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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엄마

[짧은 소설] J는 퇴근하자마자 서둘렀다. 언니 집에 갈 생각이었다. 왕복 3시간을 달려야하지만, 오늘 가야만 하는 일이 그녀를 움직였다. 회사 문을 나설 즈음 핸드백을 열어 점심시간에 작성한 손 편지를 챙겼는지 확인했다. 이제 자동차를 달릴 일만 남았다. 운전대를 잡고 시내를 빠져나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나 수진이에게 가는 길이야. 일찍 올게.” 어젯밤에 미리 말해 두긴 했지만, 퇴근 후에 세 살, 네 살 아이를 보고 있을 신랑을 생각하면 언니 집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가야만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그저 안아 주기만 해도 내 마음이 전해질거야.’ 수진이를 꼭 안아주기, 오직 이것만을 위해 J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 분당으로 향했다. 딩동! 언니 집에 도착한 J는 벨을 눌..

경험 빈곤자의 자기 반란

자신의 삶에서 경험의 빈곤을 목격한 이들이 해야 할 일은 환호다. ‘경험의 빈곤’은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다. 추상적 개념이다. 사물을 목격하는 일과 달리, 개념의 목격은 시각적 활동이 아닌 새로운 인식의 획득이다. 그러니 자신에게서 경험의 빈곤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진보다. 경험의 빈곤을 인식하면 경험의 부족 상태에서는 느끼지 못할 개혁 의지가 솟아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개선보다 개혁이 쉬운 법이다. 벤야민 역시 ‘경험의 빈곤’이 지닌 긍정적인 면을 역설한다. “경험의 빈곤은 그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데로 이끈다. 새롭게 시작하기, 적은 것으로 견디어내기, 적은 것으로부터 구성하고 이때 좌도 우도 보지 않기이다. 위대한 창조자들 중에는 인정사정이 없는 자들이 항상 있었는데, 이들은 일단 판을 엎어버리..

또 하나의 빈곤

경험은 놀랍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경험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하는 관용을 품게 된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영역도 실제로 경험하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경험은 관점을 변화시킨다. 또한 경험은 앎을 이해로 바꾼다. 체험이 못하는 일도 척척 해낸다. 우리 사회는 체험과 경험을 어느 정도 구분하여 사용한다. 체험(體驗)은 몸 ‘체’자를 쓰는 한자어다. 몸으로 잠깐 겪어보는 일이 체험이다. 체험은 일시적이고 가상적이다. 예전 TV 프로그램 중 방송인들이 노동 현장에 가서 일일 근무를 했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를 두고 ‘경험’이 아닌 이라 부른 것은 정확한 용법이다. ‘가상현실 체험’이지 ‘가상현실 경험’이라 부르지 않는 것도 같은 맥..

어느 자격지심자의 고백

- 2015년 11월 07일 나는 자격지심이 심한 사람이다. 목표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면 달성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의 목표를 모조리 공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엇보다 달성 못할까 부끄러웠고(걱정을 사서 하다니!), 나의 사적 영역을 남겨 두고 싶기도 했다(대단한 것도 없는데!). 목표는 내게 자극을 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자기경영을 추동하는 글에서 목표를 여러 밝히긴 했지만, 일부의 것을 숨겼다. 날것 그대로가 아니었다. 글을 공개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쓴 글을 A, B, C로 구분하여, 주로 B급을 공개한다. 포스팅과 마음편지 용의 글들이다. A급은 집필용이다. 처음부터 세상에 내 놓을 요량으로 썼거나, 쓰고 나니 매우 마음에 드는 글이 된 경우다. A급은 ‘언젠가’ 책..

이해가 찬탄을 부른다

이해가 찬탄을 부른다 - 『그리스인 조르바』 독법 하나 순진한 이상주의자는 어두운 현실을 곧잘 외면한다. 꿈을 추구하다가도 현실적인 문제가 나오면 절망하거나 힘들어한다. 이상성을 실현하지 못한 채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림으로 이상성을 유지하는 자들이다. 지혜로운 이상주의자는 진흙투성이 현실 속에서 이상의 꽃을 피워낸다. 경멸스러운 현실이더라도 직면하여 그 속에서 삶을 일군다. 조르바는 자신의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는 이상주의자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화자는 사람 볼 줄을 알기에, 조르바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매료된다. 사람을 믿어야 하는가. 조르바와 ‘나’는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나'는 자신에게 고용된 인부들을 이해하고 애정하려고 애썼다. 갈탄광이 성공하면 그들과 형제처럼 지내려는 계획도 세..

성찰과 피드백

[짧은 소설]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웠다. 불성실하게 준비한 학생과 열심히 노력한 학생의 점수 차가 크지 않았다. 선생은 ‘불성실’에게는 훈계를, ‘노력’에는 칭찬을 전해야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시험 문제의 변별도가 떨어진데다가 불성실한 학생과 노력한 학생들로 구분되기보다는 한 학생에게 불성실과 노력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은 한 명 한 명에게 칭찬과 훈계를 모두 주었다. 스스로를 성찰하여 노력했던 대목은 기뻐하고 부족했던 점은 반성하기를 바랐다. “성찰할 때 성실한 대목마저 싸잡아 자격지심의 재료로 삼지 마세요.” 선생의 의도와는 달리, 학생들은 타고난 기질대로 칭찬과 훈계 둘 중 하나만 받아들었다. 시험 준비에 불성실했던 학생, 자격지심을 주된 정서로 느끼는 학생, 어렸을 때부터 잘했다..

욕망이 소멸되는 시간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찢긴 구름은 천천히 대지 위를 달리며 그림자를 대지 위에 부드럽게 드리우고 있었다. 한 떼의 구름이 하늘 저쪽에서 일어났다. 태양이 구름 뒤로 들어갔다 나옴에 따라 대지의 표정은 살아 있는 얼굴처럼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곤 했다.”(p.39)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만난 구절이 1박 2일 영주로 다녀왔던 가을 여행을 상기시켰다. ‘아! 이번 여행에서는 가을 하늘 한번 쳐다보지 못했구나.’ 나는 15명이 함께 떠난 여행의 가이드였다. 후속 일정을 생각하고, 시간을 조율하고, 사람들을 챙기는데 관심을 두느라 홀로 느긋한 시간을 갖지는 못했다. 이것은 아쉬움이 아니다. 나의 정열의 부산물이었다. 홀로 떠나는 여행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다르다. 홀로 떠난 여행은 사유할 시간을 듬뿍 품에..

일하는 베짱이, 조르바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p.24) 『그리스인 조르바』의 초반부에 나오는 말로, 조르바가 새로 만난 주인과 나눈 대화입니다. 많이 회자되는 구절이죠. 특히 다음의 짧은 물음과 답변은 강렬한 울림마저 줍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소설 속 화자는 조르바를 처음 만난 날에 단박에 매료되었습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

새 출발을 위한 책읽기

1. “저는 올해 생일날 다시 태어났어요. 이 마음을 기념하기 위해 읽을 만한 책이 있을까요?” 와우팀원의 물음에 나는 그에게 맞춤한 다섯 권의 책을 추천했다. 한두 권이 아닌 다섯 권이나 된 까닭은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내 고질병이 도진 결과였다. 꼭 다섯 권을 읽어야 재탄생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권만, 아니 단 한 페이지로도 누구나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변화와 도약은 책읽기가 아닌 결심으로 이뤄지니까. 결심만으로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단호한 결심 없이는 꾸준한 실천도 없다. 2. 나도 추천한 책들을 읽고 싶어졌다. 자기 상황에 맞는 책읽기는 독자를 더 멋진 삶으로 인도한다. 그런 독서는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이라는 컨셉으로 오직 나를 위한 목록을 선정했다. 목록이 처음에는..

아카이브로 날아갈 책들

나의 장서는 양평 아카이브와 동교동 서재에 나뉘어져 있다. 장서의 90%가 아카이브에 있고, 내 생활의 중심은 90%가 동교동에서 이뤄진다. 읽을 책들을 실어오고 읽은 책들을 실어가는 일이 자연스러운 내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일상의 일면을 들여다본다. 군더더기를 없애 효과성과 효율성 모두를 높이고 싶어서다. 일상과 몸매는 군더더기가 없을수록 아름답다. 1. 여행서 두 권 올해 가을에 일본에 갈 뻔했다. 실행되었더라면, 오랜만에 둘이 떠나는 해외 여행이었다. 내겐 둘이 떠나는 여행이 가장 드물다. 연예인처럼 밀월여행을 떠날 수도 없고, 결혼한 친구랑 떠나기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이다. 실행한다면 아마 그의 아내가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 국내 여행을 둘이서 다녀 온 적은 네번이다. 친구 P와 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