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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행진과 독서 내공

독서 행진과 독서 내공을 위하여 - 요즘의 독서생활 단상 (1) 1. 모처럼 며칠 만에 책 한 권을 읽었다(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 쉽고 얇은 책이었기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이든 부피든 묵직한 책을 읽어온 요즘인지라, 한 권의 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어낸 건 오랜만이다. 약간의 성취감을 느꼈다. 성취감은 노고에 비례하는 법이다. 쉽게 읽었기에 기쁨이 크지는 않았지만, '다음 책도 끝까지 읽어야지' 하는 정도의 욕망을 부추기는 데에는 충분한 성취감이었다. 책상에 '읽다 만 책'을 쌓아두어도 압박감을 받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독서생활을 역동적으로 지속하기 위해서는 종종 책을 끝까지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책의 마지막 장까지 완독(完讀)하고 싶은 네 권의 교양서다. 『..

은행나무가 춤을 춘다

1. 오전이면 이곳에 온다. 일주일에 서너번은 출근하는 카페다. 매번 앉게 되는 자리에 몸을 얹고서 창밖을 내다본다. 커피향이 피어오르고 재즈가 들려오는 이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일과 시작 전 찰나의 시간이지만, 몰입할 줄 아는 이에게 찰나는 종종 영원이 된다. 현재가 아득해지고, 아득한 옛일이 선명해지는 순간을 맛보는 날, 나는 눈 앞에 놓인 '하루'라는 작은 인생과 춤을 추고 싶어진다. 자기 인생과 맞붙는 전투보다 자기 인생과 춤 추는 일이야말로 최고의 자기경영이다. 춤은 전투보다 고상하지만, 전사들만이 진정한 춤꾼이 된다. 2. 창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가 주말 사이에 앙상해졌다. 노오란 잎들이 병든 병아리마냥 많이도 떨어졌다. 힘 없어 보이는 것도 나의 관점일 뿐, 나무는 결연하게 계절의 흐름을 ..

술병이 나긴 했지만...

무수골 술잔치 한 잔 두 잔 술잔이 잘도 비워지던 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이 오고갔던 시간 파전과 막걸리가 사라지면 금세 “여기요” 했던 사내들 사람 좋고 기분이 좋아 나도 모르게 홀짝 홀짝 한 두 번은 벌컥 “형님! 제 생각이 맞는지 한 번 좀 들어봐 주쇼.” 나도 끼어들고. 형님은 아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갤 끄덕이며 얘길 듣더니 장광설을 쏟아내고. 환한 대낮에 시작한 술자리가 두 번이나 바뀌더니 시간은 흘러 자정을 향하네. 들어올 땐 쌀쌀했던 늦가을인데 나설 때에는 몸이 뜨겁고 마음은 봄이로다. 달달하다고 속삭이며 한잔만 더 달라하던 위장은 귀갓길에 춤을 추기 시작했네. 이튿날 하루 종일 집에 드러누워 내 뱉는 후회, 다시는 주량을 넘지 말자. 후회마저 밀어내는 어젯밤 대화의 훈훈함 그리고 무..

사제지우 師弟至友

師弟至友 (선생과 학생이 벗에 이르다) 선생이 머리를 열었다. 학생이 흡족해한다. 좋은 수업이다. 선생이 가슴마저 풀었다. 학생들이 감동한다. 훌륭한 수업이다.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여 배우고 익혀 성장한다. 최고의 수업이다. 나는 홀로 생각하고 홀로 뜨겁다. 엉터리 선생이다. 학생이 머리를 열었다. 선생이 감탄한다. 진한 기쁨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전에 없이 뜨겁다. 스승의 탄생이다. 스승은 그저 산다. 학생은 그 삶으로 깨닫는다. 인생이 곧 수업이다. 선생은 머리가 희었고 학생이 뒤를 따랐다. 사제는 우정이 되었다. * 나를 선생으로 대해 주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선생의 자격에 대한 부끄러움과 더 나은 선생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어우러진 뜨거움이다. 내 인생은 엉터리 선생에서..

두 나그네를 그리며

가을 바다는 쪽빛 입김을 불어댔고 지붕이 받아내니, 하늘이다. 세월은 봄여름을 품어왔고 대지가 화답하니, 결실이다. 새들은 오색 물감을 떨어뜨렸고 수목들이 채색하니, 단풍이다. 오색 단풍, 쪽빛 하늘, 넘실대는 결실들이 저문다. 자네, 나그네여! 좀 더 머물다 가시지... * 가을비는 야속하다. (아! 감성을 돋워주긴 하지.) 가뭄을 해갈하는 일 말고는 미운 구석 투성이다. 왠지 낙엽의 걸음을 채근하는 것만 같다. 어제 쾌청한 하늘과 쨍한 햇살이 비출 때에는 마냥 '와! 가을이구나' 싶었는데, 오늘 가을비를 보니 '나그네 같은 계절이 속절없이 지나가는구나' 싶다. 초겨울의 쌀쌀함보다는 만추의 낙엽 서걱거림이 좋아서일까, 짧지 않았던 가을인데도 자꾸 붙잡고 싶다. 계절은 가고 세월도 흐른다. 인생길을 함께..

오전이 다 지나갔다

1. 적당한 포만감으로 마시는 진한 커피를 좋아한다는 글을 썼더니, 친구가 자기도 그렇단다. 그 이후로 카페에서 홀로 '적포진피'를 마실 때면, 종종 녀석이 떠오른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향도 맛도 좋네. 날씨마저 진한 가을이고. 일정이 많은 이번 주다. 가을을 누릴 여유가 없어 아쉬워하다가, 이 순간을 아쉬움에게 내어주기는 싫었다. 밖으로 나가 딱 5분 동안 하늘을 보았고 낙엽을 만졌네. 하루 5분의 여유는 언제든지 낼 수 있음이 느껴지면서 행복하더라. 연말에는 한 번 보자." 이런 메시지를 보내려고 적었다가, 오글거려서 관두었다. 2. 외출하는 길에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끊어야 했다. "아, 네. OO님. 제가 지금 엘리베이터 안인데, 잠시 후에 전화 드릴게요." 불과..

수잔 손택 2차 강독회

2015년 봄, 다섯 번에 걸쳐 '수잔 손택 강독회'를 진행했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 손택 읽기의 효과가 컸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글쓰기에 손택의 어록들이 침투시켰고, 어떤 분은 손택이 보여준 삶의 열정에 매료되었고, 어떤 분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전면적 재고를 할 기회를 얻었더군요(그는 자신의 글을 '리뷰'에서 '비평'으로 끌어올려야겠다는 자극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반향에 용기를 얻어 2차 강독회를 진행합니다. 2차 강독회의 중심 텍스트는 「해석에 반대한다」입니다. 손택하면 떠오르는 대표 에세이입니다. (그의 첫 책 『해석에 반대한다』에 실려 있고요.) 손택의 다른 글보다 읽기 쉽고 짧은 에세이지만, 지성계에 미친 영향은 컸습니다. 이 에세이만 농밀하게 이해해도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 예술에..

자유롭게 하루 종일

"2009년 여름, 알랭 드 보통은 히드로 공항 관계자의 초청을 받았다. 공항의 첫 '상주작가'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바쁜 이 공항을 전례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권한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온 온갖 민족과 계층의 여행자들을 만났다. 또한 수하물 담당자로부터 비행기 조종사 그리고 공항 교회의 목사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랭 드 보통의 『공항에서 일주일을』이란 책은 이 매력적이고 이색적인 작업의 결과물이다. (인용문은 책 날개에서 따왔다.) 왜 매력적인가? 알랭 드 보통에게 공항은 중요한 공간이다. "만약 화성인을 데리고 우리의 현대 문명을 관통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깔끔하게 포착할 수 있는 어떤 장소에 데려가야 한다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공항..

비 오는 날의 단상

비 오는 날의 끼적임 그리고 생각. 이것들이 교차하며 내어놓은 서로 다른 세 가지 단상. 1. 비 온 후의 질척거림은 싫지만 비 내릴 때의 차분한 분위기는 좋다. 비를 맞는 양가적 감정. 짚신 장수는 비가 오니 할 일 없어 무료해 하고 우산 장수는 비가 와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즐거워 한다. 세상 만사에 깃든 양면성. "당신이 싫어하는 것들을 긍정하라. 부정 안의 긍정성 발견, 이것이 양면성이다. 나아가, 당신이 믿는 긍정적인 것들을 부정하라! 긍정적인 것들의 부정성 발견 또한 양면성이다. 양면적 사유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 몰이해로부터, 몰이해가 가져온 고뇌와 갈등으로부터. 그리고 양극적 사유는 우리에게 지혜를 선사한다. 모순관계로 점철된 인생을 이해하게 만듦으로." - 연지원 2. 감수성과 낭만을 지닌..

비 오는 날의 벤쿠버

보슬비가 내리는 아침, 즐겨 찾는 카페에 왔다. 추적추적,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자동차들, 우산 쓴 보행자, 차분한 쓸쓸함, 감성을 자극하는 음악. 이러한 것들이 어우러지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이루마의 이 어울리는 장면. 그날 아침, 나는 벤쿠버에 있었다. 가는 비가 약하게 내리는 날씨였다. 자동차가 오가는 길 건너편에 스타벅스가 보였고 내 등 뒤에 선 건물은 시립도서관이었다. 하늘은 흐렸고,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마음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여행자였다. 비 올 때마다 종종 떠오르는 장면이다. 지금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카페에 앉아 창 밖으로 비가 내리는 장면을, 나는 듣는다. 그리고 노란색 단풍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를 본다. 6년이 지나, 태평양 건너의 도시 서울에서 사는 내게 ..