명, 눈이었다 흔적도 없이, 이건 틀린 말이었다 내 마음에 실눈이 소복이 쌓였으니 첫눈은 하나의 실체였고 존재였다 존재는 형체가 사라져도 흔적을 남긴다 그대여, 첫눈처럼 자리를 떠날 때마다 누군가의 마음에 흔적을! * 첫 눈이 오면 꼭 만나고 싶은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첫눈에 관한 속설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첫 눈 오는 날의 만남을 핑계로 어떻게든 엮어보고 싶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첫 눈을 맞지 못했다. 기억이 맞다면, 그 날 나는 홀로 눈 오는 밤거리를 달렸고 집으로 돌아와 시를 썼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렀다.나는 시를 잊었고, 그녀는 결혼하여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오늘..

은행나무가 춤을 춘다

1. 오전이면 이곳에 온다. 일주일에 서너번은 출근하는 카페다. 매번 앉게 되는 자리에 몸을 얹고서 창밖을 내다본다. 커피향이 피어오르고 재즈가 들려오는 이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일과 시작 전 찰나의 시간이지만, 몰입할 줄 아는 이에게 찰나는 종종 영원이 된다. 현재가 아득해지고, 아득한 옛일이 선명해지는 순간을 맛보는 날, 나는 눈 앞에 놓인 '하루'라는 작은 인생과 춤을 추고 싶어진다. 자기 인생과 맞붙는 전투보다 자기 인생과 춤 추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자기경영이다. 춤은 전투보다 고상하지만, 전사들만이 진정한 춤꾼이 된다. 2. 창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가 주말 사이에 앙상해졌다. 노오란 잎들이 병든 병아리마냥 많이도 떨어졌다. 힘 없어 보이는 것도 나의 관점일 뿐, 나무는 결연하게 계절의 흐름을 ..

술병이 나긴 했지만...

무수골 술잔치 한 잔 두 잔 술잔이 잘도 비워지던 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이 오고갔던 시간 파전과 막걸리가 사라지면 금세 “여기요” 했던 사내들 사람 좋고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홀짝 홀짝 한 두 번은 벌컥 “형님! 제 생각이 맞는지 한 번 좀 들어봐 주쇼.” 나도 끼어들고. 형님은 아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갤 끄덕이며 얘길 듣더니 장광설을 쏟아내고. 환한 대낮에 시작한 술자리가 두 번이나 바뀌더니 시간은 흘러 자정을 향하네. 들어올 땐 쌀쌀했던 늦가을인데 나설 때에는 몸이 뜨겁고 마음은 봄이로다. 달달하다고 속삭이며 한잔만 더 달라하던 위장은 귀갓길에 춤을 추기 시작했네. 이튿날 하루 종일 집에 드러누워 내 뱉는 후회, 다시는 주량을 넘지 말자. 후회마저 밀어내는 어젯밤 대화의 훈훈함 그리고 무..

사제지우 師弟至友

師弟至友 (선생과 학생이 벗에 이르다) 선생이 머리를 열었다. 학생이 흡족해한다. 좋은 수업이다. 선생이 가슴마저 풀었다. 학생들이 감동한다. 훌륭한 수업이다.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여 배우고 익혀 성장한다. 최고의 수업이다. 나는 홀로 생각하고 홀로 뜨겁다. 엉터리 선생이다. 학생이 머리를 열었다. 선생이 감탄한다. 진한 기쁨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전에 없이 뜨겁다. 스승의 탄생이다. 스승은 그저 산다. 학생은 그 삶으로 깨닫는다. 인생이 곧 수업이다. 선생은 머리가 희었고 학생이 뒤를 따랐다. 사제는 우정이 되었다. * 나를 선생으로 대해 주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선생의 자격에 대한 부끄러움과 더 나은 선생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어우러진 뜨거움이다. 내 인생은 엉터리 선생에서..

두 나그네를 그리며

가을 바다는 쪽빛 입김을 불어댔고 지붕이 받아내니, 하늘이다. 세월은 봄여름을 품어왔고 대지가 화답하니, 결실이다. 새들은 오색 물감을 떨어뜨렸고 수목들이 채색하니, 단풍이다. 오색 단풍, 쪽빛 하늘, 넘실대는 결실들이 저문다. 자네, 나그네여! 좀 더 머물다 가시지... * 가을비는 야속하다. (아! 감성을 돋워주긴 하지.) 가뭄을 해갈하는 일 말고는 미운 구석 투성이다. 왠지 낙엽의 걸음을 채근하는 것만 같다. 어제 쾌청한 하늘과 쨍한 햇살이 비출 때에는 마냥 '와! 가을이구나' 싶었는데, 오늘 가을비를 보니 '나그네 같은 계절이 속절없이 지나가는구나' 싶다. 초겨울의 쌀쌀함보다는 만추의 낙엽 서걱거림이 좋아서일까, 짧지 않았던 가을인데도 자꾸 붙잡고 싶다. 계절은 가고 세월도 흐른다. 인생길을 함께..

오전이 다 지나갔다

1. 적당한 포만감으로 마시는 진한 커피를 좋아한다는 글을 썼더니, 친구가 자기도 그렇단다. 그 이후로 카페에서 홀로 '적포진피'를 마실 때면, 종종 녀석이 떠오른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향도 맛도 좋네. 날씨마저 진한 가을이고. 일정이 많은 이번 주다. 가을을 누릴 여유가 없어 아쉬워하다가, 이 순간을 아쉬움에게 내어주기는 싫었다. 밖으로 나가 딱 5분 동안 하늘을 보았고 낙엽을 만졌네. 하루 5분의 여유는 언제든지 낼 수 있음이 느껴지면서 행복하더라. 연말에는 한 번 보자." 이런 메시지를 보내려고 적었다가, 오글거려서 관두었다. 2. 외출하는 길에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끊어야 했다. "아, 네. OO님. 제가 지금 엘리베이터 안인데, 잠시 후에 전화 드릴게요." 불과..

자유롭게 하루 종일

"2009년 여름, 알랭 드 보통은 히드로 공항 관계자의 초청을 받았다. 공항의 첫 '상주작가'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바쁜 이 공항을 전례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온 온갖 민족과 계층의 여행자들을 만났다. 또한 수하물 담당자로부터 비행기 조종사 그리고 공항 교회의 목사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란 책은 이 매력적이고 이색적인 작업의 결과물이다. (인용문은 책 날개에서 따왔다.) 왜 매력적인가? 알랭 드 보통에게 공항은 중요한 공간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의 현대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깔끔하게 포착할 수 있는 어떤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